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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6일, 한 젊은 시인이 타국의 차디찬 감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윤동주,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저항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조사하면 그의 이름은 어김없이 상위권에 자리한다. 

이런 윤동주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들은 자칫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 작품집을 발표하지 못했고 그 원고 또한 꽁꽁 숨겨야 했다. 그 작품들이 빛을 본건 그가 세상을 떠나고 광복이 찾아온 이후 1948년에 가서야 가능했다. 그의 삶을 살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지금은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라고도 하는 룽징시 내 명동촌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윤동주의 집안은 개신교를 믿는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농이었다. 명동촌은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개척한 북간도 지역의 대표적 한인촌이었다. 윤동주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중국 용정시 지도

 




중국내 대표적 한인 거주지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


북간도 지역은 대한제국시기까지 우리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던 곳이었다. 그만큼 지역에 한인들이 많았고 강한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9년,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와 청나라의 간도 협약으로 이 지역의 관할권은 청나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국민이었던 한일들은 중국 내 조선족으로 불리게 됐다. 

그렇게 중국의 영토로 속하게 됐지만, 간도 지역은 일제 강점이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였고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간도 지역은 독립운동을 위한 인적, 물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로 인해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난 봉오동, 청산리 전투 후 간도 참변 등 일제의 무자비한 학살로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간도 지역의 한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지켰다. 이런 지역의 분위기는 윤동주의 가치관 형성과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동촌에서 성장한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에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를 아는 지인들을 통해 항상 남을 배려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집안의 장남으로 큰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기도 했다. 명동촌 내 명동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그의 부친은 윤동주가 의사로 성공하길 기대했다. 

이런 부친의 바람과 달리 윤동주는 문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작품 창작을 했다. 특히, 그의 사촌이자 절친인 송몽규는 윤동주가 시인으로 길을 걷게 하는 데 있는 큰 자극제가 됐다. 1934년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송몽규가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됐다는 소식은 윤동주에게는 마음 한편에 부러움과 함께 창작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일이 됐다. 

윤동주는 청소년기 작품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조국과 민족의 현실, 그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는 현실에 대해 자각하고 비교적 풍족한 경제적 여건에서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큰 혼란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북간도에서 시인의 꿈을 키워가던 윤동주는 그의 미래 진로와 관련해 부친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의사로 성공하길 기대했던 부친과 문학가의 삶을 살아가려 했던 윤동주였기 때문이었다. 부자간의 갈등은 윤동주의 꿈을 존중한 조부의 설득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윤동주는 집안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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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삶에서 중요했던 연희전문학교 시절


1938년 윤동주는 고향 북간도를 떠나 지금의 서울, 경성 유학길에 올랐다. 윤동주는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그 길에는 절친이었던 송몽규도 함께 했다. 경성에서의 유학생활은 윤동주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성은 신문화가 빠르게 유입되고 유행에도 민감한 가장 서구화된 도시였다. 고향과 다른 풍경에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윤동주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그곳에서 또 다른 절친 강처중을 만났고 그를 따르는 후배 정병욱을 만났다. 이들은 윤동주의 삶에서 매우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이들과 윤동주는 현 시국을 그리고 문학을 논했다. 또한, 타향살이의 외로움도 덜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가로서 시인으로서 더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윤동주는 당대 최고 국어학자의 최현배의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창작에 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윤동주가 그의 작품에서 순우리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건 그 영향이 컸다. 이처럼 경성에서의 유학생활은 시인 윤동주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가 윤동주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 상황은 윤동주가 시인으로 창작에 매진할 수 없게 했다.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시작한 중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일제는 전시 총동원령과 함께 전시체제를 유지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더 억압됐다. 언론과 출판의 검열은 더 강화됐다.

 

 

지인들과 함께 한 사진




좌절된 우리말 작품집 발간


이에 더해 일제는 식민지 정책에 있어 내선일체 황국 신민화를 목표로 한 민족말살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치안유지법을 통해 더 강하게 이를 억압했고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쓰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나마 외국어로서 학교에서 교육됐던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국어인 한글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는 윤동주가 유학생활을 하던 연희전문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윤동주가 가장 감명 깊게 들었던 국어 강의가 폐지됐다. 윤동주는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그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우리말 시 창작을 할 수 없게 됐다. 

