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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 범죄로 기록되어 있는 홀로코스트는 전쟁 기간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가 이끄는 집권당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나치가 중심이 되어 나치 독일과 그들의 점령지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학살된 이들은 1,000만명이 넘고 그중 600만명이 유대인이었다. 나머지는 슬라브족과 장애인, 성소수자, 집시, 나치에 반대한 정치범, 전쟁 포로들이었다. 나치의 민간인 학살은 매우 계획적이었고 집요했다. 

그런 대학살을 주도한 건 히틀러와 나치 친위세력이었지만, 많은 부역자들과 협력자들이 그 일에 함께 했다. 마치 국가 산업과도 같이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런 최악의 전쟁 범죄 주동자들은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처벌을 받았고 다수가 처형됐다. 뉘른베르크는 독일 중세 역사 흔적이 다수 남아있는 유서 깊은 도시지만,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있어 중심이기도 했다. 반대로 그들의 몰락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치의 최고 지도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 히틀러는 패망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상당수 전범들은 당시 단죄되지 못했고 해외로 도피하거나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남았다.

독일이 철저한 과거사 청산과 배상, 나치 전범 처리를 했다고 하지만, 전후 곧바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독일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역사 예능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나치 청산과 전범들의 최후와 관련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인 유대인들의 학살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심각해진 독일 경제 상황과 민생고, 그 속에서 등장한 나치당의 세력 확대가 결정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전후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그 배상금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이었다. 이어진 세계 대공황은 독일 경제를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다수의 독일 국민들의 삶도 점점 어려워졌다.

 

 



사회적 불만이 커지고 집권층에 대한 불신이 커져갔다. 이 시점에 나치당이 점점 민심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앞세워 타 민족을 혐오하고 그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했다. 독일에 많은 거주했던 유대인들이 나치당의 가장 큰 표적이 됐다. 나치당은 유대인들이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선동했고 다수의 국민들이 동조했다. 애초 극우주의 소수 정당이었던 증오와 혐오를 먹고 다수당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들인 마침내 정권을 잡았고 반유대주의를 한층 다 강화했다. 소수당이었을 때는 유대인이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정책적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이는 대학살로 연결됐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철저히 시스템화되고 치밀한 계획 속에 진행했다. 이는 나치당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이를 위해 나치는 체계화된 선동 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했다. 그 중심에는 히틀러의 최측근 인사인 괴벨스가 중심이 된 제국선전부가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강했던 괴벨스는 다양한 방법으로 반유대인 정서를 자극했고 그에 필요한 선전활동을 했다. 그 한편으로는 나치는 홍보하고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우상화 작업도 병행했다. 

나치는 당시 중요한 미디어 매체였던 영화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34년 제작된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는 나치 전당대회 장면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화면 구성이나 스케일 면에서 기존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히틀러를 부각시키고 나치당의 우월성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나치의 선전 선동 활동은 라디오 등 각종 방송 매체, 통제된 얼론 등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활발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그 시대 독일 국민들은 선전 선동에 열광했다.

이런 여론 형성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에 구체적인 학살 계획 수립과 실행을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나치의 친위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초기 나치 친위대 수장이기도 했고 악명 높은 비밀경찰 게슈타포 창설을 이끈 제국 원수 괴링과 이후 친위대 수장으로 자리한 힘러가 중심인물이었다. 나치 친위대는 곳곳에 유대인 수용소를 건설하고 유대인들을 강제 노역시키고 학살을 자행했다. 최초의 유대인 수용소 다하우 수용소와 역사 교육의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가 대표적인 수용소다. 이 외에도 전쟁 기간 곳곳에 수용소가 건설되어 운영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대인 학살은 더 노골화됐다. 나치는 그들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에 유대인 집단 거주지인 게토를 건설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이동이 차단되고 철저한 통제 속에 살았다. 배급되는 식량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 안에서 상당수 유대인들이 기아에 허덕이다 사망했다. 이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적지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나치는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빠르게 진행했다. 이제는 학살을 넘어 말살정책으로 발전했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전담하는 기동 학살 부대를 창설했다. 그 부대는 법적, 행정적 절차 없이 유대인들을 총살했다. 심지어는 학살에 들어가는 총알을 아끼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가스차를 운영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버스에 탑승한 유대인들을 그 안에서 가스에 질식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더해 유대인 수용소는 유대인 절멸을 위한 일종의 학살 공장으로 변모했다.

