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는 끊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가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사상을 만들고 설파했다. 그중 각 나라의 권력자들에게 적극 채용된 사상은 유가사상, 유교였다.
유교는 '수기치인',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을 위정자들의 중요 덕목으로 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유교는 학문을 넘어 중국 왕조들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시대 흐름에 따라 발전을 거듭했다. 중국의 왕조들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중국의 문물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속에서 문화, 예술, 정치 시스템, 학문도 포함됐다.
우리 역사에서도 유교는 삼국시대부터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 활용은 상류층의 학문과 정치 시스템 등 국가 운영과 관련한 부분에서 적용됐다. 통치 이념이긴 했지만, 보다 기능적 측면이 강했다. 오히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상과 가치관은 불교가 힘들 얻고 있었다. 이는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흐름에 변화가 생긴 건 고려 후기였다. 몽고 간섭기 고려에는 유교의 새로운 주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주자학, 성리학이 전파됐다. 주자학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학문이다. 성리학은 고려 후기 신흥 정치세력은 신진사대부들의 정치이념이 됐다.
유교사상을 근간으로 건국된 조선
성리학 사상을 기반으로 한 신진 사대부는 중국의 신흥 국가 명나라 사대를 기본 외교 정책으로 했다. 또한, 고려 후기 친원 세력인 권문세족들과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통해 고려 정치의 주도세력이 됐다. 이중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성계의 신흥 무장세력과 연합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했다.
조선의 건국은 유교가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 가치관으로서 자리하는 데 큰 전환점이 됐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시작은 유교적 이념에는 배치는 부분이 있었다. 유교는 인간의 기본 도리로 '의', '의리'를 주창하는데 그 기반이 되는 건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이런 충효사상은 왕위 권위를 높이고 위정자들의 통치에 있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고려 왕조에 대한 의리를 충성을 저버린 결과물이었다. 또한, 조선 초기 치열한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힘으로 제압하고 세자였던 이복동생과 정도전을 포함한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는 유교의 기본적 사상인 충효사상을 저버린 일이었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을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에 이방원은 유교적 통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찬탈한 이방원으로서는 이와 같은 일의 반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방지하고 왕조의 지속 번영을 위한 방법을 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방원은 그가 조선왕조 건국 과정에서 척살한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되살리고 한때 조선 건국의 동지였던 정도전을 격하했다. 그에게는 충효사상에 근거한 유교적 통치 시스템 확립이 절실했다.
하지만 유교의 주류를 이루는 성리학은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어 일반 백성들에는 매우 어려웠다. 이에 조선 왕조는 유교 교육을 위한 서적을 간행하고 이를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일상에서 지켜야 할 유교적 예법을 담은 주자가례의 정착을 위해 국가적 노력을 했다. 주자가례는 성인식인 관례, 혼인을 위한 혼례,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상례,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 예법을 담은 제례 등으로 구성된다. 이 관혼상제의 예는 지금도 우리 생활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유교사상 정착을 위해 건국 초부터 노력한 조선
이와 함께 주자가례에는 가정에서의 예법을 담은 통례가 있는데, 이 통례는 가부장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려 시대까지의 사회 분위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런 주자가례는 사대부 등 집권층부터 실천을 적극 유도했다. 하지만, 토속 신앙과 불교가 사회 전반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현실이었고 왕실에서도 불교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여전한 상황에서 유교의 정착은 정권의 바람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선은 유교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더 가속화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억제하는 한편, 세종 임금 때는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충효에서 모범적인 예를 담은 일종의 그림책인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보급했다. 이는 백성들이 보다 쉽게 유교사상을 접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사대부 가문부터 집안에 사당을 설치하고 제사를 강조하며서 이를 모범적인 유교 생활의 예로 삼았다. 각 집안에서 행해지는 제사는 고려 시대에도 시행되지 않았다. 신분을 막론하고 조선 초기에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제사 문화가 정착되는 데는 20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제사를 주관함에 있어 남. 여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유산의 상속 등에서도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조선 초기까지는 여성의 지위가 일정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교가 점점 사회 전반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유교에서 큰 비판을 받는 남. 여 차별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그 바탕에는 부계 중심의 혈통을 중시하는 종법제도가 있었다. 이에 제사의 주관은 남자 자식으로 한정됐고 여성들의 집안에서 권리도 제한됐다.
