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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종전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민주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지배했다. 이 냉전체제는 두 강대국 간 직접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전 세계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몰아넣었다. 양 진영을 대리하는 국지전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세계를 핵 전쟁을 포함해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 속에 살게 했다. 

우리 민족 그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긴 일제 강점기의 시련을 보낸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남한과 북한에 다른 체제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민족은 분단됐고 6.25 한국전쟁의 큰 전쟁을 겪었다. 이후 한반도는 휴전 체제 속에 분단되어 대립의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은 막대한 군사력이 대립하고 있고 군비경쟁을 지속하고 있다.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한반도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와 같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관련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명하게 대립한 사건 중 하나는 1983년 9월 대한항공 여객기 KAL 007기 피격 사건이었다. 이 여객기는 일본 영공을 지나는 항로를 이탈해 무슨 일인지 소련 사할린 상공에 진입했고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폭파됐다. 이 일로 여객기 승객들과 승무원은 모두 사망했다. 이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전투기가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전투기에 피격됐다는 점은 큰 충격이었다. 소련은 큰 비난을 받았다. 이에 소련은 여객기를 첩보기로 오인해 발생한 사고로 발표했다. 하지만 민간 항공기를 사전 경고 없이 격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련은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사할린 지역은 알래스카와 냉정 시대  미군과 소련군이 대치하는 장소였다.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했고 강한 긴장 속에서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대한항공 여격기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사건의 진상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보다는 진영 대립으로 상황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 사건을 통해 소련을 강력히 규탄하는 국제 여론을 조성했다. 소련 역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각 체제의 유불리를 계산하는 과정에 사람은 뒷전이었다. 

 

 

레닌 훈장

 


이만큼 미. 소 냉전 체제는 전 세계를 양 진영으로 갈라놓았고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보였다. 이는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 등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 어느 분야보다 정치와는 거리가 있었야 할 분야지만, 냉전 체제 속에 진영 간 교류를 제한됐다. 냉전 대립의 결과는 올림픽에서도 나타났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라 1980년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서방 진영이 대거 불참했고 이어진 1984년 미국 LA 올림픽에서는 소련을 포함해 공산권에서 불참을 하며 반쪽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중요한 영화 소재로도 활용됐다. 1962년 시작해 지금까지 그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는 첩보영화 007은 미. 소 냉전 체제에서 서방 진영에는 거악인 소련에 맞서는 영국 첩보원의 이야기가 주 소재였다. 소련 붕괴 이후 변화가 생기긴 했지만, 007 영화 속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소련을 상대로 한 활약을 많은 이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007 시리즈는 냉전시대 양측의 치열한 첩보전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미국의 CIA, 소련의 KGB로 대표되는 양 진영의 첩보전은 전쟁 이상의 치열했다. 첩보전을 위해 첨단 무기가 개발되고 각종 기술이 발전하기도 했다. 그만큼 첩보전은 중요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가 우주개발 경쟁의 시대였다면 그 이후는 치열한 첩보전과 함께 스포츠와 문화, 예술 각 부분에서 경쟁이 이어졌다. 그 이면에는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강했다. 냉전 시대 소련은 예술의 우월성 확보를 위해 발레를 집중 육성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 유산은 지금도 이어져 러시아 발레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다변화된 경쟁의 냉전 체제의 변화 속에 등장한 소련의 지도자 브레즈네프는 소련의 내적 안정을 기하고 문화발전과 서민생활 안정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 소련은 회색의 시대라 할 만큼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나라였다. 실제 소련의 경제는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에 기댄 측면이 컸다. 자원부국 소련은 거시지표면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소련의 국민들은 생활용품이 부족했고 궁핍한 삶을 살았다. 서구의 발전된 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나라가 소련을 알지 못하듯 소련 국민들도 외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어떤 삶을 사는지도 알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1980년 들어 소련의 체제는 서서히 균열이 발생했다. 자원에 의존한 소련의 경제는 원유값의 폭락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다. 여기에 1979년 12월 무리하게 시작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 소 대리전의 양상으로 변했고 소련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변모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물적 피해가 있었다. 엄청난 전쟁비용은 소련의 경제를 더 어렵게 했다. 

 

소련시절 선전 포스터

 


이 시기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의 등장은 양측의 군비 경쟁을 다시 촉진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소련에 대한 강경 외교 정책을 신봉하는 레이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저항하는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는 한편, 대륙간 탄도 미사일 요격을 목적으로 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을 시도했다. 이는 대기권 밖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기술을 그 요체로 한다. 또 다른 우주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미국의 시도에 소련은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체제 유지에도 부담이 커졌다. 

이런 소련에 젊은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등장했다. 그는 기존 소련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개혁. 개방정책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소련은 은둔의 국가에서 세계 경제 체제 속으로 들어왔고 외교 무대에도 적극 나섰다. 고르바초프의 미디어 노출도 활발했다.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무겁고 차가운 느낌, 폐쇄성을 탈피한 고르바초프의 시도는 전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고르바초프는 미국 관련 정책에도 변화를 시도했고 이에 미국이 화답하면서 새로운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됐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미국의 레이건은 수차례 정상회담을 했고 가시적인 군축에 합의하는 등 냉전의 치열한 대결 구도가 완화됐다. 전 세계적인 평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절정을 이뤘다. 서울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함께 하는 올림픽으로 세계 평화와 화합이 장이 됐다. 결과적으로 서울 올림픽은 소련이 소련이라는 나라 이름을 가지고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 됐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은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고 편견을 깰 수도 있었다. 상호 교류도 활발해졌다. 우리나라 역시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과감한 북방 정책을 전개해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하는 등 외교의 폭을 넓혔다.