당시 시대상에 대한 그의 마음은 1941년 11월 20일 완성한 그의 작품 '서시'에서 드러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바람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직품에서 윤동주는 일제의 억압이 한층 더 거세지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 우리 민족과 조국의 고통,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괴감을 담았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시대에도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소명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는 윤동주가 우리말 시집을 발간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서시'는 그가 발간하려 했던 작품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이었다. 우리말 사용조차 금지된 시기 우리말 시집의 발간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윤동주는 그것을 알고도 이를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그가 존경하던 교수의 강력한 만류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를 아끼던 교수는 이로 이해 그의 제자가 큰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작품집 원고는 그의 지도 교수였던 이양하에게 1부, 윤동주 자신이 1부, 그의 절친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이 1부를 보관하게 됐다. 윤동주는 이 작품집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음을 기약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 이루어진 일본 유학


이런 좌절 속에서 윤동주는 문학가로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조국에서는 더 이상의 배움의 기회를 찾기 힘들었다. 그는 문학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그는 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필요했다. 그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배움의 의지를 그를 버릴 수 없었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그의 절친인 송몽규와 함께 창씨개명을 신청했다. 유학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에 앞서 1월 24일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를 통해 그의 복잡한 마음을 담았다.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한계와 비애, 일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음에 묻고 해야 했던 창씨개명과 일본 유학을 하는 그의 처지에 대한 비통함이 시에 담겼다. 

그렇게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도쿄의 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그가 쉽게 감당하기 힘들 현실과 함께 했다. 이미 전시 동원 체제 속에 있었던 일본의 대학 역시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는 대학 입학 직후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고 정규과목에 있었던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매우 억압된 분위기는 그가 문학가로서 자유롭게 사유하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없게 했다. 윤동주는 이런 현실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절친 송몽규가 머물던 교토의 대학으로 편입했다. 교토는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고 억압적인 분위기도 덜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절친 송몽규의 수시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이 윤동주에 큰 위안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교토에서 수시로 만나 타국살이의 어려움을 문학과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달랬고 서로에 위안이 됐다. 하지만 이는 윤동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이미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계되어 있었던 송몽규는 일제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 소위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절친한 인물들 역시 감시 대상이었고 윤동주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유학시절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수감된 윤동주 


1943년 7월 일제 경찰은 송몽규를 '재 경도(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과 관련해 체포했다. 그와 함께 그와 절친인 윤동주 역시 체포됐다. 당시 윤동주는 전시 체제가 심화되고 강제 징용 등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고향으로의 귀환을 하려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윤동주 등에게 적용된 법은 신 치안유지법이었다. 1925년 제정된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일왕의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목적이었다.

이 법은 사회주의자들을 겨냥한 법이었지만, 이후 체제 반대 인사들을 포함해 그 범위가 넓어졌다. 일제에 맞선 우리 독립운동가들 역시 이 법에 적용을 받았다. 치안유지법은 그 적용이 권력에 의해 쉽게 악용될 수 있었다. 또한, 그 자체로 매우 비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악법이었다. 

이 법은 1941년 그 범위를 훨씬 넓힌 신 치안유지법으로 개정되어 시행됐다. 전시 체제 속 일제는 이 법을 근거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더 악랄하게 탄압했다. 이 법은 일제 패망 후 폐지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의 기초가 됐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이 법에 근거 조선의 독립 등을 논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았다. 아울러 윤동주에게는 일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된 조선어를 사용해 시를 집필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유지 보전했다는 죄가 추가됐다. 

 

 

윤동주 작품집 초판본




비굴하지 않았던 법정 투쟁


이 상황에서 윤동주는 의연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최근 발견된 그의 재판 기록 등에는 윤동주가 조선의 독립과 그에 대한 열망 등을 거침없이 발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윤동주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이미지와 다른 모습이다. 윤동주의 재판 기록에는 그가'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라는 어록도 있다.

