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세계사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과 관련한 가장 큰 세 가지 사건은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으로 요약된다. 이 사건들을 통해 자본가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시민사회가 형성됐고 왕과 귀족들이 중심이 된 봉건제와 전제 군주정의 구 체제는 점점 힘을 잃었다. 이후 구체제 복원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민주주의 흐름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제 전 세계 모든 나라는 그 내용이 어떠하든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정치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중 미국의 독립 전쟁은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과 세계 최초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설립과 연방제 시행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그때까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던 정치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후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는 미국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미국의 역사는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시작한다. 15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영국의 런던은 상공업이 크게 발달한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런던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이들이 집결지기 됐다. 그들 중 상당수는 미국으로 향했다. 

1606년 12월 영국 런던에서 사람들을 실은 배가 항구를 떠났다. 이들은 목적지는 지금의 미국 동부 해안의 버지니아주였다. 사람들은 당시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곳은 농사를 짓기에 척박한 환경이었고 각종 풍토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기에 어려운 환경이었다. 현지 인디언들과의 관계 역시 원활하지 않았다. 영국의 식민지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이는 미국 역사의 시작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영국인들의 미국 이주가 시작된 건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미국 매사추세츠주 도착이었다. 이 배에는 다수의 청교도들과 자본가, 기수자 등이 탑승했다. 그들의 미국으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했다. 승선 인원 중 상당수가 육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먼저 미국에 도착한 이들의 힘겨운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배에 탑승한 인원들에게 새로운 땅은 너무나 절실했다. 

당시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적으로 큰 탄압을 받고 있었다. 한때 청교도 혁명 이후 영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화정 기간 영국의 주류 정치세력이 되기도 했지만, 다시 왕정이 복고된 이후 청교도들은 국왕이 주도하는 영국 국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영국 국교회는 왕권 강화의 목적이 강했고 대외 의전이나 의식 등이  화려했다. 이에 비해 청교도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허례허식과 거리가 있었다.

특히, 영국 국교회가 일요일에 여가와 오락, 스포츠를 장려한 반면 청교도는 이에 크게 반발했다. 청교도들은 지속적으로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당연히 영국 국왕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은 일반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영국 사회 전반에 청교도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영국 국교회가 영국의 국교가 되면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더 설자리가 없었다. 결국,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땅을 찾으려 했다. 청교도들은 유럽에서 가장 개방적인 분위기의 네덜란드로의 정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는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한 청교도들의 여정이었다. 이들은 신대륙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중요한 서약을 했다. 메이플라워서약으로 기록된 이 서약은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식민지 건설을 위한 원칙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공정한 헌법과 법을 만들어 이에 복종하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도록 했다. 이와 함께 청교도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정치 공동체로 결속하고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미국 최초의 자치 헌법이고 훗날 독립정신의 근간이 됐다. 청교도들은 신대륙 정착 후 발생할 수 있는 상호 분쟁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원칙을 지키며 정부를 건설하기에는 당장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매사추세츠 지역에 도착한 일행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현지 토양과 기후에 맞는 농사 방법을 초기 정착민들은 몰랐다.

 

하버드대학 설립자 동상

 


이런 청교도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원주민, 인디언들이었다. 인디언들은 초기 정착민들이 현지에서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다. 인디언들의 도움 속에 청교도들은 식민지 건설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추수 감사절은 수확인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를 축하고 인디언들과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에서 비롯됐다.

이렇게 초기 정착에 성공한 이후 다수의 청교도들과 영국인들이 신대륙 미국으로 향했다. 매사추세츠 지역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청교도들은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1636년 세계에서도 그 명성이 큰 하버드 대학이 설립됐다. 이 대학의 이름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며 대학 설립을 주도한 존 하버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701년에는 또 다른 대학인 예일대가 설립됐다. 이후 매사추세츠 지역을 포함한 미국 북동부 지역에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들이 밀집하게 됐다. 그중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8개 대학은 아이비리그라 불리며 지금도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엘리트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후 미국 동부 해안 지역은 다수의 영국들이 이주하면서 그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초기에는 청교도들이 주축을 이뤘지만, 이후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도 함께 하며 다양한 구성을 보였고 그렇게 초기 미국의 13개 주가 형성됐다. 각 주는 다른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행사했다. 이들 주에 대해 영국은 초기 간섭을 하지 보다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관리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해가 지지 않은 나라 영국으로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자원이 없는 미국에 대한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영국의 대응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독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미국 내 식민지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오랜 세월 그 땅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초기 정착민들과 인디언들의 우호적인 관계는 식민지가 인디언들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적대적인 관계로 변했다. 영국인들과 인디언들은 종교적으로 땅에 대한 인식, 사유재산 등의 인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영국인들과 인디언들의 공존은 깨졌고 극심한 갈등은 유혈 충돌로 이어졌다. 상호 간 피의 살육전과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위해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종교적,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디언들은 힘으로 제압하고 살육하는 양면성을 보였다. 이런 피의 대결을 거치며 식민지는 점점 동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확대됐다.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 동상

 


영국이 주도하는 미국 식민지 개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신대륙 진출이 이루어졌다. 이는 미국 내 또 다른 대결을 불러왔다. 네덜란드와 프랑스와 미국에서 영국과 경쟁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 경영보다는 무역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는 미국 내 인디언들이 이들 나라에 보다 우호적인 이유가 됐다. 인디언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네덜란드는 현재 가치로 24달러의 금액에 미국 뉴욕의 최고 요지 맨허튼의 땅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미국 내 주도권을 잃었다. 특히, 1756년부터 1763년 사이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7년 전쟁은 미국 내 식민지 경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와 미국 내 인디언들과의 연합이 영국과 맞선 전쟁이었다. 영국인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식민지의 영역이 더 커졌다. 

