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성계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을 귀양 보내며 외척인 민씨 가문에 강력한 경고를 보낸 이방원은 왕권 강화를 위해 조금이라도 왕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인사들의 숙청을 지속했다. 수차례 양위 파동도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자신의 왕위를 단단히 한 이방원은 창업에서 수성으로 통치 방향은 전환했다. 이를 위해서는 후계구도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 했다. 이방원은 왕권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적장자 상속 원칙을 지키려 했다. 이를 위해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가 제왕의 면모를 갖추길 기대했다. 하지만 아들 양녕대군은 아버지 이방원의 기대와 달랐다.
이방원의 수성의 시대에 맞게 자신의 후계자는 무보다는 문을 숭상하고 학식과 교양을 갖춘 신하들의 모범이 되는 왕이 되길 원했다. 이를 위해 이방원은 양녕대군을 혹독하게 훈육하며 제왕 수업을 시켰다. 이런 이방원 뜻과 달리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궁궐 밖으로 나가 외부 인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고 음주와 관련한 구설수도 있다.
실제 실록에는 양녕대군의 수차례 기행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방원은 이런 세자에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은 그가 원하는 길로 가도록 세자에게 혹독한 훈육을 했지만, 장성한 세자는 엇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급기야 이방원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는 이방원이 그토록 혐오하는 왕에 대한 불충이었지만, 이방원은 세자를 벌하거나 할 수 없었다. 그도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신하들과 심지어 처가에도 냉철했던 그였지만, 자식에게는 냉철함을 지킬 수 없었다.
이방원은 점점 아버지 이성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의 야심과 권력욕을 알고 있었지만, 끝내 그를 정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이방원은 군사를 동원해 아버지를 제압하고 그를 권좌에서 밀어냈지만, 그 과정에서 이성계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먼저 칼을 뽑아들지 못했다. 뒤늦게 군사를 일으켰지만,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이방원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역부족이었다. 이방원은 끝내 자신을 먼저 해할 수 있음에도 아들을 기다렸던 그래서 아들에게 밀려난 권력자이자 아버지 이성계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했다. 이런 이방원을 이성계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듬어 주었다. 이성계는 생의 끝자락에서 아들 이방원과 화해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 대한 원망과 원한의 마음을 털어냈다. 그는 이방원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그 화해 이후 이성계는 얼마 안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인생 말년에 이성계는 경기도 양주에 자리한 사찰인 회암사 인근의 별궁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그와 관련해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무패의 장수이자 조선의 창업 군주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가족의 비극을 함께 하며 아들에게 패한 장수로서 비운의 군주로 기록됐다.
이렇게 창업의 시대를 이끌었던 인물이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방원은 더욱더 왕권 강화와 나라의 기강과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러면서도 정적이 될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에 대한 숙청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세자가 마음을 다잡고 충실히 제왕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세자 역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아버지 이방원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점점 차기 권력에 대한 야심과 함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자는 이를 위해 강력한 군주인 아버지 이방원의 신임을 얻어야 함을 느꼈다.
이에 세자는 중요한 정치 현안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보였다. 세자는 불충의 죄로 유배지에 있던 외숙부 민무구, 민무질의 참형 상소와 관련해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조선 조정의 큰 현안이었다. 이방원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한 처남들의 참형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극형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 문제를 통해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했다. 이에 조정의 대신들을 끊임없이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참형을 주장했다. 이에 세자가 동조했다.
세자의 이런 행동은 중전 민씨를 분노하게 했다. 중전 민씨는 두 남동생들의 극형을 피하고 싶었다. 이에 더는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민씨 가문 역시 최대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존하는 게 중요한 목적이었다. 중전 민씨는 아버지이자 이방원의 장인 민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 속에서도 슬픔을 감추며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민씨는 아들 세자에게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참형을 피할 수 있도록 의견을 내줄 것으로 부탁했다. 민씨는 이방원의 아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방원의 유일한 약점을 민씨는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세자가 자신의 뜻과 달리 외숙부들의 참형에 동조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는 힘이 없었다. 가문의 비극을 막아보려는 민씨의 노력은 비정한 정치 질서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세자는 이를 통해 이방원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차기 권력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하는 일이었다.
결국,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은 장인 민제의 병사, 두 처남의 사사 이후에도 민씨 가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또한, 대신들에 대해서도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공신들 사이에 충성 경쟁을 유도하며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최측근인 하륜의 비위를 관대히 처리하며 그의 충성을 더 유도하는 정치술을 발휘했다.
그렇게 조선의 정국은 이방원이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다만, 세자의 문제가 정국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한때 마음을 새롭게 하는 듯 보였던 세자는 차기 권력자로서의 입지가 다져지면서 다시 긴장을 풀었다. 그는 과거처럼 왕궁을 벗어나 음주, 가무에 빠져들었고 제왕 수업을 게을리했다. 세자는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에 빠져들었다.
이런 세자에게 충녕대군이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다. 충녕은 셋째 아들이었지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이방원의 형제 중 으뜸이었다. 그는 세자인 양녕대군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이에 충언하는 모습도 보였고 국정 현안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도 보였다. 이에 이방원은 점점 충녕대군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세자와 비교해 제왕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난 충녕은 점점 비교 대상이 됐고 세자 역시 충녕대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기 권력을 놓고 형제간의 갈등이 커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이 세자의 비행을 인지했다. 이방원은 세자에게 그의 차기 권력으로서의 입지가 불변한 것이 아니고 충녕대군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방원은 왕조의 수성을 위해 더 나은 후계자가 필요했고 충녕대군의 입지가 점점 커지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더군다나 세자는 그가 그토록 경계하고 탄압한 외척 민씨 가문과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방원은 세자가 강력하고 능력 있는 군주가 되지 못한다면 외척 세력이 득세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에 이방원은 후계자로서의 세자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아버지마저 힘으로 밀어내고 권좌에 오른 이방원이다. 이후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에게 왕위는 여전히 불안한 자리일 뿐이다. 특히, 자신의 다음 새대에 그 왕위에 굳건히 유지될 수 있을지에 그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후계자에 대한 마음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수성을 위한 고민은 다시 한번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오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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