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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보석 중 가장 으뜸의 지위를 차지하는 건 단연 다이아몬드다. 결혼 예물이나 중요한 자리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보석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는 순수한 탄소 한 물질로 이루어진 광물이고 가장 단단한 보석이기도 하다. 세공 과정을 거치면 가치는 더 극대화되고 영롱한 빛을 가진 귀한 보석이 된다. 이런 다이아몬드의 특성 탓인지 다이아몬드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하고 영원히 변치 않은 사랑을 상징한다. 또한, 보석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을 공업용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이처럼 중요한 보석이자 유용한 광물인 다이아몬드지만, 그 보석의 역사에는 많은 비극들이 함께 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고 다이아몬드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살육의 역사도 함께 하고 있다. 최고 순수한 물질이라 하는 다이아몬드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이 자리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다이아몬드는 재앙과 저주를 불러오는 사악한 존재다. 다이아몬드에 얽힌 역사를 살피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다이아몬드의 대표적 생산지는 인도였다. 18세기 브라질 등에서 다이아몬드가 채굴되기 전까지 인도는 거의 유일한 다이아몬드 생산지였다. 그 인도를 대표하는 다이아몬드가 코이누르, 빛의 산이라는 뜻의 다이아몬드였다. 본래 인도 대부분을 포함해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인도의 무굴제국의 보물이었지만, 무굴 제국의 흥망성쇠 속에 그 주인이 수차례 바뀌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후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코이누르는 영국의 손에 들어갔고 당시 영국을 지배하는 권력자 빅토리아 여왕의 소유가 됐다. 

코이누르는 그 크기가 186캐럿에 이르렀고 현재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1700억 원의 가치가 있었다. 그만큼 귀한 다이아몬드였고 무굴제국, 인도를 대표하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인도는 그 보물을 지킬 수 없었다. 이후 코이누르는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다시 세공되어 105캐럿으로 그 크기가 줄었지만, 화려함이 더해졌다. 현재는 영국 왕실이 소유하며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일설에는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한 왕이나 권력자들이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탓에 그 소유와 사용이 여성들로 제한되고 있다고 한다. 

 

 

 



영국 왕실의 다이아몬드 사랑은 영국 식민지 곳곳의 다이아몬드 탐사로 이어졌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생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킴벌리는 대표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지가 됐고 대규모 채굴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대형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광산의 명성이 더 커졌다. 많은 광산업자들이 킴벌리 광산으로 향했다. 채굴이 본격화된 1871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킴벌리 광산에서는 2천킬로그램의 다이아몬드가 채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이아몬드 광산의 성공은 아프리카 지역 전역의 탐사로 연결됐다. 그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해안에 자리한 국가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 광산 발견 소식이 들렸다. 1930년대 발견된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광산에는 영국의 대기업이 진출해 채굴권을 독점했다. 귀한 보석의 발견이 있었지만, 정작 그 땅의 주인들은 수혜를 입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시에라리온은 독특한 인구 구성을 가진 아프리카 국가였다. 국가 성립의 역사는 미국의 독립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은 미국 내 흑인 노예들은 용병으로 활용했다. 흑은 노예들은 영국을 위해 싸우는 대가로 노예해방을 약속받았다. 노예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문제는 전쟁 후였다. 전후 해방 노예들은 대거 영국으로 유입됐다. 그들은 영국 내 어떤 기반도 없었고 빈민으로 전락했다. 늘어나는 해방 노예는 영국의 중요한 사회문제가 됐다. 

영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내 해방 노예들에게 새로운 땅에 정착 토록 유도했다.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으로의 해방 노예 이주를 추진했다. 많은 흑인들이 이주했고 이는 시에라리온 역사의 시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에라리온과 인접한 국가인 라이베리아에는 미국에서 이주한 해방 노예들이 주류를 이뤘다. 같은 지역에 영국과 미국의 흑은 노예들이 나라를 이루는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의 이러한 정책은 기존 시에라리온 거주민들과 이주해온 이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영국에 보다 우호적인 흑인들인 지배계층이 됐고 영국과 미국의 과거 노예들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원주민들을 억압했다. 갈등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늘 그렇듯 이런 갈등의 해결하기보다는 방치하고 이용했다. 이런 갈등은 시에라리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지속됐다. 

 

 

 



이런 내부의 갈등과 함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이권 다툼은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됐다. 애초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광산은 영국의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 주 소비층의 왕실 귀족과 극 상류층으로 국한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나라에서 왕정이 무너지면서 수요가 줄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관련 기업들은 다이아몬드의 대중화를 위한 마케팅을 활발히 전개했다. 다이아몬드는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결혼 서약이나 예물로서 필수품으로 자리했다. 당연히 그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광산 개발과 생산도 활발해졌다. 

그런 상황에도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며 영국에 파병됐던 시에라리온 국민들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인지했고 이는 나라 전체에 퍼져나갔다.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농사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다이아몬드 채굴에 더 매달리기 시작했다. 광산업자들이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불법 채굴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불법 채굴된 다이아몬드는 암시장을 통해 거래됐다. 시에라리온 국민들이 채굴한 다이아몬드는 암시장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지만, 농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이 발생했다. 이 상황에서 시에라리온의 주력 산업이었던 농업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나라는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했다. 이는 나라의 경제적 위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절대 빈곤층이 대부분인 국민들의 다이아몬드 채굴의 열기를 제어하긴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시에라리온은 1961년 영연방 국가로 독립을 이뤘다.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은 국가의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보다 공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시에라리온의 집권 세력은 부패했고 독재권력이었다. 집권 세력은 광산을 사유화하고 이익을 독점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그에 맞는 대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차별적 구조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둘러싼 이권 다툼은 큰 내전으로 비화됐다. 

