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관련한 뉴스를 접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다. 1869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로 그 역사가 시작됐고 1879년 일왕에 의해 지금의 이름이 하사되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장소가 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이에 앞장섰던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고 일본 침략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과 대만인들까지 이곳에 합사되어 있다. 형식은 민간 종교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극우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장기간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수상 정치인들이 주기적으로 이 신사에 방문해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과거 일본의 전쟁범죄에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외교적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의 정치인들은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다. 것으로는 평화와 번영을 말하지만 과거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에 인색한, 심지어 그들이 전쟁의 피해자인 양 전쟁의 역사마저 왜곡하려 하는 일본의 행태를 상징하는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여기서 야스쿠니 심사가 만들어진 배경이 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궁금해진다. 메이지유신은 1869년을 전후로 20여 년간 그들이 천황이라 부르는 일왕을 중심으로 근대화와 산업화, 문명화를 강력히 추진했던 시기를 말한다. 일본의 근. 현대사에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기다.
실제 일본은 이 시기 엄청난 발전을 했고 빠른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으로 빠른 시간 내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일본은 이렇게 축적된 힘과 기술로 군사 대국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본격적인 전쟁국가, 제국주의 국가가 됐다. 이는 중. 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아시아 전제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는 패망과 전범국가의 낙인이었다. 일본에 메이지유신은 자랑스러운 역사이면서도 비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배경은 외세의 침략과 그에 따른 강제적인 개항이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의 함정들은 일본 도쿄 해역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했다. 미 군함은 일본에 없었던 증기 함선으로 속도가 목선에 비교할 수없이 빨랐고 엄청난 사거리와 파괴력이 있는 대포로 무장했다. 미국은 무력시위와 함께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이전에 겪지 못했던 외세의 침략이었다.
당시 일본은 수백 년간 이어진 막부정치 시대가 유지되고 있었다. 명목상의 왕인 일본 천왕, 일왕이 있었지만, 권력의 중심에는 쇼군이라 불리는 강력한 군주가 있었다. 그를 정점으로 각 지방에는 지역의 영주라 할 수 있는 다이묘들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군사력의 근본이 되는 사무라이들이 있었다. 무인 계급이 사실상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막부정치라 불렀다.
일본의 집권 세력인 막부는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일본의 1개의 항구만 개항하고 서구 세력과 제한적인 무역과 교류를 하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의 미군함에 막부는 굴복했다. 일본은 3개항을 추가로 개방했고 미국인 그 항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미일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미국에 절대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다수의 항구가 개항되고 미국에 특혜가 부여됐다. 강제적인 개항은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 연쇄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미국과의 조약과 같은 수준이었다. 일본은 강제적으로 그들의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침략은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서부지역을 개척하고 그 영토가 태평양 연안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본격적으로 태평양 진출에 나섰고 대외 팽창정책을 가속화했다. 그 움직임은 아시아로 이어졌다. 아시아에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건설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국은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가 필요했고 일본을 선택했다. 이에 힘을 이용해 일본의 문을 열도록 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 내 큰 반발을 불러왔다. 미국과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을 막지 못한 막부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그 한편에서는 서양의 일본 침략에 대한 대응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다. 정한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반막부 세력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해외 정벌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정한론은 조선 침략의 명분을 정당화하고 침략의 범위를 아시아 전역으로 넓히는 대동아공영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는 근거가 됐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훗날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사살된 이토히로부미다.
그만큼 정한론에 근거한 대외 침략론은 이후 일본이 전쟁국가,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데 있어 큰 영향을 줬다. 반막부 세력들은 일본내에서 그들의 세력을 모았다. 외세 타도를 명분으로 일왕의 권위를 높이고 막부를 타도하려는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주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막부정권은 이들을 대거 숙청하고 탄압했다. 다수의 존왕양이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반막부 세력은 중앙 권력에서 멀어졌지만, 그들의 지역을 기반으로 힘을 키웠다. 조슈번과 사쓰마번 지역의 세력이 그 중심에 있었다.