이렇게 미국 식민지의 영향력을 공고히 한 영국이었지만, 긴 전쟁의 후유증이 컸다. 무엇보다 전쟁을 거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발생했다. 영국은 이 어려움을 식민지인들에 대한 세금 부과로 해결하려 했다. 영국은 식민지인들의 일상생활용품에 세금을 부과했다. 설탕에 부과되는 설탕세와 종이 인쇄물 전반에 부과하는 인지세 등 생활 전반에 세금이 뒤따랐다. 이에 식민지인들의 강하게 반발했다. 영국의 세금 부과는 형태만 달리했을 뿐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과세가 없다는 논리로 조직적 저항했다.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가 없는 현실에서 식민지인들의 동의 없는 과세에 대해 반대했다. 그 결과 영국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무역을 독점하는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 내 차 무역 독점은 식민지인들을 더 분노하게 했다. 그들 일상 전반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경제적으로 그들을 예속하려는 영국의 시도에 식민지들은 물리적 대응을 불사했다. 이는 식민지 내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1773년 보스턴 항에 정박중인 영국 상선의 차를 모두 바다에던져 폐기하는 일명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며 그들의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에 영국은 더 강하게 식민지를 압박했다. 영국은 특히, 영국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큰 매사추세츠, 청교도 세력이 큰 지역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매사추세츠 외 다른 주들이 영국 반대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이 식민지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경우 그들의 누리던 자치권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초대 미국 대통령 워싱턴 초상이 있는 달러 지폐

 


1774년 식민지 13주는 1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각 주의 대표들은 영국의 억압정책을 비판했다. 이에 영국은 더 강하게 식민지를 억압하려 했다. 더는 영국과의 합의가 어려운 상황에서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선언했다. 영국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이는 양측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1775년 4월 양측의 첫 교전이 발생했다. 당시 식민지 군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 수준으로 세계 최강 군대로 할 수 있는 영국군에 열세였지만, 현지 지형과 사정을 이용한 게릴라 전으로 영국군에 맞섰다. 그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이에 고무된 식민지 대표들은 2차 대륙회의를 열어 독립군을 창설하고 워싱턴을 독립군 장군으로 선임했다.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식민지 대표들 중 일부와 식민지인들 중에는 독립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독립전쟁에서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이 시기 혁명가이지 이론가 토머스 페인에 의해 저술된 책 "상식" 은 사람들의 독립의식의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책에서 페인은 봉건 제도와 왕정의 강하에 비판했고 식민지가 공화정으로 독립해야 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설파했다. 즉, "모든 사람들은 문명 상태가 시작된 이후 살아갈 때의 조건이 문명 이전에 살아갈 때보다 더 나쁘지 않아야 한다." 페인은 독립이 이런 상식에 부합한다고 했고 큰 공감을 얻었다. 

식민지 내 독립에 대한 강한 여론은 177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선언과 함께 공식화됐다. 독립선언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사람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 권리는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했다. 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고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는 정부를 변혁 폐지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수 있는 인민의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독립전쟁을  왕정 체제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적 혁명으로 규정하고 자유, 평등, 국민 주권의 명확히 했다. 또한, 국민들의 저항권 또한 명확히 했다. 이는 민주주의 이념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문장이었다. 

 

 


전열을 정비한 독립군은 영국에서 건너온 3만 명이 넘는 영국군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기 전황은 미국에 절대 불리했다. 군대 전력에서 독립군은 영국의 힘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긴 원정을 온 영국군은 이런 상황이 부담이 됐다. 여기에 1777년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를 기점으로 영국과 대립하던 유럽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이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세에 영국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을 근거로 대치했다. 하지만 포위된 영국군은 계속된 포격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마지막 저항을 하던 영국군은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프랑스의 중재로 1783년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로써 미국은 13개 주가 연합하는 연방 형태의 민주주의 국가로 그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미국독립전쟁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 결정적 여향을 미치며 전세계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도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은 영토가 대평양 연안과 알래스카에 이르며 초기 13개주는 50개 주로 늘었고 각 주를 상징하는 국기의 별 갯수도 그에 비례해 늘었다. 또한, 미국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국으로 발전했다. 미. 소 냉전체제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며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절대 1강의 국가가 됐다. 미국의 3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 시스템은 전 세계 국가들의 민주주의 표본이 됐다. 이 외에도 미국은 경제, 과학, 문화, 예술 등  등 여러 분야에서 선도 국가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독립을 선언한 후 300년도 안된 시기에 일어난 큰 변화였다. 

초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청교도들의 나라 미국은 이제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나라가 됐고 그 다양성 속 통합된 힘은 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건국 초기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의 주체는 백인 남성들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만, 건국 이후 상당 기간 흑인 노예들이 있었고 노예제도가 존재했다. 그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인종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큰 문제다. 미국 사회 전반에 자리한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의 그림자도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이 진정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로 오랜 세월 남으려 한다면 그들의 건국 당시 정신을 모든 이들에게 구현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미국의 독립 전쟁사는 그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jihuni74 인스타그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