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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를 전쟁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인명, 재산 피해를 남겼다. 이후 인류는 전쟁의 폐해를 확실인 인식했고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미국과 소련 양 강대국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 속에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종식되며 전쟁의 위험을 벗어난 듯했지만, 민족과 종교, 각종 이해관계 속에 전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최악의 전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쟁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고도 하는 이 전쟁은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의 발칸반도 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그 연방에 속해있었던 슬로베이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등이 모두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전쟁이 주목받은 건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던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된 인종청소와 그에 따른 다수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말 최악의 인종청소가 자행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 비극이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발달했다고 하는 유럽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이었다. 

이런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역사의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 유고연방은 예로부터 복잡한 민족, 종교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발칸반도 지역은 고대부터 유럽과 이슬람의 강대국들이 분할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가 전해지고 혼재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는 세르비아계 민족과 알바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이 함께 자리했고 가톨릭과, 정교회, 이슬람교가 공존했다. 이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이 한 지역에 공존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분쟁의 가능성을 상존하게 하는 일이었다. 

 

유고 내전 후 구 유고슬라비아 지도

 


유고연방의 주도권은 상대적으로 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르비아가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고연방은 지역은 3개의 큰 세력으로 나뉘게 됐다. 그 전쟁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얻은 세르비아는 발칸반도 세력 재편을 주도했고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이나 왕국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나로 뭉치긴 했지만, 그 안에서 민족적 갈등은 더 깊어졌다. 세르비아는 그들이 주도하는 왕국을 건설하려 했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각각이 자치권을 가지는 연방 국가를 선호했다. 세르비아는 이런 시도를 힘으로 누르고 세르비아가 중심이 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만들고 군주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국왕이 암살당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며 군주제의 틀이 흔들렸다. 민족 간 대립은 나날이 격화됐다. 

민족 간 대립을 더 심화시킨 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발칸반도 침공이었다. 이로 인해 유고연방은 다시 분할됐다. 특히, 오래전부터 독립을 원했던 크로아티아는 나치의 도움으로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최악의 인종주의자였다는 점이었다. 발칸의 히틀러라 불렸던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인 외 타 민족과 크로아티아인들이 믿는 가톨릭 외 정교회와 이슬람교를 극도로 혐오하는 극우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극단적 사고는 집단 학살로 이어졌다. 

그는 타 민족들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한편,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탄압했다. 그 모습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과 아주 흡사했다. 파벨리치는 수용소를 세우고 그 안에 타 민족들을 강제 수용했다. 그 수용소의 목적은 학살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수용소 이상의 최악의 수용소였다. 발칸반도 지역에서 자행된 인종청소의  시작이었다. 그 학살의 잔혹함은 나치조차 만류할 정도였다. 파벨리치가 주도한 강제수용소에서 100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피해가 컸다. 훗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의 뿌리 깊은 원한은 이때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쌓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패망한 이후 파벨리치는 유럽을 떠돌며 도주 행각을 벌이다 1959년 그를 추격하던 세르비아인에 의해 암살되며 단죄 받았다. 하지만 두 민족 간에는 메울 수 없는 원한의 골이 패였다.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니크 풍경

 


이런 민족 간 갈등을 통합으로 이끈 인물이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고연방은 티토라는 독립영웅에 의해 하나의 나라가 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를 상대로 유격전을 이끌며 항전의 중심에 있었고 전 민족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칸 지역의 민족과 종교를 아우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했다. 티토는 각 민족 간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위를 가지도록 했다. 이를 통해 민족 간 갈등을 억제했고 강력한 공산주의 일당 독재 체제의 최고 지도자로 강력한 통치를 했다. 

그는 독재자이긴 했지만,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고수하지 않았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과감히 받아들여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진영에서 부유한 나라가 됐고 이런 경제적 상황은 국민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연방체제 유지가 국민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하는 상황에서 갈등의 가능성은 크게 떨어질 수 있었다.

또한, 티토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민족 간 조화와 공존을 도모했다. 이와 함께 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속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걸었다. 티토는 이른바 비동맹 운동의 주창자로 이에 동조한 국가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티토의 존재감은 매우 컸고 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티토의 생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1980년 5월 티토는 지병 치료 중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강력한 지도자의 사망은 유고슬라비아 정치적 상황을 흔들었다. 잠재된 민족 간 갈등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연방 국가 내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시작했고 이를 틈타 극단적 민족주의가 다시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 각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이를 조장하면서 민족 간 갈등이 다시 커졌다. 티토 집권기 유지되던 유고 연방의 평화도 서서히 균열이 발생했다.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은 1989년 세르비아에 밀로셰비치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연방 유지를 강력한 주장했다. 대 세르비아주의로 불리는 그의 정책은 세르비아 민족의 우월성,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연방 내 타 민족 그리고 국가와의 갈등을 더 키웠다.

