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조선 역사에서 최악의 군주는 단연 연산군이 첫 손에 꼽힌다. 임진왜란의 비극을 초래하고 백성들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했고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선조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치욕이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의 패전과 함께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인조도 있지만, 연산군이 실정과 폭정에는 이르지 못한다. 연산군은 조선 초기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이룬 최 전성기의 정점에서 조선의 국정 운영 시스템을 무너뜨렸고 결국, 대신들의 반정으로 물러나면서 조선이 신권이 왕권을 앞서는 정치 흐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한 임금이었다. 그만큼 그의 각종 악행은 최악 그 이상이었다.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보기 드문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올랐다. 유교..
1919년 3월 1일, 그날은 온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 맞서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외친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한. 일 강제병합조약 체결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이후 공권력과 무력을 통해 우리 민족을 억누르는 무단통치로 조선을 통치했다. 무단통치 기간 일제는 헌병대로 대표되는 군을 배치하는 등 헌병경찰 제도를 시행했다. 아울로 중요 지역에 군대를 배치했다. 총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저항의지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여기에 더해 언론, 출판, 결사를 통제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또한, 교육에 있어서도 조선인들에게 민족주의, 고등 교육의 기회를 막았고 민족학교 설립도 불허했다.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일제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고 농업에 종사..
1945년 2월 16일, 한 젊은 시인이 타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윤동주,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저항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조사하면 그의 이름은 어김없이 상위권에 자리한다. 이런 윤동주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들은 자칫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작품집을 발표하지 못했고 그 원고 또한 꽁꽁 숨겨야 했다. 그 작품들이 빛을 본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광복이 찾아온 이후 1948년에 가서야 가능했다. 그의 삶을 살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지금은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 용..
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는 끊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상을 만들고 설파했다. 그중 각 나라의 권력자들에게 적극 채용된 사상은 유가사상, 유교였다. 유교는 '수기치인',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을 위정자들의 중요 덕목으로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유교는 학문을 넘어 중국 왕조들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시대 흐름에 따라 발전을 거듭했다. 중국의 왕조들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중국의 문물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속에서 문화, 예술, 정치 시스템, 학문도 포함됐다. 우리 역사에서도 유교는 삼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