병들거나 노역이 어렵거나 필요성이 떨어진 유대인들은 가스실에서 사망하고 화장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머리카락과 금니 등 그들의 유품은 또 다른 제품의 생산 재료로 사용됐다. 마치 도축장의 소와 같은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이었다. 심지어 나치는 유대인들 학살과 관련한 일에 같은 유대인들을 이용하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했다. 존드 코만도부대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유대인 학살 부대였다.  

잔혹한 학살의 한편에는 비인권적인 생체 실험이 함께 자행됐다. 나치 친위대 소속 의사인 멩겔레가 그 일을 중심에 있었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근거나 철저한 인종주의자이자 우생학 신봉자였던 멩겔레는 유대인들을 인종 개조 혈통보존 연구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수용소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실험의 대상으로 분류됐다. 이에 멩겔레는 죽음의 천사라는 악명이 붙기도 했다. 멩겔레는 생체실험을 통해 순수 독일 혈통 생사 실험과 열등한 유전의 소멸 등 허황된 실험을 지속했다. 많은 유대인들과 장애인들이 희생됐다. 

이렇게 유대인 학살에는 많은 이들이 동원되고 협력했고 함께 일했다. 하지만 나치의 세상은 영원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연합국의 반격을 받아 점점 수세에 몰렸고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는 시점에 나치당은 몰락했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그의 심복 괴벨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치당 핵심 인사의 죽음과 함께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나치와 함께 했던 전범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친위대장 힘러는 전쟁 후 도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1명의 핵심 나치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됐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운영된 전범재판에서 전범들은 홀로코스트 등  다수의 전쟁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전범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서로에게 죄를 떠넘기거나 전쟁 중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들 중 12명의 교수형이 1946년 집행됐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전쟁범죄에 대한 평화주의적, 민주주의적 단죄를 했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승전국들의 시각으로만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었다. 독일 스스로가 전쟁범죄를 처벌하고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곧바로 이어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겹치면서 재판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극히 소수의 전범들만 단죄를 받았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은 처벌받지 못하는 허술함도 있었다. 결국, 과거사 청산의 문제는 독일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아우슈비츠 유적지

 


처벌받지 않은 나치 전범들은 다수가 해외로 도피해 삶을 영위했다. 그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특히, 남미 국가에 다수 나치 전범들이 자리를 잡았다. 당시 남미 국가들 중 상당수는 독재체제로 나치 독일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또한, 나치 전범들이 가장 많이 도피한 아르헨티나는 백인 우월주의가 강했던 나라였다. 잔혹한 생체실험의 주동한 멩겔레 역시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살았다. 그는 남미에서 이름을 바꾸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197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극악한 전범이었던 그였지만, 그는 천수를 다 누렸다. 

모든 전범들이 그런 행운을 누린 건 아니었다. 탁상의 학살자로 불리던 대표적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모사드에 체포돼 재판정에 서야 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용소의 책임자로 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수송 책임자 일을 했다. 그의 손에서 유대인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게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가능하면 빠르게 많은 유대인을 수용소에 보내는 일에만 몰두했고 유능한 일처리로 인정을 받았다.

나치 패망 후 아이히만은 독일에 은신하다 1950년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이후 모사드에 체포된 그는 1961년 이스라엘 범정에 섰다. 그의 재판은 전 세계에 중계됐다. 그는 재판에서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고 명령만을 수행했다고 했다. 그는 업무 담당자로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만 노력했다고 했다. 학살의 피해자인 유대인들에게 대한 죄책감과 사과는 없었다. 그는 주어진 여건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강변했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상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았고 나치당의 일원으로 남았다.

