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세계에는 또 다른 대결의 장이 펼쳐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 강력한 블록을 형성하며 맞섰다. 미국과 소련 간 직접적인 대결은 없었지만,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 세계를 뒤엎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끝난 이 대결을 역사에서 냉전이라 불렀다. 전쟁은 아니지만 온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시기였다. 

강대국의 직접 대결은 없었지만, 냉전 기간 미국과 소련의 사실상 대리전이라 할 수 있는 국지적, 즉,  열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큰 화산이 폭발하지 않는 대신 주변에서 작은 화산들이 폭발하는 모습이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를 전쟁의 비극 속으로 빠져들게 한 6.25 한국전쟁도 냉전 체제 속에서 발생한 열전이었다. 

냉전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지만, 냉전 체제를 대표하는 말을 먼저 한 건 영국의 총리 처칠이었다. 그는 한 연설에서 소련의 체제를 철의 장막으로 표현했다. 공산당 1당 독재의 사회주의 노선을 완성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과 국경을 접한 동유럽 국가들을 그들의 영역에 포함했다. 사실상 강제 병합이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서유럽과의 완충지대를 만들고 그들의 안보 위협을 감소시켰다.

이런 소련을 두고 처칠은 소련이 동부 유럽을 그들이 조정하는 위성국가로 만들고 서유럽과의 경계에 마치 거대한 철의 장벽을 쌓았다고 말했다. 철의 장막은 공산주의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그 안에서는 공산당에 반대하거나 협조적이지 않은 세력에 대한 가혹한 숙청과 국민들의 삶 전반을 국가 통제 속에 두는 등의 공포 정치가 이루어졌다. 자유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체제가 형성된 셈이었다. 

 

흐루쇼프

 


양 진영의 대립은 군사적 대립으로 이어졌고 군비경쟁을 촉진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개발해 실전 배치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직접 전쟁을 하게 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되고 이는 지구의 파멸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된 2개의 원자폭탄으로 그 위력을 실감한 세계는 핵 전쟁이 불러올 비극을 알고 있었다.

나치의 위협에 대비해 원자폭탄 제조에 주장하기도 했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제3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제3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제4차 세계대전은 막대기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제3차 세계대전은 핵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는 인류 문명의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는 미국과 소련도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전쟁보다는 대결구도를 유지하면서 체제 결속력을 강화했다. 자기 진영으로 더 많은 나라들을 포함하기 위한 세 대결의 모습도 있었다. 

그 중간, 양 진영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사건들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동독 내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민주주의 진영의 서베를린 지역에 대한 소련의 봉쇄가 그중 하나였다. 소련은 서베를린을 둘러싼 거대한 장벽을 만들고 서베를린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서베를린은 굴복하지 않았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 비행기로 물자를 공급하며 서베를린을 지원했다. 이후 소련인 봉쇄를 풀었지만, 베를린 장벽은 이후 독일의 분단과 미. 소 냉전의 상징물로 독일 통일 때까지 남았다. 

이런 냉전 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련의 지도자 흐루쇼프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단을 치닫던 시기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의 생계를 위해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금의 돈바스 지역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를 우크라이나에서 보냈다.

이후 노동운동을 하며 공산당과 인연을 맺은 그는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그 입지를 쌓아 올렸고 스탈린의 신임을 얻어 중앙 정치 무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흐루쇼프에게는 정치적 기반이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흐루쇼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 소전쟁의 중요한 전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지휘관으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각별한 인연 때문인지 흐루쇼프는 그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 소련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소련 연방 소속의 우크라이나에 이양하는 조치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갈등과 전쟁의 한 가지 원인이 됐다. 

흐루쇼프가 국. 내외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건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하면서 부터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흐루쇼프는 치열한 내부 권력 투쟁에 승리하며 소련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다. 특유의 직설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설과 서민 출신의 소탈한 이미지는 이전 소련의 지도자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1956년 2월 25일 흐루쇼프는 공산당 회의에서 깜짝 연설을 하며 소련을 뒤흔들었다. 그는 스탈린 통치 기간 자행된 공포정치의 문제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공고해진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 역시 비판했다. 스탈린은 사후에도 독. 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소련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세운 지도자로 공산당은 물론이고 대중적으로 크게 추앙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스탈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어떤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과거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하고 스탈린 통치 기간의 가혹한 숙청을 지켜본 그의 현실 인식에서 나온 일이라는 해석도 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통치 기간 심각한 기아로 큰 고통을 겪었던 우크라이나에서 성장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의도가 더 컸다. 흐루쇼프로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스탈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한 일이었다.

이후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탈린 시대와 다른 덜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려 했고 대숙청 기간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도 했다.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피의 숙청도 사라졌다. 또한,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에 변화를 가져오며 국민 생활에 필요한 경공업 육성에도 힘썼다. 그 결과 소련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실패하긴 했지만, 중공업 우선 정책의 큰 피해를 입었던 농업 육성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해 흐루쇼프 시대의 소련은 스탈린 시대와 다른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 시기 교육을 받은 이들이 훗날 소련의 개혁개방을 이끄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렇게 내부 문제에는 유연함을 보였던 흐루쇼프였지만, 외교적 문제에 있어서는 강력한 대결 구도를 더 공고히 했다. 그의 집권기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극도로 냉각됐고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할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체제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각 분야에서 더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런 미국과 소련의 갈등의 상징하는 사건이 1959년 7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일어났다. 당시 소련은 대규모 국제 박람회를 열었고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미국 정부를 대표에 이 행사에 참석했다. 흐루쇼프와 닉슨은 박람회장에서 만남을 가졌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논쟁을 벌였다. 마침 가전제품 전시장에서 흐루쇼프는 닉슨에게 이런 사치품을 미국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가 라며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이에 닉슨은 미국 노동자들이 누구든 이런 정도의 제품을 살 수 있다고 맞받아쳤다. 흐루쇼프는 닉슨에게 다시 소련의 주택에는 각종 가전제품과 주방용품이 완비되고 누구든 소련 국민 누구든 그 집에서 살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들의 논쟁은 방송 토론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그들 국가의 체제 우월성을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다. 어떻게 보면 유치할 수 있는 양국 지도자들의 논쟁은 부엌 논쟁으로 불렸고 양 진영 간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의식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흐루쇼프는 그 존재감이 더 커졌고 닉슨 역시 미국 내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정치적 입지가 커지게 됐다. 

