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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국제 정세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가장 큰 긴장 속에 있는 지역은 중동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그 안에 자리한 팔레스타인과의 갈등과 유혈 충돌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국제 뉴스면을 채우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내전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피 흘리며 사라졌다.

피의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낳고 누군가 흘린 피를 또 다른 피로 씻는 참혹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극적 관계는 굴곡진 현대사, 그리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잉태됐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예루살렘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루살렘은 서구 기독교와 이스라엘의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가 성지로 여기고 있다. 이에 세 종교의 성지가 함께 존재한다. 유대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 바로 위에 모스크로 만들어진 이슬람 사원이 함께 한다. 이렇게  3개 종교의 성지인 만큼 예루살렘에는 이름에는 평화로운 도시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대사에서 예루살렘은 극심한 종교 간 민족 간 대립의 장소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러 민족과 종교가 공존을 하고는 있지만,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 가득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성서에서 등장하는 가나안을 그 시초로 할 정도로 매우 오래됐다. 가나안은 젓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유대민족의 지도자 아브라함이 유대민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서 지금의 영토는 종교의 성지이기도 하고 그들 역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나안은 척박한 자연의 땅이었다.

또한, 여러 이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유대인들이 쉽게 정착할 수 없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대거 이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은 상당한 박해를 당했고 지도자 모세를 중심으로 이집트를 탈출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스라엘 영토에 정착하지는 못했고 모세 이후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에 정착했다. 이는 성서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고난의 삶을 살았다. 가나안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왕국을 세우고 솔로몬 왕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왕국은 남북을 분단됐고 이 왕국들은 고대 왕국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며 유대인들의 피지배의 역사를 다시 시작했다. 페르시아가 중동의 패권을 장악했던 시기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유대왕국을 재건하기도 했지만, 페르시아의 몰락 이후 혼란기를 겪었고 이후에는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 유대인들은 강하게 로마에 저항하며 1, 2차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로마는 그때마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강하게 유대인들을 탄압했다. 예루살렘이 있던 그들의 성전은 파괴됐고 서쪽 벽에 그 흔적만 남아있다. 유대인들의 중요한 성지인 통곡의 벽이 바로 그곳이다. 로마는 이에 그치지 않고 예수살렘의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이후 오스만제국이 중동지역을 장악하면서 가나안, 지금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은 이슬람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 유대인들에게는 중세부터 이어진 긴 방랑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들의 땅을 잃은 유대인들은 서유럽과 러시아 등지로 흩어졌고 그곳에 정착했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극히 적대적이다. 유대인들을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국가적인 재난이나 재앙이 닥치면 유대인들이 그 원인이라는 식으로 탄압을 받았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권력층을 유대인들에게 대한 증오를 해결을 수단으로 삼았다. 다수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경제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고 일반적인 일을 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중세 기독교에서 천대 시 하는 금융업으로 한정됐다.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고리대금업자는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금융업을 통해 성공했고 부를 얻기도 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유대인들은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됐다. 역설적으로 일찍부터 금융업에 눈을 뜬 유대인들은 시대가 발전하면서 거대한 자본가로 성장하고 국제 경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이런 미래 일을 제쳐두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중세를 지나 근대로 접어들어서도 강하게 그들을 괴롭혔다. 다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1880년대부터 무려 40여 년간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 이는 가장 먼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에 대해 먼저 눈을 뜬 유럽 국가였던 프랑스에서 다르지 않았다.

1894년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억울한 간첩 사건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프랑스군에 장교였던 드레퓌스는 적국인 독일을 이롭게 했다는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하지만 그 증거는 근거가 부족했고 사실과 달랐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그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건의 진실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애국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한층 더 커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 장교의 간첩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집권 세력은 무죄를 강력히 주장하는 드레퓌스에게 공정한 재판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고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유죄의 증거는 조작됐고 심지어 진범이 나타났음에도 프랑스 정부는 이를 숨겼다. 