 

 

 



포데이 산코를 중심으로 한 반 정부군이 등장했다. 이들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차별적 사화 구족 속에 신음하는 국민들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노리는 건 다이아몬드 광산의 이권이었다. 그 광산을 놓고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권을 노린 인접 국가들이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은 국제적으로 발전했다. 

1991년 시에라리온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은 애초 탐욕을 채우기 위한 전쟁으로 국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목적은 없었다. 무고한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반군과 정부군 모두에 고통받는 처지에 몰렸다. 국민들의 일상은 파괴되고 두 약탈자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이 사이 정부군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20대 청년 장교 출신의 스트라서가 정권을 잡았다.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젊은 지도자에게 큰 기대를 했지만, 그 역시 이전 독재자와 다를 게 없었다. 그는 국민들의 안전보다 정권의 안전, 다이아몬드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반군과의 전투 역시 같은 선상에서 지속됐다. 심지어 그는 국제 용병회사를 통해 용병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 용병들 중 상당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을 억압하던 부대 출신이었다. 자신의 정체성마저 져버린 정권의 한 단면이었다.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부와 그 정부 이상의 잔악한 반군 사이에서 시에라리온 국민들의 고통은 지속됐다. 긴 무정부 상태 혼란의 상황 속에서 시에라리온 국민들의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혼돈의 시간이 지나고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위한 합의와 선거가 결정됐다. 시에라리온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포데이 산코가 이끄는 반군 세력은 나라의 안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방해하는 한편 선거에 임하는 국민들에게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무고한 국민들의 손과 발을 잘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반군에 의해 수만 명의 국민들이 장애인이 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반군들은 그들이 장악한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역을 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국민들에 공포심을 자극하고 그들의 이권을 지키려 했다.

반군은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들의 향한 무차별 테러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들이 더 파렴치했던 건 반군 병력 중 상당수가 우리 초등학생 정도의 소년병들이었다는 점이다. 초기 반군은 부패한 정부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청년들이 반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잔혹성과 실체가 드러나면서 많은 병력이 이탈했다. 반군은 그들의 자리를 소년들로 대신했다. 마을을 습격해 소년들을 강제로 잡아가기도 했고 지속적인 세뇌 교육과 심지어 마약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통제하고 반군을 위한 전사로 만들었다. 그 소년병들은 아무 죄의식 없이 무고한 국민들을 살해하고 손발을 자르는 일을 했다. 그들이 더 자라 그때의 일을 후회해도 소년병들에게는 학살자라는 오명이 뒤따랐다. 이런 소년병들은 반군의 주력부대로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내전은 1996년 민선 대통령의 취임과 국제 사회의 개입으로 평화로 가는 길이 열렸다. 드디어 정부와 반군 간 평화 협상이 시작됐고 그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반군들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단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군은 그들이 세력을 유지했고 무장 해제의 약속도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시에라리온 정부는 반군의 수장 포데이 산코는 체포하고 법적인 단죄를 시도했다. 하지만 반군은 무차별 살육전으로 맞섰다. 국제 사회는 다시 협상을 종용했다. 2차 평화 협상이 열였고 포데이 산코는 사면됐다. 오히려 정부 요직에 자리하며 다이아몬드 광산 등 각종 이권을 합법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권 장악까지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땅히 전쟁범죄로 단죄되어야 할 인물의 차기 권력자로 등극하는 상황은 시에라리온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국제 사회는 전쟁범죄 단죄보다 시에라리온 사태의 빠른 처리에만 주목했다. 국제 사회의 지원이 절실한 시에라리온 정부로서는 불합리한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는 흉악한 범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었다. 국제 사회의 비정함과 힘없는 나라의 비애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바로잡은 건 시에라리온 국민들이었다. 국민들은 더는 포데이 산코의 전횡을 방치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포데이 산코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그 세력이 커졌다. 반군 세력은 시위대에 발포하며 저항했지만, 국민들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포데이 산코가 반군 지도부는 마침내 체포되어 국제 형사재판소의 심판을 받았다. 최악의 살육자였던 포데이 산코는 그 과정에서 뇌출혈로 사망하며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반군 수장의 사망으로 반군 세력을 그 힘을 잃었고 2002년 시에라리온의 내전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이후 시에라리온은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빈곤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산지지만, 그 혜택은 국민들이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다. 

2003년 불법적으로 채굴되고 유통되는 다이아몬드의 거래를 규제하는 국제 협약인 킴벌리 프로세스가 만들어지고 다이아몬드 광산 관리의 투명성이 강화됐지만, 시에라리온 국민들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을 사라졌다는 점은 작은 위안이다. 

이렇게 시에라리온 국민들에게 다이아몬드는 풍요와 부유함을 상징이 아니었다. 비극과 재앙의 상징이었다. 시에라리온 일부 부족은 다이아몬드는 불행의 근원으로 여기고 그 소유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고 한다. 누군가에는 사랑의 결실이고 누군가에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로 사용되는 다이아몬드지만, 그 안에는 피지배 국민들의 한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의 고단의 세월, 피와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다이아몬드를 피의 다이아몬드 블러드 다이아몬드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 안에 담긴 세계사적 사건들에 이해를 가진다면 다이아몬드를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보석으로만 볼 수 없다.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에 여겨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더 있다 할 수 있다. 이제는 다이아몬드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석이 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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