반막부 세력은 그들 스스로 서양 세력을 공격하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참패였다. 신식 무기와 앞선 기술로 무장한 서양의 군대를 그들이 당해낼 수 없었다. 이에 반막부 세력들은 현실은 인정하고 서구의 기술과 문물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했다. 대외 전쟁에 대한 욕망이 강한 그들은 서양의 최신식 무기를 대거 수입하며 군사력을 키웠다. 또한, 인재들은 서구지역에 유학 보내는 등 인적 자원도 확충했다. 이런 노력으로 다시 세력을 강화한 반막부세력들은 왕정복고를 기치로 막부정권 타도 운동을 전개했고 2년여의 내전 끝에 권력을 장악했다. 1869년의 일이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에서 천황, 일왕의 나라가 됐다. 일왕은 신적인 존재로 격상됐고 아래 모든 이들은 평등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철폐됐다.
일본은 일왕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로 구축됐고 지방의 영주들 역시 그 시스템에 포함됐다. 이후 일본은 일왕의 강력한 권위를 앞세워 서구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활 전반에 스며들게 했다. 심지어 수백 년 세월 금기시했던 육식을 장려하는 등 식문화의 변화를 강력한 추진했다. 각종 의복은 서구의 의복으로 변모했고 그들의 전통도 내던졌다. 일왕은 전통복식을 벗고 군복에 칼을 찼다.
서구화 드라이브는 일본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선진문물 유입과 정치 경제 시스템이 기존 사회 시스템을 대신했고 국가 주도의 서구 사절단 인사들이 국가 경영의 전면에 나섰다. 일본은 단기간 내 경공업은 물론이고 중공업까지 산업화를 진행했고 막대한 생산력을 갖춘 공업국으로 발전했다.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통 인프라가 구축되며 지역 간 시공간의 거리를 급격히 줄였다. 수백년을 걸려도 이루지 못한 변화가 20여 년 사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들이 삶이 나아지는 건 행복한 일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통해 군사대국화를 함께 추진했다. 중공업의 발전은 군수산업의 발전을 가져왔고 서구의 군대 편제를 적극 수용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라면 문제가 없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군대는 침략군의 형태로 급격히 변모했다. 이는 내부 상황도 영향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권력에서 소외되고 힘을 잃은 사무라이 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군사대국화와 대외 침략을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 이미 메이지유신 이전에도 일본 내에는 조선 침략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런 이론적 기반에 사무라이 세력의 불만을 대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한 실력자 토요토미가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강행한 이유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또한, 근대화된 군대의 전력을 시험할 필요성도 있었다.
일본의 첫 대외 침략은 대만이었다. 1874년 일본군은 대만을 침공해 점령했다. 그전에 독립적 국가 형태를 유지하던 오키나와도 점령했다. 대만은 당시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나라는 내부의 반란과 서구 열강과의 갈등 속에 일본의 대만 침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일본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며 상황을 정리하기 급급했다.
일본으로서는 신식 군대의 첫 승전이기도 했고 전쟁 효과를 체득하는 계기가 됐다. 말 그대로 전쟁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일본을 깨달았다. 또한, 일본은 전쟁의 명분으로 미개한 대만의 문명화를 주장했다. 일본 치하 대만은 급격히 일본 문화가 지배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강제 개항을 하게 하면서 내세웠던 명분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국가로 나아갔다.
이 일본의 다음 목표는 조선이었다. 당시 조선은 최고 권력자인 대원군을 중심으로 서구 열강들을 거듭된 통상 요구에 강력히 저항하며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으로 눈길을 돌리는 시점에 조선은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정이 친정에 나서며 중전 민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시점이었다. 그는 대외 개방에 보다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외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진 세력들이 조선 정치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점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은 미국이 그들에게 했던 것처럼 신식 함대를 이끌고 조선 해안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해안에 상륙해 약탈과 파괴 행위를 하며 군사적 충돌을 하기도 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은 조선과 일본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에 협상을 요구했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조선이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에 사실상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상당한 특혜를 부여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최초 체결한 조약을 그대로 복사한 것과 같았다. 일본은 그들이 학습한 서구 열강들의 침략 패턴을 그대로 답습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잇따라 수호 조약을 체결하고 세계 질서 속으로 편입됐다. 하지만 대외 조약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개방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불평등 조약의 틀을 깨지 못했다.
