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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진시황제의 진나라다. 그 진나라의 이름은 지금 중국을 부르는 영어 이름 차이나의 근원이기도 하다. 진시황제는 최초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게 했고 통일 왕조에 걸맞게 각 지역별로 달랐던 각종 제도와 도량형, 문자, 사회 시스템을 통일하며 중국을 하나의 문화권과 경제권, 행정권 속에  포함토록 했다.

진시황제의 무리한 토목공사와 법가 사상에 근거한 지나치게 가혹한 법의 통치에서 파생된 폭정으로 인해 진시황제에 대한 휴대의 평가는 부정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의 중국을 만드는 데 있어 그의 업적은 매우 크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 후 각 지역을 연중 순시하며 업무를 보고 쉬지 않았던 지독한 워크홀릭이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능력도 있었고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이었다. 진시황제는 영생을 꿈꾸며 국. 내외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는 불로초는 구하려 하는 등 노력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방 순행 도중 급사했다. 절대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진나라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앙 정부는 권력 암투가 벌어지며 흔들렸고 진나라에 복속당했던 춘추전국시대 각 국가들의 국민들이 다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어섰다. 오랜 세월 억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반란은 일종의 계급 투쟁의 성격을 보였다. 

진나라는 통제력을 잃었고 빠르게 붕괴됐다. 다시 혼란해진 중국에 두 영웅이 등장했다. 유망과 항우 두 영웅은 중국 대륙을 놓고 경쟁했다. 둘의 대결을 배경으로 초한지라는 소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즐기는 장기는 유망이 세웠던 한나라, 항우가 세웠던 초나라로 대결하도록 되어있다. 그 대결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 장기판

 



이 대결의 승자는 유방이었다. 유방은 한나라의 시조가 됐다. 한 나라는 400여 년간 지속됐고 중국 고대 제국으로 발전했다. 한나라는 중국 왕조 역사의 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건 진나라였지만, 중국인들 마음속에 최초의 제국은 한나라다. 중국 문화의 정체성은 이 한나라로부터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나라는 국가통합과 함께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대. 내외에서 그 세력을 넓혔고 중국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중국 대륙을 놓고 벌인 마지막 경쟁에서 승리한 유방이 있어 가능한 한나라의 영광이었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한나라 건국으로 이어진 유방과 항우 두 영웅의 대결을 중심으로 유방이 어떻게 항우를 이길 수 있었는지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방과 항우는 매우 대조적인 인물이다. 농민 출신의 유방은 세력을 키울 배경도 없었고 엄청난 무예 능력을 가진 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문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뛰어난 친화력과 처세술, 용인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량과 같은 모습의 유방은 바닥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가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시점에 나이는 이미 50살을 넘어선 이후였다. 유방은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항우는 천하는 흔드는 힘을 지난 무장이고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고사에는 역발산 기개세, 항우의 힘이 산을 뽑을만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만하다고 전한다. 항우는 진나라 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영웅들 중 으뜸이었다. 나이 또한 젊고 앞으로 앞날이 밝은 청년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두 인물의 초기 경쟁은 항우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유방과 항우는 모두 진나라에 복속당했던 초나라 출신으로 초나라의 부활을 목표로 한 반란에 참여하며 세력을 넓혔다. 그 방법은 달랐다. 유방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싸움보다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유력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며 자신의 기반을 더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 여성은 훗날 한나라의 정치를 뒤흔들었던 여태후가 된다.

하지만 항우는 포용과 관용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힘으로 반대파를 제압하고 그들의 세력을 억압했다. 힘에 근거한 공포정치를 했다. 항우의 강력한 힘과 세력에 많은 이들의 굴복했지만, 그 내면에는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과 힘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진시황의 길을 항우는 걸었다. 