잔혹한 전쟁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변명하기만 하는 태도에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그중 재판 과정을 직접 참관한 정치사상가인 안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악의 평범성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사실은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이 어느 특별한 광신자나 반사회성을 가진 인격장애인이나 악인들이 아닌 국가와 조직, 사회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이 보통이라 여기는 평범한 이들에 의해 향해진다는 주장이다. 실제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힘없고 무기력한 노년의 남자였다. 여타 나치 전범들도 그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이 주장은 큰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그 논리라면 나치가 자행한 대학살과 각조 전쟁범죄를 지지하거나 침묵하거나 외면한 다수의 독일인들도 범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당이 힘을 얻는 되는 독일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그 바탕에 있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저항하지 않고 일상을 살았던 당시 우리 땅에 있었던 국민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친일파 세력들의 자기 합리화의 근거로 악용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시대 상황에 따라 열심히 살았을 뿐이고 그들의 행동이 누군가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고 일제가 그런 잔혹한 전쟁범죄를 하는지 몰랐다는 식으로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의 원어에는 악의 천박함과 저속함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악이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악의 일면을 인지하고도 이에 협조했다면 평범성은 천박함과 저속함으로 바뀌게 된다. 인간의 행동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전범들과 친일파들은 그들의 행동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그 행동에 따른 책임을 그들은 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 상황의 불가피성만으로 변명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 유적지

 


이는 악에 저항한 이들에 대한 모욕이다.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에서도 양심 있는 이들이 있었다. 안톤 슈미트라는 독일 군인은 자신이 관리하던 게토 지역의 유대인들을 돕다 발각되어 사형되기도 했다. 영화로 큰 반향을 얻었던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쉰들러도 목숨을 걸고 다수의 유대인들을 학살의 위기에서 구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양심 있는 행동을 했다. 일제 강점기에서도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다수의 항일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악의 세계 속에서도 빛이 되는 양심이 있었다. 악의 평범성으로 당시 모든 이들을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전범들은 책임의식을 망각하고 맹목적 애국심과 도덕적 판단을 무시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단죄 받아 마땅한 이들이었다. 친일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감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책임의식은 1960년 중반 프랑스의 6.8운동에 영향을 받은 독일 학생운동 세력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독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6.8운동은 기존 사회질서의 모순과 부조리에 저항한 전후 세대인 대학생 등 청년들의 저항 운동이었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 보수적인 가치관을 벗어나 평등, 성해방, 인권과 공동체 주의,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 생태주의 등 진보적인 가치가 사회의 가치로 주목받고 자리 잡게 했다. 

독일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독일의 6.8운동은 보수적인 가치관 속 권위주의 타파와 나치 청산을 기치로 내걸고 일어났다. 이와 함께 억압적인 교육제도 개혁,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 파괴를 함께 주장했고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 운동 자체는 실패했지만, 6.8세대들은 정치권에 진출해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에 독일에는 환경운동을 주도하는 녹색당이 생겼고 지금도 정치 세력으로 힘을 유지하고 있다. 전후 최초로 진보 정당인 사민당이 집권하는 배경이 됐다. 사민당은 6.8운동 세력의 주장들을 대폭 수용하면서 사회개혁을 진행했다. 동서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 동독을 포함해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등 동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시 사민당 정권의 독일 총리 빌리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주도하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동방정책은 독일의 보수와 진보 정치 집권 세력들이 모두 계승하며 통일 독일로 가는 밑거름이 됐다. 

또한, 나치 전쟁범죄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미치던 전범 전력자들이 축출됐다. 나치 전쟁 범죄에 대한 시효가 폐지됐고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범죄에 대한 사과와 반성, 배상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치 독일 시절 크게 성장한 벤츠나 BMW 등 전범 기업들도 동참했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폴란드 방문 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게토 수용소의 희생자 기념비에서 무릎을 꿇고 과거 전쟁범죄를 독을 대표해 사죄하는 "Warschauer Kniefall"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독일의 나치 청산과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는 일이었다. 

