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 달을 지나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러시아의 빠른 승리가 예상됐지만,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수도 키이우에서 항전을 지휘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단결해 이에 대응하면서 러시아가 주춤하는 모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애초 러시아의 상대가 안 된다는 평가였지만, 최근에는 러시아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물론, 첨단 무기가 압도적 공군 전력을 앞세운 러시아의 공세가 강력하다. 이에 우크라이나 영토 곳곳이 큰 피해를 입었고 폐허가 됐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전쟁의 여파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어렵게 빠져나오고 있는 세계 경제를 더 큰 불확실성과 위험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 전쟁을 멈출 의사가 없고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 전쟁의 한편에 평화 협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양측의 입장 차는 여전히 크고 전쟁의 종결은 쉽지 않다.
전쟁의 중요한 원인은 서유럽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집단방위기구 나토,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우크라이나 가입과 관련한 갈등이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의 나토의 확장에 반감을 보였다. 그들의 국경을 접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해서는 강한 반대를 했고 군사적 개입을 경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서유럽권으로 편입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위협에도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집권이 후 나토 가입과 친 서방 정책은 더 강화됐다. 이미 2014년 러시아가 그들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는 등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화되기도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탈 러시아는 계속됐다. 결국, 러시아는 무력으로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행보에 제공을 걸었고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영역 속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 러시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돈바스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 우크라이나와 차별화된 자치권을 행사하며 우크라이나 정부가 사실상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이들을 러시아는 꾸준히 지원했고 이들을 국가로 인정했다. 러시아는 이들 국가의 보호를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이유로 들었다. 그만큼 복잡한 문제가 전쟁 이면에 숨어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의도와 달리 과거 크림반도 강제병합 때와 달리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강력하고 끈질기다. 이 시점에서 왜 우크라이나가 러시와의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친서방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의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러시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소련의 역사와 우크라이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에서 러시아와 가장 우호적 관계에 있는 벨라루스까지 세 나라의 민족적 뿌리는 동슬라브족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보통 러시아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의 민족들을 슬라브족으로 통칭하기도 하지만, 슬라브족은 동, 서, 남 슬라브족으로 구분하다. 종교적으로 차이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중심인 동슬라브족은 정교회를 믿는다. 폴란드,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이나 지역의 서슬라브인들은 주로 가톨릭을 믿는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발칸반도 지역의 남슬라브들은 정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과거 이슬람 세력 지배의 영향으로 이슬람 신자들도 존재하다. 이런 차이는 각 슬라브인들의 문화적 차이를 가져오게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각 나라별로 민족들은 각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역시 우크라이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러시아와는 차별화를 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그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가 러시아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렵 최대의 곡장 지역으로 드넓은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넓은 농지가 있고 유럽 최대의 곡창지대로 이름나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하는 밀은 유럽 사람들의 주식은 빵의 원료로 유럽 밀 수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 공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넓은 곡창지대와 생산능력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의 독. 소 전쟁 당시 나치의 침략을 불러왔다. 우크라이나의 넓은 평원은 나치 독일과 소련군의 대규모 전차 부대가 대결하는 전장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독립된 나라가 형성된 건 800년대 들어와서부터로 추정한다. 이 지역은 과거 넓은 평원에서 대규모 방목이 이루어지는 유목민들의 세상이었다. 이후 지금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왕국이 들어섰고 그 영역은 지금의 벨라루스와 러시아 지역으로 확장했다. 키예프 루스로 불리는 이 왕국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인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동슬라브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왕국은 동로마 제국에서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동로마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며 크게 번성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로 무역의 중심이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지역으로 옮겨지면서 왕국의 쇠퇴기를 맞이했고 1200년대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그 지배권에 들어갔다. 몽골제국은 비옥한 토지가 있는 우크라이나 지역은 직접 통치했지만,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지역은 간접 통치를 했다. 이곳에서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시초가 된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피지배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후 몽골제국이 물러났지만, 우크라이나는 1400년대 유럽에서 강성했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특히, 지금의 폴란드와 국경을 접하는 서부지역이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그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동부에 그 세력권에 편입됐고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면서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그 지배는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건 이런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크라이나는 그 독자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는 당시 우크라이나는 독립 시도가 있었고 소련 사회주의 연방이 들어서면서 그 연방의 일원이 됐다. 즉,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자성을 소련은 인정한 셈이다.
이는 사회주의 소련을 이끈 지도자 레닌의 사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레닌은 민족의 자주성과 자결주의를 인정하는 사상가였다. 소련 연방에 포함된 국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지배, 피지배 관계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할 수 있었다. 레닌이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던 우리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한 것도 공산당 세력 확장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민족 자결주의라는 사상적 기반이 있었다. 이에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사회주의 소련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지도자 부틴이 우크라이나와의 관계에 있어 레닌을 비판하는 건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다. 레닌은 소련 연방을 결성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소련 연방에 포함된 국가들에게 민족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부여했다. 이는 지금 푸틴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러시아 영토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그들의 독립적 지위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과 레닌이 없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 시대 흐름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제를 유지한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한계가 중요한 원인이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소수의 귀족과 그들과 결탁한 자본가들이 국가의 부와 각종 이권,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 속에 사회적 불평등과 일반 국민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그들의 비참한 삶은 나아지게 하려 황제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려 했지만, 무력에 의해 제압되고 억눌릴 뿐이었다. 당연히 집권층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역사에 남을 요승이라 할 수 있는 라스푸틴이 신령한 능력을 가진 술사를 자처하며 황제와 밀착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국민의 삶과 불리된 전제 군주제의 폐단은 나날이 깊어졌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기존 정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의 분위기를 불타오르게 했다. 이런 러시아 국민들에게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사상은 일종의 불쏘시개가 됐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체계화된 레닌은 유력한 정치 지도자로 떠올랐다.