초나라의 부활 과정에서 유방과 항우는 힘을 합쳤다. 물론, 그 연합의 주도권을 항우가 쥐고 있었다. 초나라 부활을 위한 반란 세력은 반란의 명분을 위해 과거 초나라 왕족 중 한 명을 초회왕으로 세웠다. 이후 초나라는 다시 영토를 회복하고 진나라와 맞섰다. 진나라는 중국 전역의 지배권을 잃었지만, 과거 진나라 영역에서는 그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사력 또한 막강했다. 다른 나라들과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진나라는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중국의 중심 지역이라 관중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최고 요충지로 여전히 중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진나라는 다시 힘을 회복했다. 유방과 항우 등이 힘을 합쳐 세력을 키워가는 초나라와의 대결을 필연적이었다. 두 나라의 대결은 진나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조나라를 초나라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초회왕은 조나라를 구원함과 동시에 진나라 공략을 유방과 항우에게 함께 명령했다. 항우는 먼저 조나라를 구원하는 전투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상관이 전투를 미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 유방은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먼저 향했다. 항우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격을 미루는 상관을 살해하고 전투를 지휘했다. 항우는 강을 등지고 상대에 맞서는 일명 배수의 진을 치고 진나라 군대와 맞섰다. 퇴로를 스스로 없애고 나선 전투에서 항우는 대승을 거뒀다. 

그사이 유망은 진나라 영토를 하나 둘 장악하며  함양으로 향했다. 유방은 직접 전투보다는 자신의 특기인 친화력을 바탕으로 유화책으로 진나라 제후들을 포섭했다. 또한, 그의 책사인 장량의 계책까지 더해지며 유방은 큰 손실 없이 함양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유방의 세력은 크게 커졌다.

결국, 유방은 진나라 왕의 항복을 얻어냈고 함양을 물론이고 최고 요충지인 관중 지방을 장악할 수 있었다. 유방은 점령군에게 일채의 약탈 행위를 금지하게 했고 진나라 백성들을 존중하도록 했다. 또한, 진나라의 가혹한 법과 형벌을 폐지하거나 완화하고 간소화했다. 진시황제 때부터 나라의 강한 억압 속에 있었던 진나라 백성들에게 유방은 일종의 구원자였다. 유방은 진나라의 민심을 얻었다. 이와 달리 항우는 자신에게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반란에 대한 우려로 모두 생매장하는 등 잔혹하게 참살하면서 진나라의 민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 당연히 진나라 백성들에게 항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진시황제 무덤 유적지

 


항우는 뒤늦게 함양에 도착했다. 그는 유방을 압박했다. 유방은 항우에 당장 대응할 힘이 없었다. 유방은 자신이 장악한 함양과 관중 지방을 항우에 내줘야 했다. 훗날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항우의 책사인 범증은 유망을 강하게 경계했다. 앞으로 그가 큰 위협이 될 것임을 그는 예상했다. 범증은 항우에게 강력히 유방의 제거를 주장했다. 항우는 연회를 이유로 유방을 자기 진영으로 불렀다. 유망과 그의 부하들은 위험을 사전에 감지했다.

유방은 항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낮추며 항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객의 위험에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나서 막았다. 항우는 잔혹한 폭군이었지만, 의사결정이 즉흥적이고 계산적이나 치밀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에 충성을 서약하는 유방을 제거하는데 그는 망설였다. 그 사이 유방은 항우 진영을 도망쳐 나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두 인물을 강하게 대비하는 장면이었다. 유방은 상황에 따라 이를 유연하게 대처하고 심지어 체면까지 버릴 수 있는 실리적인 인물이었다. 항우는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는 능했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통찰력과 정치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중국의 요충지를 장악한 항우는 그 지역을 기반으로 중국을 다시 한번 통일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우는 그 관중 지역을 버리고 초나라로 돌아가는 결정을 했다.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자신에서 항복한 진나라 왕과 백성들 상당수는 학살했다. 심지어 진시황제의 능에도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항우는 철저히 진나라를 파괴했다. 항우는 진나라 정벌의 공만을 가지고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큰 실수였다. 

초나라로 돌아간 항우는 자신을 초패왕으로 칭하며 중국을 중세 봉건적 시스템으로 통치했다. 그는 황제가 아닌 정복자로 자신을 규정했다. 각 지역의 제후국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일종의 영주로 삼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 제후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그가 옹립했던 초회왕을 시해하며 자신보다 높은 권위의 상징을 없앴다. 이는 각 지역 제후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항우는 그때마다 강력한 군대로 이를 제압했다. 전쟁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항우의 패권정치과 공포 정치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실제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 말기와 한나라 건국 사이의 기간 중국 인구의 죽거나 나라를 벗어나며서 급격한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 이는 중국의 국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혼란기 중국 변방에 있던 세력 중 일부가 인근 고조선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 유민의 리더였던 위만은 기존 고조선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위만조선을 세우기도 했다. 항우의 정치는 통합과 번영이 아닌 파괴와 지배의 정치였다. 당연히 민심은 항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항우가 위세를 떨치는 사이 유방은 변방은 한중에서 때를 기다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중지역에서 유방은 사실상 유배와 가까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방은 힘을 키웠고 마침내 관중 지방을 다시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맞섰다. 그는 항우에 적대적인 다수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항우를 공격했다. 항우는 초나라 팽성을 공격해 승리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이어진 반격에 팽성을 잃었고 초나라 지역의 성에 은거해 농성전으로 버터야 했다.

