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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요한 현장을 찾고 그 장소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는 TBS '역사스테이 흔적'에서 용산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강스테이 흔적'이라는 부제를 단 방송에서는 일상에서 늘 보던 곳이지만, 그 안에서 이전에 잘 몰랐던 근. 현대사의 이야기를 함께 했다. 패널들은 그 여정을 하루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듯한 느낌으로 채워 나갔다. 그 속에서 용산의 과거, 현재를 함께 살필 수 있었다. 

2022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용산은 각종 이슈의 중심이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를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는 문제로 사회적 논란이 있었고 그 논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기존 국방부 청사와 외교부 공간의 이전을 함께 하는 일인만큼 막대한 비용 지출이 불가피하고 급하게 진행된 이전으로 인해 곳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과 관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은 10.29 참사로 다시 한번 뉴스에 중심에 섰다. 해마다 이태원 일대에서 열리는 할로윈 축제를 위해 그곳을 찾은 수많은 청년들이 압사 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하고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매년 열렸던 행사로 충분히 대비가 가능했지만, 이번 할로윈 행사에서 공권력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이후 정부의 참사 대처도 곳곳에서 문제를 보였다. 참사와 관련한 당국의 사과는 없고 책임지는 없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 이 참사의 아픔은 유족들이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렇게 참사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2022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뉴스의 중심이었던 용산은 근. 현대사에서도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용산은 대륙 침략을 위한 조선대 병참 기지로 개발됐고 일본 군대가 주둔했다. 한때는 조선 총독부 총독의 관저가 용산에 자리했다. 그 과정에서 용산은 다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주거지이기도 했다. 일제의 필요해 의해 도시 계획이 이루어진 곳이 용산이었다.

 

 

 



이런 용산의 역사에는 그 지리적 입지가 크게 작용했다. 용산은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했다. 당시 도성은 지금의 사대문 안을 말했다. 한양으로 향하는 수로 교통의 종착지였다. 한강은 도성인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특히, 도성으로 향하는 각 지역의 진상품과 세금으로 징수된 쌀이 배로 수송됐다. 그 배는 서해 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한양으로 향했다.

지금은 한강 하구둑이 있어 밀물 때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주지만, 당시는 밀물 때 밀려드는 바닷물의 영향으로 한강물이 역류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역류하는 물은 용산까지 밀려봤다. 각 지방의 배들은 그 물살을 이용해 용산으로 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용산에 내려진 각종 물품들은 남산을 넘어 도성으로 수송됐다. 각종 재화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용산이었고 용산은 조선 시대 물류의 중심이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용산을 주목했다. 이는 광복 후 최근까지 이어진 외국 군대의 용산 주둔의 역사로 연결됐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차지했던 용산의 땅은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주한미군의 땅이 됐다. 2000년대 들어 주한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미군 기지는 우리 국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우리나라의 자랑인 국립중앙박물관과 드넓은 공원이 조성됐다. 미군이 모두 떠난 자리에는 앞으로도 공익 목적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장기간 미군이 주둔하면서 생긴 각종 오염 정화 문제는 또 다른 난제로 남아있다. 

이렇게 수로 교통의 요지로 활용되던 용산이 큰 변화를 맞이한 건 철도의 개통이었다. 1899년 인천과 지금의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선 철도가 개설됐고 1900년 한강 철교가 놓이면서 경인선 철도는 용산과 연결됐다.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철도교통의 기점이 되는 용산역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용산역은 일제 강점기 경성역이 생기기 전까지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용산역은 수로 교통의 요지에서 철도 교통을 중심으로 한 대륙 침략의 기지로서 기능했다. 

 

 

초창기 기차 모형

 



이런 용산의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가 용산에 있다. 지금은 용산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용산 철도병원이 그곳이다. 1907년 일제 통감부가 주도하여 동인병원으로 개원한 이 병원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8년 지금의 형태로 재건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8년에는 철도의원으로 불렸다가 1938년 용산철도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이 병원은 부상당한 철도 노동자들의 치료를 위한다고 했지만, 일본의 대륙 침략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용산임을 고려하면 조선 주둔 일본군과 중. 일 전쟁 중 부상당한 일본군의 치료를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일제는 용산을 포함해 철도역이 있는 부산, 대구, 순천, 원산에 철도병원을 세웠다. 