소련은 과거 은둔의 국가 철의 장막 속에 갇힌 국가를 벗어나 세계 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서구 문화와 문물이 소련에 다수 유입됐다. 미국의 외식 프랜차이즈 맥도널드 매장의 모스크바 진출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훈풍은 소련이 예상하지 않았던 바람을 불게 했다. 공산주의 진영의 결속력에 균열을 발생하게 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경제난은 그들 블록 내 국가들에 대한 통제를 어렵게 했고 서구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한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서독의 동독에 대한 흡수통일을 불러왔다. 소련으로서는 동부 유럽에서 그들의 영향력 상실을 의미할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을 인정하면서 서방의 군사협의체 나토의 추가 동진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전통적으로 소련은 서구 세력의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시대 서방 기사단의 침공을 받았고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모스크바가 파괴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나치 독일의 대대적 침공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독소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다. 소련, 그 주축을 이루는 러시아인들 마음속에는 서방에 다한 강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서방세력이 그들과 국경을 접하는 상황은 심리적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소련이 제2차 세게 대전 이후 동부 유럽을 그들 세력권에 두었던 것도 서방 세력과의 완충지대의 성격이 강했다. 이런 소련에게 독일의 통일은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소련의 자세는 동부 유럽 국가들이 대거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소련의 대외 세력 축소로 이어졌다. 

 

모스크바 붉은 관장 전경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체제 문제를 극복하고 강한 나라로의 부활을 위해 시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은 소련 연방의 붕괴를 더 촉진하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기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고 권력을 강화했다면 그 권좌를 오래 유지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이전 소련 지도자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이는 서방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소련 국민들에게는 유약하게 비칠 수 있었다.

소련 국민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고는 여전했다. 고르바초프는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공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의 수상하기도 했지만, 국내적 평가는 냉정했다. 소련 국민들 마음속에는 미국과 맞서는 강대국 소련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국민적 정서 속에 개혁개방 정책에 반하는 보수 반동 쿠데타가 일어났고 고르바초프가 권력이 크게 흔들렸다. 소련 국민들과 옐친 등 개혁적 정치 세력들의 쿠데타 세력에 대한 저항과 대외 여론의 반대로 그 쿠데타는 실패했고 고르바초프는 다시 복귀했지만, 그의 권위는 크게 훼손됐다. 그와 공산당의 소련 연방에 대한 지배력 또한 크게 약화됐다.

소련 연방 각국에 잠재되어 있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연방의 해체를 불러왔다. 소련 연방의 주축이었던 러시아 역시 새로운 정치 지도자 옐친을 중심으로 연방 해체를 적극 추진했다. 러시아는 소련 연방 유지를 위해 러시아가 연방 내 국가들을 지원하고 국력을 소모하는 게 비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경제적 이익 관점에서 러시아는 연방 해체가 더 유리했다.

옐친은 이런 대중적인 정서를 파악했다. 그는 코르바초프와 달리 매우 대중적인 정치인이고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또한,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의 고르바초프와 대조적이었다. 러시아에서 옐친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코르바 초프는 이런 여론의 흐름에 밀려 그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코르바 초프는 사회주의 소련 연방,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가 됐다. 

결국, 소련 연방은 1991년 12월 공식 해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22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사회국가로 시작한 소련 연방의 역사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소련 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미국과 함께 전 세계 질서는 주도하는 2강으로 자리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끝내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공산당 일당체제는 나름 효율적으로 보였지만, 애초 사회주의 체제가 지향한 평등과 거리가 먼 특권층을 만들고 그들에 의한 독재로 흘렀다. 인간의 자유, 특히,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 등을 통제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국가 주도의 경제체제는 한계에 봉착했고 나라의 발전을 후퇴하게 했다. 국민들의 삶은 점점 궁핍해졌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는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체제로 왜곡됐다. 민주주의 체제는 복지 확대와 국가의 적절한 통제 시스템 확립 등으로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진화했지만, 소련의 사회주의는 변화하지 못했고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게 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뒤늦은 처방이었다. 

이렇게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 체제의 마지막 승자는 미국이 됐다. 하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세계는 이후에도 곳곳에서 나라별 이해관계의 충돌로 분쟁이 끊지 않고 있다. 견제세력이  사라진 미국의 일방주의는 오히려 곳곳에 갈등을 키웠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과 과거 영광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패권주의가 되살아나면서 미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공은 또 다른 냉전 시대의 서막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는 냉정 시대와 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 국가와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블록이 대결하는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아직 냉전시대의 유산이 남아있는 한반도의 긴장을 다시 크게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해방 후 원치 않은 분단 상황에 직면했고 민족 간 죽고 죽이는 전쟁을 했다. 이후에는 체제와 이념의 대립 속에 우리 민족은 적이 되어 남북으로 갈등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 민족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 등 성과가 있었지만, 남북 교류와 평화 체제 구축 등 더 진전된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재편될 조짐을 보이는 세계 질서 속에 한반도는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새로운 냉전시대가 열린다면 우리는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어느 한 블록에 대한 선택의 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런 우리에게 소련 연방의 붕괴 과정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질서는 언제든 어떤 계기로 크게 변화할 수 있는 그 영향은 우리에게 직접 영행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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