고립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유방은 과거 항우에 밀려 관중 지방을 쉽게 바친 그가 아니었다. 유방은 끈질기게 버티면서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변모했다. 그 사이 한나라에는 최고 장군 중 한 명이 한신이 등장했고 그는 초나라 인근의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했다. 애초에는 초나라가 한나라를 압박하는 모습의 전투는 어느 순간 한나라가 초나라를 포위하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유방은 항우와 그의 책사 범증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이간계를 사용해 둘 사이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이미 항우의 공포정치와 독단적인 성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범증은 자신을 의심하는 항우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항우로서는 중요한 브레인을 잃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한나라의 우세로 돌변했다. 항우는 그가 인질로 잡고 있었던 유방의 부친과 부인의 살해 협박을 하며 유방을 위협했지만, 유방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도리어 항우의 이러한 처사는 세간의 인심을 더 잃게 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은 긴 공방전을 이어갔고 그에 비례해 양측의 피해도 커졌다. 계속된 소모전에 두 나라를 전쟁을 멈추고 중국 땅을 양분하기로 합의했다. 물론, 그 누구도 이 휴전이 지속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먼저 공격에 나서는 쪽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한나라 유방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물러서는 초나라 군대에 대한 공격을 명했다. 유방의 과감한 결정은 양군의 균형을 일순간 무너뜨렸다. 초나라 군대는 한나라 군에 포위됐고 항우 역시 고립됐다. 천하는 뒤흔드는 영웅이었지만,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 항우도 이를 해결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한나라 군은 포위된 초나라 군대를 향해 구슬픈 초나라 노래를 듣도록 하는 등의 심리전으로 그들을 흔들었다.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는 포위 상황, 사면초가의 고사는 여기서 유래했다. 초나라와 항우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항우의 상황 속에 그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는 영화로도 나왔던 패왕별회다. 

 

 

 



항우는 그의 마지막 병사들과 함께 포위를 뚫어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자결하며 생을 마감했다. 천하 제일 영웅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로써 유방은 기원전 202년 한나라를 건국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에 오르게 했다.

즉위 후 유방은 위협이 될 수 있는 공신 세력을 과감히 숙청하며 왕권을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한신도 숙청되며 생을 마감했다. 사냥의 목적을 다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의 말이 한신의 죽음에서 유래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는 한편 유교적 통치 시스템을 만들었다. 계속된 전쟁 속에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고 400년 제국의 기틀을 완성했다. 

이렇게 유방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 끝은 매우 크고 위대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듯 올라선 유방은 마지막 승자가 됐고 역사의 승자로 남았다. 하지만 항우는 그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비운의 영웅이 되고 말았다. 두 영웅의 엇갈린 운명을 결정한 건 결국 소통의 리더십이었다.

유방은 자신의 장점인 높은 친화력과 소통 능력으로 민심을 얻었고 그 바탕 위에 세력을 모으고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렇게 뭉쳐진 세력을 시간이 갈수록 크고 단단해졌다. 항우는 적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고 힘으로만 상대했다. 당장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쌓은 세력은 모래 위에 새운 건물처럼 그 기반이 허술했다. 그가 더 포용력을 보이고 소통하는 리더였다면 마지막 승리의 주인공을 달라질 수도 있었다. 

유방과 항우의 대결은 역사의 주인공은 기록에 남는 영웅이나 위인들일지 몰라도 그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이름 없는 백성들, 국민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방은 그런 백성들의 힘이 있었고 항우는 없었다. 평민 출신의 유방은 백성을 잘 알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리더였다. 항우는 백성들을 지배의 대상으로만 봤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항우에 대해 보다 부정적으로 그려졌을지도 모르지만, 유망과 항우가 걸어온 길이나 과정 속에는 많은 시사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  두 영웅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도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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