이는 부계 중심 사회는 결혼 문화도 변화하게 했다. 오랜 전통이었던 데릴사위제도가 사라졌다. 여성은 혼인 후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혼인한 여성에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이에 여성의 역할은 남편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강요받았고 자식을 생산하는 게 중요한 덕목이 됐다. 물론, 여성이 집안의 경제권을 관장하고 안주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재산 상속이 아들들에게 집중되고 가정의 중요한 행사인 제사 주관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그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남.녀차별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
이런 남녀 차별 구조의 고착화와 함께 제사 등 각종 예법도 점점 본래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사에 있어 그 형식을 중시함과 동시에 화려한 제사상의 중시됐다. 이에 제사는 점점 과시용으로 변질됐다. 일설에는 조선 후기 신분제가 흔들리고 돈으로 양반 가문의 족보를 산 이들이 늘어나면서 그런 모습이 늘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어찌 되었건 제사상의 상차림은 해당 가문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해마다 돌아오는 제사에 가문의 역량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사상은 앞서 언급한 주자가례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주자가례는 중국의 실정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주자가례를 만든 이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형식이 아닌 마음이라는 보편적 진리가 조선 후기 형식의 강화와 함께 예법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유교적 사상도 시대 흐름에 따라 점점 변화하고 있다. 상속에 있어 우리나라는 1950년까지 장자 우선 상속을 법으로 규정했다. 가부장적 유교 사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후 여권의 신장에 따라 여성의 상속 지분이 점점 증가했고 1990년대 들어 지금의 배우자 1.5, 자식들은 남. 여 구분 없이 균등 분할 상속하도록 법률이 개정됐다. 또한, 유류분 청구 제도를 통해 부모에 대한 봉양과 가정에 대한 기여도를 고려해 상속 지분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2008년에는 가부장적 부계사회의 상징이자 시대에 맞지 않는 전 근대적 제도로 비판받던 호주제가 폐지되기도 했다. 또한, 제사와 관련해서도 그 규모를 줄이고 실정에 맞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각종 겉치레를 없애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관혼상제의 전통이 적용되는 결혼식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최근 스몰 웨딩 등 결혼식의 형태가 다양해지는 건 긍정적 변화라 할 수 있다.
시대흐름 속 변화하고 있는 유교사상
이처럼 유교적 가치관은 여전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흐름 속에 그 변화 속도도 비례하고 있다.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유교적 사고와 가치관은 점점 구시대적 유물로 인식되고 있고 서구적 사고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유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인 '수기치인'은 시대가 변해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손색이 없다. 이 사상의 근원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 점점 소외되어 가는 인간들에게 유교의 사상은 중요한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사회 지도층들에게도 수기치인은 필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유교의 문제는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이를 집권층의 자신의 권력 구조를 공고히 하거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왜곡한 면도 분명히 있다. 지금 우리는 유교의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점에서 유교를 무조건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현대 사회에서 보다 건설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노력을 할 필요도 있다. 최근 일부 종갓집 등에서 매우 간소화한 제사 상차림을 보급하고 있는 건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남녀 차별적 사고와 제사 등의 형식주의는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명절에는 그 갈등의 골을 깊게 하는 게 현실이다. 명절에 여성이 일을 전담하고 남자들은 제사만 지내고 여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사라져야 할 구습이다.
앞으로 유교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모두를 행보하게 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 유교가 시대에 맞게 긍정적인 변화를 지속한다면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는 촉매제로 기능할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사진 : 픽사베이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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