결국,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멸망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사회주의 러시아는 러시아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신분제를 폐지하고 사회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존 제정 러시아의 기득권 세력인 귀족과 자본가들은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서구 열강과 일본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과 반혁명 세력 간 치열한 내전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회주의 혁명 세력은 이 내전에서 승리했고 1922년 지금의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봉, 구 소련을 건국했다. 우크라이나는 이 과정에서 연방에 포함됐다. 레닌은 앞서 언급한 대로 민주의 독자성과 자결주의를 강조했다. 소련의 사회주의 연방은 민족의 국가들의 연합 성격이 강했다. 지역별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연방 체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는 각 나라별 민족들이 그의 민족의식을 유지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소련의 통치 시스템은 1924년 레닌 사후 소련의 정권을 장악한 스탈린에 의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스탈린의 집권은 우크라이나에는 큰 비극을 불러왔다.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의 반대파에 대한 가혹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는 등 철권통치를 펼쳤다. 그는 공산주의 일당 독재를 공고히 했고 소련 연방은 하나의 명령체계 속에 통제하고 국가를 운영했다.
스탈린은 집권 후 소련의 산업화와 공업국가로의 발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업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소련은 스탈린의 주도하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시스템 속 강력한 산업화를 진행했다. 콤비나트로 불리는 대단지 공업단지를 곳곳에 만들어 공업 생산력을 끌어올렸고 발전 시설과 교통 등 사회 인프라를 확충했다. 그 국가적 목표를 위해 다수의 희생이 뒤따랐다.
스탈린은 반대 세력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노동력을 착취했고 공업화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국민들의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을 증대토록 국가적으로 이를 강제했다. 또한, 농업생산의 상당 부분을 공업화를 위한 자금으로 활용했다. 소련의 농업생산물을 수출해 그 자금을 공업화를 위해 사용했다. 소련은 그 농업의 관리를 위해 집단농장 체제를 구축하고 농민들을 그 안에 편입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토지를 분배 받아 살고 있던 농민들을 졸지에 재산을 잃고 집단 농장의 구성원이 됐다.
농민의 생활수준 악화는 불가피했고 농민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다. 단적으로 농민들은 그들의 농사를 위해 키우던 가축들을 집단농장에 편입되기전 도축하면서 소련의 가축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변화는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 가장 큰 악재였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의 상당수가 수출되면서 실제 농민들은 빈곤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제한된 배급에 의존해야 했다. 1931년과 1932년에 걸쳐 발생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대기근, 홀로도모르 기간은 우크라이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기간 최소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주림에 아사하거나 병들어 사망했다.
극도의 기아 속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인육을 먹고 유통하는 일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굶주린 이들을 구제한 식량이 있었음에도 소련은 그 식량을 수출하며 공업화를 위한 자금으로 이용했다. 더군다나 소련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걱정해 이런 우크라이나의 비참한 상황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등 언론마저 통제하며 대외 구호 손길마저 미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극단적인 공업화 정책으로 소련은 세계 2위의 공업국가로 자리할 수 있었다. 엄청난 공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소련은 독. 소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 승리할 수 있었고 축적된 경제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냉전체제 속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이끄는 맹주가 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특히, 극심한 기아와 그에 따라 무고한 다수의 생명을 잃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소련에 대한 원한은 한층 더 쌓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구 소련 체제 속에서 발생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 드러난 소련 당국의 무능한 대응과 이로 인한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국민들의 피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1991년 구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독립국이 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인들 마음속에 수 소련을 사실상 계승한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크라이나 인구 중 70%가 넘게 우크라이나인이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고 그들만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우크라이나가 예로부터 러시아의 일부분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으로 탈 러시아 움직임은 근. 현대사의 비극에 그 원인이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 비극은 지나온 역사 속에 그 가능성을 항상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의지에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최악이다. 러시아의 침공은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지금도 그 피해는 진행형이다. 전쟁이 끝난다 해도 피해 복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굴복을 원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럴 의사가 없다. 유럽을 포함해 다수의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도움을 주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전장이 우크라이나인 건 변함이 없다. 이 전쟁을 러시아와 서방 세계의 대결도 보는 시각도 크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모두들 우크라이나의 비극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내고 슬퍼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으로 인한 득실을 계산하고 있다. 우리들 역시 전쟁에 따른 유가 폭등 등 물가인상, 주식 시장의 악영향, 경제적 문제가 더 걱정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오롯이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보다 현명한 외교를 했어야 했다는 식의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전쟁은 러시아의 침공에 의한 일이고 지금 그 침략군에 의해 무고한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고 그 전쟁을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력들의 유불리를 관점으로 이용하려 하는 건 절대적으로 배격해야 할 일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동안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상황 속 안보 위기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던 사례를 많이 봐 왔다. 이는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일상이 공포로 채워지는 순간순간 마음을 졸인 건 일반 국민들이었다. 세계 그 어느 곳 보다 강력한 군대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고 이런 이들 주변으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수많은 시사점을 가져다주고 있다. 가장 큰 교훈은 전쟁은 안된다는 점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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