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5월 23일 발발하여 1598년 12월 16일 종전된 것으로 기록된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의 영향은 조선의 역사를 임진왜란을 전. 후로 나눌 정도다. 실제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 변화는 부정적인 면이 강했다. 7년 동안 전 국토를 황폐화시킨 전쟁은 조선 경제의 근간이었던 농업의 생산 기반을 무너뜨렸다. 조선은 이후 임진왜란 이전의 농업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조선은 서서히 상공업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양반 중심의 신분제에 균열이 발생하고 기존 사회 시스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층은 그들의 기득권을 다 공고히 하는데 집중하면서 조선 사회는 더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훗날..

1989년 11월 외신은 충격적인 뉴스로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동. 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양국 정부나 관계 당국이 아닌 양 측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동독과 서독의 국민들은 장벽 위에서 함께 만나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망치와 해머, 심지어 중장비를 동원해 장벽을 부수기도 했다. 수십 년 세월 베를린을 갈라 놓았던 콘크리트 장벽은 한순간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독일은 1990년 10월 긴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통일 독일로 거듭났다. 이런 베를린장벽 붕괴를 놓고 많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실제 베를린 장벽 붕괴는 여러 우연과 실수, 사건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동독 당국의 말실수와 이를 오해한 한 언론사의 오보, 마침 베를린 장벽 인근에서 ..

2월 24일 러시아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수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피해는 누적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이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침략자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에 대한 분노도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은 대 러시아 경제제제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한 군사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개전 초기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침략자와 맞섰고 많은 곳에서 러시아의 공세를 이겨내며 영토 밖으로 러시아 군대를 밀어내는 성과를 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공세의 초점을 ..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를 전쟁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를 남겼다. 이후 인류는 전쟁의 폐해를 확실인 인식했고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미국과 소련 양 강대국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 속에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종식되며 전쟁의 위험을 벗어난 듯했지만, 민족과 종교, 각종 이해관계 속에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최악의 전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전쟁은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의 발칸반도 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 범죄로 기록되어 있는 홀로코스트는 전쟁 기간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가 이끄는 집권당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나치가 중심이 되어 나치 독일과 그들의 점령지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학살된 이들은 1,000만명이 넘고 그중 600만명이 유대인이었다. 나머지는 슬라브족과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 나치에 반대한 정치범, 전쟁 포로들이었다. 나치의 민간인 학살은 매우 계획적이었고 집요했다. 그런 대학살을 주도한 건 히틀러와 나치 친위세력이었지만, 많은 부역자들과 협력자들이 그 일에 함께 했다. 마치 국가 산업과도 같이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런 최악의 전쟁 범죄 주동자들은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처벌을 받았고 다수가 처형됐다. 뉘른베르크는 독일 중세 역사 흔적이 다..

일본과 관련한 뉴스를 접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다. 1869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로 그 역사가 시작됐고 1879년 일왕에 의해 지금의 이름이 하사되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장소가 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이에 앞장섰던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고 일본 침략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과 대만인들까지 이곳에 합사되어 있다. 형식은 민간 종교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극우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장기간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수상 정치인들이 주기적으로 이 신사에 방문해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