 

 


하지만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 등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진보적인 정치세력들이 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의 구명에 나섰다. 물론, 군부를 포함한 보수파들 심지어 가톨릭 교회마저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구명 움직임에 반대했다. 이들은 유대인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깊은 증오심을 이용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양 극단으로 강하게 대립하며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드레퓌스는 결국,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프랑스는 왕정복고에 대한 움직임을 차단하고 종교의 정치개입을 배격하는 등  더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서는 긍정적인 일이었지만, 이를 지켜본 유대인들은 더 큰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마저도 그들의 자리가 없다면 유럽에서 그들이 발붙이고 살 곳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 인식은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의 조상이 살던 곳,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하려는 유대 복고주의 운동인 시온주의 운동을 강하게 일어나게 했다. 1896년 언론인 헤르츨 주창한 시온주의는 억압받던 유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유대인들은 박해가 없는 그들의 땅에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기금을 조성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땅을 매입했다. 그곳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최대 도시이자 실질적 수도인 텔아비브는 유대인 정착촌이 그 시작이었다. 

이런 유대인들의 움직임은 그들의 절박한 마음의 결과였지만, 오스만제국 시대 이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당연히 양측의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중동 지역 땅을 노린 영국이 개입하면서 갈등의 골이 한층 더 깊어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군과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그 반대편에 섰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후반에서 압박하는 한편, 그들이 지배하는 영토에 대한 야심을 채우려 했다. 영국은 우선,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아랍 민족들과 손을 잡았다. 영국은 아랍 국가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아랍 민족들은 오스만 제국 후방에서 무장봉기했고 오스만제국을 압박했다. 영국은 또 한편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유대인 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영국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 이면에는 유대인 자본가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게 주 목적이었다. 

영국은 이제 그치지 않고 연합국이었던 프랑스와 중동지역의 땅을 분할하기로 밀약했다. 영국은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중동 땅을 놓고 3중의 계약을 한 셈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의 실질적인 시작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유대인과 아랍인들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중동지역을 프랑스 등과 함께 분할 통치했다. 당연히 양측에서 반발이 커졌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이 늘어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영역을 지속적을 침범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극대 달했다. 이는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936년 팔레스타인의 영국에 대한 반란으로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유대인들의 입국 금지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영국은 이를 수용했지만, 이번에는 유대인 강경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유대인 강경 시온주의 세력은 영국을 향해 테러를 감행했고 다수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 간 갈등은 유혈 충돌로 이어졌고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유대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고 유대인들은 어렵게 찾아온 유대인 국가 설립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같은 땅에서 두 민족은 공존보다는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워갔다. 이를 중재해야 할 영국은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중동에 영향력을 확대한 미국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미국은 자국 내 큰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의식해 유대인 국가의 국가 건설을 적극 지지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더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이 문제는 UN에서 논의됐다.

어떻게 보면 미국과 영국 두 강대국이 분쟁의 책임을 떠넘긴 격이었다. UN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영토 분할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고 이를 승인했다. 팔레스타인 영토의 분할이 국제적으로 승인되면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국가를 건국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인들을 그들의 살던 영토의 반 이상을 잃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UN의 결정은 사태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이에 자국 내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고려한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에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의 건국 직후 당시 이슬람의 맹주였던 이집트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인접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1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슬람 국가들로서의 그들 영역 내에 유대인 국가가 건국되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각 중동 국가들의 야심이 있었다. 이스라엘로서는 큰 위기였지만, 중동 국가들의 군대는 숫자는 많았지만,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했다.

반대로 이스라엘 군대는 그들의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민병대가 군대가 되긴 했지만, 상당한 실전 경험과 함께 잘 조직화된 군대였다. 중동전쟁은 4차까지 이어졌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더 확장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들의 영토를 더 확장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바다와 접한 가자 지역과 요르단 영향력 아래 있는 서안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동전쟁은 또 다른 방향으로 세계에 충격을 불러왔다. 4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슬람 세력들은 석유를 무기화하며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들에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1차 석유파동이었다. 이는 세계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원유 가격은 크게 치솟았고 원유 수입국들의 부담이 가중됐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동전쟁이 지속된다면 석유파동이 재현될 수 있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중동전쟁의 종식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중동전쟁의 가장 큰 당사자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협상을 시작했다. 1978년 12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켐프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를 반환하고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한편, 외교적 경제적 관계를 회복하는 걸 골자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동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보였다. 팔레스타인 문제도 협상의 가능성이 보였다. 