이러한 갈등은 연방 내 타 국가들의 연방 탈퇴로 이어졌다.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연방 탈퇴를 공식화했다.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연방군은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유고 연방군은 먼저 슬로베이나 침공은 단행했다. 하지만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의 수가 소수였고 자신들에 적대적인 크로아티아를 거쳐 가야 하는 침공 루트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제 전쟁은 슬로베니아가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됐다. 결국,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허용했다.

세르비아로서는 그들의 직접 통제하기 어려운 슬로베니아의 연방 탈퇴를 허용하는 대신 다른 나라들의 이탈을 막는 게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세르비아의 예상과 달리 슬로베니아의 연방 이탈은 연방 내 다른 국가의 연쇄 이탈을 불러왔다. 세르비아 남쪽의 마케도니아가 연방을 탈퇴했고 그들은 북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가 됐다. 여기에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한 크로아티아도 탈퇴를 선택했다.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크로아티아가 연방에서 탈퇴한다면 넓은 해안선을 사라지고 세르비아의 해양 진출에 제약이 발생할 수 있었다. 여기에 크로아티아 인구 구성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 연방 탈퇴를 더 강력히 막는 요인이 됐다. 

 

보스니아 사라예보 구 시가지 시장

 


크로아티아에는 10% 정도의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지역 세르비아인들에게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는 결코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지역 내 세르비아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고 저항했다.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침공을 강행했다. 초기 전황은 세르비아의 우세였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를 압박했다.

크로아티아의 정규군은 거의 없었고 민병대 수준의 병력만 존재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치열해진 전쟁 와중에 세르비아 민병대 의한 크로아티아인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중 발생한 인종청소의 시작이었다. 그 배후에는 세르비아가 있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의 항전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이에 더해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여행지이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역사 유적지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폭격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유적지에 대한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세르비아군의 민간인 학살과 역사문화 유적지에 대한 파괴 행위는 그들에 대한 전 세계 여론을 악화시켰다. 

이에 유럽 연합은 크로아티아에 대한 지원과 함께 1992년 크로아티아를 국가로 승인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서구 유럽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 크로아티아는 일방적으로 밀리는 전쟁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결국, 1995년 크로아티아는 큰 희생이 있었지만,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칸반도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문제가 터져 나왔다. 보스니아는 유교 연방의 축소판과 같은 곳이었다. 인구 구성에서 48프로가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 37프로가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17프로가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스니아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의사 결정을 결정할 절대 다수는 아니었다.

세르비아인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보스니아는 국민 투표를 통해 유고연방 탈퇴를 결정했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내 그들의 자치국인 스르프스카를 만들고 민병대를 구성해  보스니아 정부와 대립했다. 이들은 보스니아 독립은 저지하기 위해 침공한 세르비아 군과 합세해 보스니아 정부를 압박했다. 초기 전황은 세르비아 세력이 우세했다. 그들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고립시켰다. 하지만 보스니아 인들과 정부는 끝까지 저항했고 사라예보를 지켜냈다. 그 아시 미국은 1994년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했고 보스니아를 지원했다. UN 평화 유지군이 이 지역에 파병됐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멈추지 않았다. 세르비아의 지도자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세력을 조종해 내전을 격화시켰다. 격화된 내전은 대규모 인종청소로 이어졌다.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민병대 주도로 다수의 보스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삶에 터전에서 강제로 추방되거나 집단 학살됐다. 그 대상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다.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학살자들은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들을 암매장 하기도 했다. 어느 지방 도시 스레브레니차에서는 1만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코소보 도시 풍경

 


이런 학살의 배경에는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실행자는 스르프스카의 대통령이었던 라보반 카라지치와 같은 나라의 군 참모총장 라크코 믈라디치가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르프스카 군대를 이끌었고 대규모 학살을 주도해다. 이들의 행위는 전쟁범죄로 규정되었고 국제 형사재판소로부터 전쟁범죄자로 규정되었다. 전쟁 후 이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긴 도주 생활을 벌였지만, 끝내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았다. 