 

아우슈비츠 유적지

 


나치 청산과 과거가 문제 해결 시작과 함께 독일 사회 전반에 진보적 사고와 가치가 뿌리를 내렸다. 독일의 6.8운동과 진보 정당의 집권 이후 독일은 나치 청산 작업의 강화와 함께 권위주의적인 획일화된 교육 대신 공동의 작업 학습을 중시하는 한편, 다양성을 중시하는 교육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등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교육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런 교육과 함께 독일에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은 법으로도 금지되고 있다. 최근 나치주의자들이 다시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에 대한 독일 사회의 시선은 매우 차갑고 냉정하다. 

여성의 권익 신장도 이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은 기술직이나 고위직에 진출할 수 없었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적이었던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도록 했다. 상대적으로 저임금 구조 속에 있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동의 없이 주부가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던 전근대적인 민법 규정을 개정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전 근대적인 가부장적 전통을 무너뜨렸다. 

노동권도 크게 신장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전후 독일의 고도성장기 저임금과 열악한 근로 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권리가 강화됐다. 노동법이 크게 개선되고 노동자 단체 설립이 허용됐다. 이후 독일의 노동운동을 크게 활성화됐다.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의 권리 신장은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나치 청산과 전범들에 강력한 처벌은 독일 사회의 변화 속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과거 청산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독일 국민들의 의식 향상과 정신적인 성숙, 그에 따른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가져온 일이었다. 이러한 기류는 정파와 상관없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식은 분쟁지역 난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과 연결되고 있다. 실제 독일은 유럽 국가에서 가장 많이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독일은 유럽의 경제 대국을 넘어 선도 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과거청산 노력과 이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나치 전쟁범죄로 인해 함께 학살당한 유대인 외 타 민족과 집시,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피해에 대해 다소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과거 식민 지배를 했던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자행한 잔혹행위에 대해서도 과거사 청산에 부족함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과거사의 청산과 반성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런 부분은 독일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거사의 과제다. 

 

 

안티 나치 엠블럼

 



독일의 과거청산과 나치 전범들에 대한 단죄는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과 큰 대조를 보인다. 일본은 전후 전범 처리가 크게 부족했다. 심지어 전범 세력들이 현재 일본 정치권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과거사 문제에 매우 미온적이다. 오히려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평화 헌법에 의해 군대 보유와 교전권이 없지만, 막강한 군대를 보유한 군사 대국이 됐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는 평화 헌법 조항을 삭제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청산되지 못한 전쟁범죄의 역사는 다시 일본은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

이런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청산과 전쟁범죄의 단죄는 그 사회의 발전에 근거함을 알 수 있다. 독일은 인권 등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적  사고가 사회에 뿌리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과거 청산과 나치 단죄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일본은 여전히 우경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내 일부 양심 있는 세력들은 미약하다. 그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지 못한다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 일본 정부에 대한 압박만으로 과거사 문제 해결을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관련한 갈등해결은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일본의 우경화는 아직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과제인 친일청산과도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는 해방 후 이 땅의 친일파들은 제대로 단죄 받지 못했다. 상당수 친일파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유지했고 자손 대대로 기득권을 유지했다. 그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친일 청산과 관련한 노력은 계속 벽에 부딪히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우익의 논리에 동조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늘었다. 그들 뒤에는 돈의 논리와 그 돈을 제공하는 일본 우익과의 연결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곳곳에서 보인다. 우리 역시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사회적 부담으로 남아있다. 친일 청산과 함께 과거 독재권력 시절의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청산도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는 정의의 패배이고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과거 나치가 활용했던 특정 세력과 집단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정치 세력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튜브 등에서 돈벌이를 위해 이를 조장하기도 한다. 이는 당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혐오와 증오를 이용한 세력들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다양성이 보장되고 모든 이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깨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의 확립이 절실하다. 진짜 선진국이 되려 한다면 부와 함께 민주주의와 그에 맞는 국민들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혐오와 증오는 달콤한 사탕이지만, 그 뒷맛이 엄청나게 쓸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독일의 나치와의 단절, 과거사 청산을 이루어낸 과정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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