하지만 협상의 당사자인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강경 세력에 의해 암살되면서 평화 분위기에 악재가 됐다. 여기에 대표적인 중동의 친미 국가였던 이란이 이슬람 혁명을 겪으면서 반미 국가로 변신했고 그 이란이 반 이스라엘 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중동 평화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 팔레스타인은 무력 투쟁을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설립하고 이스라엘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의 대응은 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한 테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그 배후에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응징하고 보복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있는 레바논을 공격해 수도 베이루트를 초토화했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그곳에서 축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멈춤이 없었다. 그 양상은 군사조직이 아닌 민중봉기 양상으로 변모했다 일반 대중들이 함께 한 두 차례 민중봉기 인티파다는 대표적인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대 이스라엘 저항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경파 대 이스라엘 저항 단체인 하마스가 결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달 리 더 강력한 무장 투쟁을 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무장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했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왔다. 피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극심한 대립 속에서 평화를 위한 협상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한 걸프전 기간 이라크는 전쟁을 이슬람과 반 이슬람의 성전 양상으로 바꾸기 위해 이스라엘을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확전을 막기 위해 보복하지 않았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라크에 직접적인 보복을 했다면 걸프전 양상인 달라질 수 있었다. 이런 인내는 결국, 걸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한편으로는 힘의 우위로만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인식을 이스라엘 내에 가져왔을 수도 있다. 

걸프전을 기점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협상을 위해 마주 안았다. 1993년 마침내 양측 간 평화협정인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을 주도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지도자 라빈 총리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합법적인 영토를 제공하며 그 팔레스타인 지역 내 자치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자치 정부가 구성됐다. 완벽한 독립국가의 건설은 아니지만, 상호 공존을 위한 첫걸음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양측 강경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중요한 현안인 팔레스타인 지역 내 계속 증가하는 유대인 정착촌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법을 내놓지 않아 분쟁의 불씨를 남겼다. 실제 유대인 정착촌 문제는 지금도 양측 간 갈등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한계점과 함께 협상의 주역이었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강경파 세력에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내 강경파 무장 단체인 하마스가 더 힘을 얻으면서 평화협정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여기에 평화협정을 부인하는 이스라엘 강경 보수파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다시 팔레스타인의 힘에 의한 진압을 지속하고 있고 무차별적인 무력 사용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그럴 때마다 저 강하게 저항하며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

2000년 일어난 2차 인티파다 기간에는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자살 폭탄 테러를 일으킨 이들 중 상당수는 나이 어린 청년에서 여성들도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 군에 의해 가족들의 희생된 이들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폭탄 테러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사태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은 강경 보수파는 무력을 통한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고 금기시되는 예루살렘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는 등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극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스라엘 강경 보수파에게 팔레스타인인 이들은 공존의 대상이 아닌 박멸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이스라엘 정권의 상황은 인식은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해 거대한 장벽을 구축하며 봉쇄 정책을 노골화하기도 했고 그들의 경제 활동을 억압하는 등으로 고사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확장도 지속 중이다. 이에 더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 이스라엘 정책인 상황을 더 어렵게 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사실상 이스라엘 수도로 공인하면서 갈등을 더 커지게 했다. 그 한편에서는 친 미국 성향의 이슬람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을 주도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철저히 소외됐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스라엘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폐허가 되고 지속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무고한 생명의 희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양측 민간인 간 충돌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일부에서 평화를 위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강경파들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전쟁과도 같은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생존을 위해 저항을 멈출 수 없고 어린아이들까지 전사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들 역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테러와 무력 충돌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승자도 패자가 모두 불행한 피의 악순환이 팔레스타인에서 무한 반복 중이다. 

이렇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강대국들과 이슬람 여러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해법을 찾기도 힘들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 양보를 하기 어렵고 그런 목소리를 냈다가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사려져야 갈등이 종식될 수 있다는 비관적인 목소리도 있다. 국제사회 역시 지역민들의 비극보다는 자국의 이익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풀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계속되는 갈등 속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흘린 피 위에 또 다른 피가 흐리고 있다. 그 원통함은 100념 넘는 세월 동안 쌓이고 또 쌓였다. 어떤 이해관계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지만,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에는 사람이 빠져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방랑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속에 고통받아 왔었다. 지금 그들은 과거 그들과 같은 처지의 팔레스타인에게 가해자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수 십년 세월 팔레스타인을 힘으로 눌러왔지만, 정작 자국 국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이제는 그들도 공전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이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 사람에 눈을 돌려야 한다. 불행한 역사의 피해자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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