이 용산철도병원은 광복 후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2011년 병원으로서 사용이 끝났고 최근에 용산구에서 이 건물을 기부채납 받아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 제428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건물이 잘 보존되고 건물의 취지에 맞게 활용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이렇게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거듭난 용산은 용산역 배후에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조성됐다. 용산 일대에 주둔한 일본군과 관공서에서 일하는 이들과 가족들이 그곳에 살았다. 이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섰고 신용산이라 불렸다. 그 이름은 지금도 전해지고 했다.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용산역을 벗어나 용산에는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를 만날 수 있다. 한강대교가 그곳이다. 한강대교는 1917년 일제 강점기 건설됐다. 이 다리는 한강 철교와 함께 당시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유일한 한강 다리였다. 무엇보다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인도교였다는 점에서 한강대교는 한강에 놓인 최초의 다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한강 대교가 놓이면서 영등포, 노량진 지역이 서울권에 편입이 됐고 서울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한강은 수도 한양으로 가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었다. 강남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야 했다. 조선시대 후반기 개혁 군주로서 깊은 이상을 남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하기 위해 한강대교가 지나는 곳에 배 다리를 놓고 건넜다는 기록과 그림이 남아 있다. 그만큼 수도 서울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한강대교 개통은 공간의 제약을 사라지게 하고 이 사라지고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야경

 



이 한강대교는 1925년 역사상 최악의 물난리 중 하나였던 을축년 대홍수 시기, 일부가 유실되는 일도 있었고 이후 지속적인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들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됐고 1984년 한강대교로 개칭됐다.

이 한강대교는 6.25 한국전쟁 당시 큰 아픔의 장소이기도 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일방적 우세로 전개됐다. 사전에 전쟁을 철저히 준비한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우리 국군은 이런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해야 했고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과정은 급박하게 전개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재빠르게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다수의 서울 시민들, 심지어 유력 인사들까지 북한군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못했다. 

북한군이 서울에 근접하면서 서울 시민들을 서둘러 남쪽으로 향했고 유일한 인도교인 당시 한강 인도교로 몰렸다. 한강 인도교는 피난민과 후퇴하는 군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980년 6월 28일 새벽 그 한강 인도교가 갑자기 폭파됐다.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이로 인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로 인해 미쳐 남쪽으로 철수하지 못한 국군 상당수가 고립되고 말았다. 이는 개전 초기 상당한 전력 손실로 이어졌다. 

 

방송 링크

https://youtu.be/HAV6iyUHAvE

 



또한, 많은 서울 시민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치면서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지켜봐야 했고 북한군 치하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훗날 이 작전은 잘못된 작전으로 밝혀졌다. 이 작전의 명령권자는 책임을 면하고 명령을 수행했던 이가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고 억울한 사형을 당한 이는 복권됐다. 하지만 당시 한강 인도교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원통함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때의 기억은 한강대교 한 부분에 동판 형태로 남아있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한강대교를 시작으로 한강은 광복 후 강남과 강북을 잇는 수많은 다리가 건설됐다. 지금은 올림픽 대교를 연결하는 노량대교를 포함해 32개의 한강 다리가 건설되어 있다. 한강의 다리는 우리 근. 현대사의 발전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강대교는 용산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의미 있는 또 다른 장소였다. 

용산의 과거를 지나 현재를 조명했다. 지금은 텅 빈 공터가 된 철도 공장 부지였던 용산정비창은 국제업무지구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이 개발과 관련해 각종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용산에는 많은 빌딩과 주거 단지가 들어서며 변화가 진행 중에 있다. 용산정비창 부지는 용산의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 용산 미군기지, 남산

 

 

이 용산에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K 팝의 선두주자 BTS의 소속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BTS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고 K 팝이 K 문화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쩌면 BTS의 성장 스토리는 우리 문화가 세계 변방에서 중심이 되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용산의 과거, 현재를 지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최근 용산의 새로운 명소로 향했다. 드라마에서 소개되면서 방문자들이 늘어난 일명 '땡땡거리'가 그곳이다. '땡땡거리'는 지금은 도시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철도 건널목이 있다. 드라마 배경이 되기도 했던 백빈 건널목을 중심으로 이 지역은 마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은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오래된 주택과 상가 건물은 철도 건널목과 함께 중장년층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특히, '땡땡거리'라는 말이 붙게 된 이유인 건널목에서 기차가 지나감을 알리는 소리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잠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주는 시계의 종소리처럼 들린다. 건널목의 '땡땡' 소리와 함께 걸어서 함께 한 용산에서의 여정도 마무리됐다. 

첫 시작점인 용산 역사 박물관을 시작으로 그 주변만을 중심으로 여정을 이어갔지만, 거리에 상관없이 그 시간은 많은 근. 현대사의 사건들로 채워졌다. 하루의 여정이었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 동네, 고장에 있는 과거 흔적들에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의 흔적들이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됐다. 실제로 그 속에서 흥미로운 역사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결코 멀지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알게 해준 시간이었다. 

 

방송 캡쳐 화면

 

 

본 게시글은 TBS 서포터즈 '티끌러 활동(자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 : 프로그램 /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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