물론, 흐루쇼프의 이런 발언은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당시 미국인 세계 제1의 공업국가로 이미 경제력 면에서 큰 격차로 앞서가는 상황이었다. 소련 역시 막강한 공업생산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독. 소 전쟁 당시 황폐화된 나라의 복구가 진행 중이었고 생산력에 한계가 분명했다. 전체적인 국력에서 소련은 미국에 뒤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에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미국에는 스푸트니크 쇼크로 불렸던 이 사건은 소련의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소련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에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인공위성 발사에 멈추지 않고 유인 우주선 발사에도 힘썼고 1961년 4월 12일 다시 한번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보스토크 1호에 탑승했던 유리 가가린은 세계 최초의 우주인이 됐고 이후 소련의 체제 선전에 있어 중요한 모델이 됐다. 

소련의 불을 붙인 우주개발 경쟁의 불씨는 미국이 이에 맞대응하면서 더 강하게 불타올랐다. 미국인 국가의 역량을 우주개발에 쏟아부었다. 국가 차원의 우주개발을 위해 미국 항공우주국 NASA가 창설됐다. 미국은 NASA를 중심으로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수준까지 기술을 발전시켰다. 소련에서 시작한 우주개발의 파고가 결과적으로 인류의 우주시대를 앞당겼다. 

양 강대국인 우주개발에 열을 올린 건 군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우주에 쏘아 올리는 로켓은 언제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 ICBM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소련의 우주기술은 결국, 미국 본토가 언제든 공격당할 수 있는 공포심을 미국에 가져다줬다. 무엇보다 양 국은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고 실전 배치한 상황이었다. 발사체에 인공위성이 아닌 핵탄두를 장착한다면 ICBM는 핵 전쟁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는 인류를 공멸시킬 수 있는 핵 전쟁의 위험을 한층 더 높이는 일이었다. 

고도화된 핵 미사일 전력까지 더해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그 위험성이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시 양국을 이끌었던 인물은 앞서 소개한 흐루쇼프와 함께 미국의 케네디가 있었다. 이들은 냉전 초기 소련의 스탈린과 미국의 트루먼과 같은 극한의 대치 상태에서 나라를 이끌었다. 

실제 두 지도자는 전쟁 바로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1962년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솟은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이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과 인접한 국가인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그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미국에 의해 밝혀졌다. 미국으로서는 지척에서 본토로 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는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마침 쿠바는 1953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중심이 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 있었다. 강력한 반미 국가가 미국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생긴 건 부담이었다. 쿠바는 소련과 우호관계를 형성했고 소련 역시 쿠바에 많은 지원을 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1957년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며 소련을 군사적으로 견제했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 아닌 중거리 미사일로 소련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소련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이에 소련은 맞대응을 결정했고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로 이어졌다.

 

최초 우주인 가가린

 



양측의 대결은 미국의 쿠바 해상 봉쇄, 미군 정찰기의 미사일 피격 사건이 더해지며 무력 충돌의 가능성을 한층 더 높였다. 그 사이 미국과 소련의 강경파들은 전쟁의 불가피성을 양국 지도자들에 강력히 주장했다. 고조된 위기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이는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전쟁의 불가피성보다는 전쟁을 막는 길을 모색했다. 양측은 강성 발언을 언론 등에 하면서 물밑에서 협상을 이어갔다.

흐루쇼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미국의 터키 미사일 기지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협상의 물꼬가 트인 순간이었다. 이에 케네디가 화답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는 협상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20세기 냉전의 절정의 순간 일어난 일은 전쟁이 아닌 협상이었다. 하지만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뜨거운 전쟁의 위험성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식히는 지도력을 보여줬다. 

물론, 쿠바 미사일 위기가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그 배후에 있는 국지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많은 인명이 사라져갔다.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공교롭게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나고 얼마 안 가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했다. 케네디는 1963년 지금도 그 배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흐루쇼프는 1964년 권력 투쟁에서 밀리며 권력을 내놓고 사실상 연금 생활을 하며 삶을 마감했다. 한때 전 세계의 중심에 자리했던 인물들의 쓸쓸한 최후였다.

케네디는 이후에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상위 순위를 유지하며 그 명성이 이어졌지만, 흐루쇼프는 그 존재가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소련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그 존재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흐루쇼프 이후 소련에서는 피의 숙청과 극단적인 권력투쟁이 완화되고 보다 유연한 사회가 될 수 있었다. 스탈린과 달리 국민들의 삶에 보다 관심을 가진 지도였다는 점과 우주개발을 이끌었다는 점등은 평가받을만하다. 이 점에서 흐루쇼프는 현대사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