이후 일본은 1894년 청. 일 전쟁의 승리, 1905년 러. 일 전쟁의 승리로 이어지는 조선을 둘러싼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의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조선은 서구 열강과의 외교전으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지만, 일본은 이미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올랐다. 힘없는 조선에 돕은 국가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이익이 되는 일본에 손을 들어줬다. 조선이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미국 역시 일본의 비밀 협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했다.
이런 잇따른 전쟁의 승리는 일본 내에 전쟁이 나라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그릇된 인식을 가져오게 했다. 일본은 청일 전쟁 승리고 국가 1년 예산을 뛰어넘는 배상금을 챙겼고 이는 일본 내 전쟁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를 형성하게 했다. 하지만, 러. 일 전쟁은 사실상 승전이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 배상을 얻지 못하면서 일본에 강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어느 순간 전쟁국가 일본은 온 국민이 이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는 파괴적인 제국주의에 대한 일본 내 지지를 이끌어 냈다.
계속된 승전에 자신감이 더해진 일본은 이후 중국에 침략했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전쟁의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 미국과의 전면전도 불사했다. 일본은 서양의 침략에 맞선 대동아 공영을 이룬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문명화를 선도하겠다고 했지만, 전쟁은 각 지역을 파괴하고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식민 지배를 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점령지 국민들을 학살하거나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그들 힘만으로 이어갈 수 없는 전쟁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까지 참여해야 했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등의 비인권적인 전쟁범죄는 여전히 그 상처가 남아 있다. 그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과 사과는 여전히 요원하다.
이런 잔혹한 전쟁의 대가는 명확했다. 일본은 세계 최초이자 마지막 원폭 공격을 받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국가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몰락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수십 년을 이어온 번영의 역사가 한순간 파괴되고 일본은 전범국가라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후 일본은 평화 헌법 9조에 일본은 무려의 행사를 포기하고 육. 해. 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더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국가다 일본이다. 국가 원수인 천황, 일왕의 위치도 더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국가, 제국주의 일본의 망령은 여전히 남아있다. 전후 일본 전범 세력들 상당수는 정치, 사회 전반에 그 영향력을 유지했고 그들의 정당은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전범 세력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자민당은 사실상 정권을 지속하고 있다. 자민당 세력은 꾸준히 평화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변화하려 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했다. 경제대국이기도 하지만, 세계 5위의 군사대국이기도 하다.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완비된 상황이다. 이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빗장을 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시도는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여전히 과거사 청산의 문제가 남아있고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전범들이 사회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일본에서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일본이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당당히 나서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품격과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같은 전범국이었던 독일이 끊임없는 전쟁범죄 사과와 배상, 과거사 청산을 위해 노력하면서 유럽을 선도하는 국가로 거듭난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독일에서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언급하거나 나치를 운운하는 건 큰 죄에 해당한다.
여전히 일본은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신성시하고 그들의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더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최근 유네스코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군함도 광산은 과거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강제 징용과 희생이 역사가 있다. 일본은 그 역사를 함께 포함해 문화유산 등록을 승인받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또한, 최근 근대화 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하고 있는 사도 광산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인간적 노역과 관련한 내용을 삭제하려는 꼼수를 쓰려 하고 있다.
일본이 진정 메이지유신 이후 그들의 근대화 역사를 자랑하고 인정받으려 한다면 그에 부수된 수많은 문제들과 잘못에 대한 성찰과 인정, 사과 그리고 역사기록으로 남기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에서 필요한 부분만 기억하려 하는 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전범국의 오명을 씻기 어렵게 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우리 관점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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