또한,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구체적인 운동방침을 논의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런 판결문의 내용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강압에 의한 자백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지만, 최근 그에 대한 연구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에 저항했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진정한 저항 시인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법정 투쟁이 아니라 해도 우리말과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던 시절 우리말 시를 집필하고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윤동주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 문학가들은 일제의 회유와 강압에 따라 그들에게 부역하는 친일파로 변절하거나 절필을 하는 등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윤동주는 그 두 가지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셈이다.

결국, 치안유지법에 따라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44년 3월 31일의 일이었다. 비록,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됐지만, 윤동주는 20대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고 수감 생활을 고초를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됐다. 그리고 광복을 6개월여 남겨둔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투옥 중이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형무소에서의 요절, 생체실험 의혹 


형무소 측은 그의 사인을 뇌일혈이라고 발표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우선, 20대 청년이 그런 병으로 급사했다는 점부터 수상했다. 또한,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은 친지는 형무소에서 젊은 죄수들이 한 방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침 함께 투옥 중이었던 절친 송몽규로부터 정체불명의 주사를 수시로 투약 받았다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린 송몽규 역시 윤동주 사후 1 달여 만에 그 형무소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이 정황에 따라 윤동주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의해 사망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 대부분이 사라져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여러 정황과 함께 최근 기밀 해제된 미국 내 문서를 통해 1948년 일제 전범들에 대한 재판 기록에 인근 규슈제국대학에서 대체 혈액연구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바닷물로 생리식염수를 대체하는 실험도 있었고 형무소 죄수들에게 생체 실험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종합하면 윤동주가 일제 생체 실험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이 힘이 실린다. 

이렇게 그가 소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끝내 맞이하지 못한 윤동주는 그 시신이 화장되어 그의 고향 용정으로 유해가 운구됐고 그곳에 묻혔다. 지금도 중국 용정에는 그의 생가와 묘비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다만, 그의 생가터는 중국 당국의 부실한 관리로 많은 부분이 훼손되는 등 안타까운 모습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20대 나이에 원통한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였지만, 그는 그대로 잊히지 않았다. 그의 지인들의 노력으로 그의 작품들은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우리말 시집으로 발간됐다. 1948년 1월 그의 유일한 작품집이자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이 마침내 세상에 그 모습을 보였다. 이 작품집에는 윤동주가 집필한 31편의 작품이 실렸다. 이 작품집의 발간은 매우 극적이었다. 

이 작품집에는 애처 그가 연희전문학교 시절 발간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우리말 시집 원고와 함께 그의 절친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유품에 포함된 그의 작품이 포함됐다. 앞서 그의 원고는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 후배 정병욱이 각각 1부씩을 보관했다. 이 중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의 원고는 소실됐다.

정병욱의 원고 역시 그가 강제 징용되면서 유실될 위기에 놓였지만, 정병욱은 징용되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전남 광양의 고향집에 그 원고를 맡겼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이니 꼭 지켜달라는 당부를 전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 원고는 집안 깊숙이 숨겨졌다. 마침내 광복이 찾아오고 정병욱은 극적으로 전쟁에서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윤동주의 원고 역시 무사했다. 그렇게 그의 중요한 원고가 지켜졌다. 

 

 

 




드라마같았던 그의 작품집 발간 


이와 함께 윤동주가 존경했던 당대 최고 시인 정지용과 신문사 기자였던 연희전문학교 시절 절친 강처중이 작품집 발간에 헌신적으로 나서며 일이 진척됐고,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윤동주의 작품집은 중국 용정에서 거주하던 유족들이 보관했던 그의 작품들이 더해지며 개정에 개정을 더했고 1976년 총 116편의 작품이 실리게 됐다. 

이후 윤동주의 생애와 작품은 전후 일본 최고 문학가에 의해 소개됐고 일본에서도 재조명됐다. 1990년에는 일본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윤동주의 시가 실리기도 했다. 비록, 윤동주가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요절했지만, 삶의 고뇌와 깊이 있는 사유를 담은 작품은 국적을 초월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윤동주의 시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시가 가치 있는 건 시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다는 점이고 정제된 언어로 일제 강점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는 점이다. 또한, 순수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우리말의 가치를 더 높이기도 했다. 윤동주는 펜이 총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 시인이었다.

앞으로 그의 작품과 함께 그의 삶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의 진면목이 보다 더 대중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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