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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조선 시대부터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서울은 우리 역사 그 자체였다. 조선 시대 최 전성기였던 세종대왕 시대의 번영기가 있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시련의 역사, 근대화의 격변기에도 서울이 있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급속한 산업화에서도 서울이 있었다.

 

이제 서울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적인 대도시가 됐다. 6.25 한국 전쟁 후 폐허 위에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발전의 상징이었다. 더 나아가 서울은 K 팝을 시작으로 한국 문화가 세계의 문화 주류가 되면서 경제 발전의 상징이 아닌 세계 문화의 중심이 됐다.

 

극적인 변화를 거듭한 서울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역사박물관이 그곳이다. 서울 역사박물관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모아 놓은 시간의 축소판이었다.

 

 

 

 

 

 

1392년 건국한 조선, 그리고 천도, 개국 공신 정도전이 설계하고 건설한 조선의 수도 한양

 

 

육조 거리 재현 모형

 

 

조선의 법궁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육조 거리, 조선의 관청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상업활동의 중심지 시전 거리

 

 

 

 

시전의 상인들, 그곳에서 팔던 물품

 

 

 

 

태종 임금 때 도입된 주민등록증이라 할 수 있는 호패, 16세부터 성인 남성은 이 호패를 지급받았다. 이를 통해 인구를 통제하고 세금 징수와 군역과 공역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활용했다. 이는 조선이 중앙집권 국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왕궁을 중심으로 재편된 한양 거주지

 

 

 

 

도성의 중요한 물길이었던 청계천, 역대 조선 왕조에서 청계천에 대한 치수 사업을 매우 중요했다.

 

 

 

 

모든 길은 한양으로 교통의 중심지였던 한양, 한강은 각 지역에서 수송되는 물자가 한양에 이르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교통로였다. 한양 인근의 포구는 각지에서 올라온 배들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조선 후기 전해진 세계지도
개화기 건축물
고종의 초상
서양식 제복의 관리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큰 전란을 겪으며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국력이 크게 쇠락했다. 조선은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집권층은 이런 나라의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기득권 유지에 몰두했다. 그 결과 조선 사회의 더 보수화되고 경직된 사회가 됐다. 

 

이런 조선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성리학에 매몰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며 실사구시의 새로운 학문 실학을 현실에 접목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정치의 주류 세력은 아니었고 그들의 변화 노력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은 세계의 큰 물결 속에서 소외된 채 빗장을 걸어 잠근 은둔의 나라가 됐다.

 

 

 

 

당시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세워진 서양식 건축물

 

 

개화기 조선에서 활약한 외국인들
서영에서 기록한 조선
전차와 기차
독립협회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하며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빠르게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한 근대화는 정권의 거듭된 실정과 부패가 겹치며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구식 군대의 반란이 임오군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도 있었다. 1894년에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내정 개혁과 외세 배격을 주창한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은 근본적인 개혁에는 이르지 못했고 점차 열강들의 침략과 이권 다툼의 장으로 변모했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고 이에 조선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이에 대응하려 했다. 일본은 1895년 조선의 실권자라 할 수 있었던 민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공분을 불러왔다.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종의 망명을 단행한 아관파천을 통해 국정을 전환하고 친일 세력을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후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조선이 자주국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독자적인 근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독립협회가 세워지고 민중들이 함께 토론하며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만민공동회, 그들의 목소리를 담은 언론사인 독립신문이 발간되며 민주 정치의 가능성을 나타났다.

 

하지만, 독립 협회는 황제권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탄압으로 해산되면서 자생적인 민주주의 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고종은 국민들의 지지와 그 힘을 통합해 외세의 침략에 맞서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제국이 힘없이 무너지는 또 다른 원인이었다.

 

 

멀티미디어로 재현된 근대 거리

 

 

 

대한제국은 다방면에서 근대화를 이뤄냈지만, 국고는 부족했고 열강들 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탈 속에 점점 일본에 종속되어 같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과 영국과의 밀약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고종 황제는 외교적 노력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지만, 국제 정세를 읽지 못했다.

 

힘없는 나라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국권을 빼앗기며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 있어 주 무대는 서울이었다. 서울은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곳이고 그 역사를 박물관에서 살필 수 있었다.

 

 

국권피탈의 과정
철거된 총독부 건물 잔해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 국내에서의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 등 해외로 나가 독립군을 조직하고 조직적으로 일제와 싸웠다. 또한, 해외를 근거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전 국민이 나라의 독립을 외친 3.1 만세 운동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이었고 우리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쾌거였다. 3.1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연결되며 독립운동에 중요한 에너지가 됐다.

 

 

그리고 그 3.1 운동은 서울의 중심 종로 탑골공원에서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도시계획도
일제 강점기 도심
그 시대 생활상

 

 

일제 강점기, 한편에서 서울은 일제에 의해 도시계획이 이루어지고 도시가 확장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4대문 안에 국한되어 있던 서울의 영역은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도 확대됐다. 도성 밖에서도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에 서울시민들의 생활상도 크게 달라졌다. 한복보다는 서양식 의복이 보편화되고 생활 전반에 서구의 문물들이 자리했다.

 

 

 

 

근대화의 문물들

 

 

이렇게 삶은 보다 편리해지고 발전했지만, 식민지 국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일제는 그들의 침략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중. 일 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까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침략 전쟁을 진행했다. 우리 국민들은 그들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남녀 구분 없이 전장으로 징집되어 보내졌고 남아 있는 이들도 일제의 수탈에 신음해야 했다. 일제는 국민 총동원령과 함께 민족말살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며 우리 민족의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목숨들이 사라져 갔다.

 

 

일제 강점기 요약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염원인 광복이 찾아왔다. 이후 우리 민족의 냉전체제의 최 전방에서 남북으로 나라가 분단되고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6.25 한국 전쟁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남. 북은 적대관계로 대립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의 극심한 수탈과, 6.25 한국 전쟁 속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최 빈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놀라운 경제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은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4.19 혁명,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최근의 촛불 혁명까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의지는 계속됐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전후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대표적인 나라가 됐다.

 

서울은 그 역사와 함께 했다.

 

 

부동산 개발의 시대
한강 개발
서울의 변화를 상징하는 세운상가
1980년대 아파트 내부
지금의 서울

 

 

숨 가쁘게 서울의 역사를 둘러본 시간이었다. 한정된 시간으로 세세히 그 기록들과 내용들을 살피지 못한 게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서울의 역사를 한 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다음에는 좀 더 시간을 갖고 구석구석 살펴봐야겠다. 서울은 수도 이전에 우리 역사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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