이런 집단학살과 전쟁 범죄는 전 세계적인 공분을 불러왔다. 미국과 유럽의 나토는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했고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병대를 괴멸시켰다. 여기에 이들의 배후에 있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런 군사, 경제적 압박에 세르비아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미국 주도의 평화 협상이 열렸고 1995년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며 내전이 마무리됐다. 이 협정을 통해 보스니아 내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라는 연방을 이뤘고 세르비아계가 중심이 된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자치국이 됐다. 이로써 보스니아는 한 나라에 2개 체제가 공존하는 형태를 가지게 됐다. 현재 이 나라에 각 민족들은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고 각 민족별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독특한 형태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가지게 됐다. 불안정한 모습이긴 하지만, 참혹한 전쟁을 끝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인종청소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아직 코소보의 비극이 남아 있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이슬람교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소수의 세르비아계 인들이 있는 지역이었다. 유고연방 체제에서 국가가 아닌 자치 지역으로 남아있었지만, 유고연방의 해체 흐름 속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처럼 이 지역도 치열한 영토 분쟁 속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지역 내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의 지원 속에 민병대를 조직해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에 대해 무력으로 탄압을 했고 인종 정화라는 명목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결국, 이 지역도 NATO가 분쟁에 개입했고 UN의 통치를 받는 자치 지역이 됐다. 이후 코소보는 2008년 독립을 선언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수의 국가들로부터 나라를 인정받고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의 길을 걸었다. 구 소련의 붕괴와 냉전 체제의 종식과 함께 공산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국가들 상당수는 민족들의 독립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역시 그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구 유고연방 국가들 현황

 


민족들이 자기 결정에 대해 이를 인정하고 협의의 과정을 거쳤다면 인종청소라는 비극이 없었겠지만, 민족주의 흐름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하고 심지어 극단적 민족주의로 몰 고하는 파렴치한 지도자들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그 범죄의 주동자들은 국제법의 단죄를 받았다. 그 정점에 있었던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내전이 끝나고 세르비아의 민주화 혁명 과정에서 실각한 이후 전범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죄의 참회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강하게 원했던 유고 연방의 부활은 없었다. 유고 연방은 각 민족별 공화국으로 독립됐다. 세르비아는 신유고 연방을 이루던 몬테네그로마저 독립하면서 바다와 접하지 못한 내륙국으로 전락했다. 세르비아는 계속해서 유고연방의 헤게모니를 쥐고 연방의 주도권을 유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나라가 더 축소되고 말았다. 

밀로셰비치 외 앞서 언급했던 여타 세르비아계 전범 2명과 크라아티아계 전범들  역시 자신의 행위는 민족을 위한 정당한 일이었음을 강변하며 공분을 불러왔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그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기도 하고 있다. 어렵게 내전이 끝났지만, 민족 간 분쟁의 불씨는 언제든 재 점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내전 당시 가해자였던 이들과 피해자들이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여전하고 가해자들의 명확한 사과와 피해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불안 요소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인종청소는 뿌리 깊은 민족 간 갈등과 피의 보복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만, 각 나라별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대부분이 유럽연합과 NATO 체제 속에 포함되면서 극단적 민족주의의 광풍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언제든 국가적 위기 상황이 닥쳐오면 민족주의를 앞세운 극단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고 발칸반도 지역을 뒤흔들 가능성은 남아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비극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특히, 문명 충돌론자들은 냉전체제 속 공산주의 국가 내에서 억눌려온 민족과 종교가 갈등이 민족주의를 매개로 폭발했다는 식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후 세워진 나라들이 여전히 다 민족 국가 체제이고 오랜 세월 여러 민족들이 함께 나라를 이루고 살았었다는 점을 들어 정치 세력들이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한 전쟁범죄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 인종청소가 자행된 지역은 예로부터 여러 민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웃은 한순간 적이 되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할 정치 지도자들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이 부른 비극이고 그 비극을 불러온 이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동정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고 전쟁의 비극은 무고한 이들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보다 약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 근거한 탄압은 보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로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과거 우리는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희생당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 일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서 누군가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아래로 보는 갑질 문화가 만연해 있다. 내가 그 갑질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적 갈등이 특정 지역, 집단, 성별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로 이어지고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문제는 그런 증오와 혐오를 정치세력들이 교묘히 조장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고 인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다수가 편리하고 행복하기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갈등과 대립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발생하게 하고 공공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 모두에 이익이 될 수 있다. 이를 저해하는 요소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흔드는 악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사진 : 위키백과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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