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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주 현종은 재위 기간 신변의 위협을 수없이 겪는 등 정치적 위기의 연속이었다. 현종은 강조의 정변에 의해 즉위했고 얼마 안 가 거란의 대규모 침공에 의해 일어난 2차 고려 거란 전쟁이 있었다. 현종은 강력한 권력자에 이어 외침을 받으면서 자신의 왕권을 확립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기나긴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를 승자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왕권도 강화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강감찬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신하들의 도움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황제의 나라를 표방한 고려에서 모든 국가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는 왕이었다. 왕이 무능하고 권위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면 현종이 1009년부터 1031년까지 긴 세월 재위하며 업적을 쌓을 수는 없었다. 

현종의 재위 기간 많은 시건이 있었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사건은 김훈과 최질의 난이다. 최 고위급 무장이었던 두 인물은 고질적인 무신에 대한 차별 등에 불만을 품었고 1014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후 수개월간 고려 국정을 주도했다. 고려 후기 100여 년간 이어진 무신 정권 시대 이전 사실상 첫 번째 무신정권 시기였다. 그 기간이 짧았던 탓에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되지 못했지만, 고려 현종 시기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간이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이 사건은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고려 현종의 마지막 위기 


현종은 김훈과 최질의 난 초기 군권을 앞세운 반란군의 위세에 눌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지만,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종은 무신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그들의 편의대로 직제를 개편하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봤다. 드라마에서는 무신정권 뒤에 그들과 협력하고 그들을 조정하는 또 다른 세력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당시 무신들의 지식수준이 크게 높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정 운영 능력에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훈과 최질의 난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아울러 그들의 난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중앙군을 주축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고려의 주력군인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대와 교감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칫 고려 군부의 권력 투쟁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전개하고 심지어 압록강 넘어 전진기지를 건설한 거란군의 대규모 침략에 대한 대응을 어렵게 할 수 있었다. 현종으로서는 빠르게 반란을 진압하고 또 다른 군사 반란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군의 분열상이 장기화될 경우 거란군과 장기간 최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서북면 일대의 민심 이반 가능성도 컸다. 이는 왕조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일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거란의 친조 요청에 무신정권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게 위해 현종에게 이를 응하도록 강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는 현종이 당시 서경 지역의 관리였던 이자림과 함께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수립해 이를 실행하게 된다.

당시 현종은 거란과의 국지전이 지속 중인 서북면 일대 시찰을 핑계로 군부 실세들과 함께 서경으로 행차를 하고 그곳에서 큰 연회를 열어 반란군 지도부를 안심시키고 숨겨둔 병사들로 그들의 체포 처형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종은 그 자리에서 19명의 반란군 지도부를 처형했고 이후 신속한 사후 처리로 자신의 왕권을 더 단단히 하고 전쟁 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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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의 난에서 현종을 구한 이자림 그리고 왕가도


이런 현종의 반란군 진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서경 지역의 관리였던 이자림이었다. 그는 청주 지역의 호족 출신이었지만, 고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그는 서경 지역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문관이었음에도 북방 지역에서 무관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김훈과 최질의 난이 일어난 시점에 서경 지역을 관할하는 관리로 임명됐다. 이는 그가 서경 지역에서 오랜 관리 생활을 하면서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긴 시간 무관 관직을 역임하면서 북방지역의 무신들과도 신뢰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반란 세력들도 그의 서경 지역 고위직 관리 임명에 문제 제기를 안 했다는 점은 그가 관리로서 특별한 세력에 포함되지 않았고 일 처리를 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위치는 현종이 그와 공모해 서경에서 김훈과 최질을 포함해 무신 정권의 지도부를 일거에 척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결국, 서경 행차를 통해 반란을 진압한 현종은 이자림의 공을 크게 치하했고 그를 조정의 고위직에 등용하게 했다. 현종으로서는 강조의 정변,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당했던 지역 호족들과 절도사들의 신변 위협, 무신의 난 등을 겪으면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정치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현종이 공주지역 절도사였던 김은부를 중앙 정부에서 중용하고 그의 세 딸들을 왕후로 맞아들인 건 정치적 계산이 함께 할 결정이었다. 김은부는 구 신라계 호족으로 그와의 거듭된 혼인 관계는 고려 왕조의 힘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고 있었던 개경 이남 지역과 구 신라 지역 호족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활발하게 했다. 이 신라계 세력들은 훗날 고려의 최 전성기라 기간 정치의 주축이었고 문벌 귀족사회의 중심이 된다. 

 

 

 




고려 현종과 덕종 시기 권력의 중심


이런 신라계 세력들과 함께 이자림은 현종의 최 측근 인사로 중앙 정치의 또 다른 주역이 됐다. 이자림은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반란군 진압에 가장 일선에 있었다. 현종이 그에 대한 신뢰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자림은 가장 말란의 관리에서 왕의 최측근 인사가 됐다. 아울러 이자림은 그의 딸이 현종의 후궁이 되고 현종 이후 왕위에 오른 덕종에게도 그의 딸의 왕후가 되면서 고려 왕 2명의 장인이 되기도 했다. 

왕의 신임 가득한 최 측근 인사에 장인, 그리고 무신들과의 지지까지 받는 군권까지 가진 이자림은 고려 정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자림은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승리 이후 고려가 국력을 결집해 추진한 개경 일대를 둘러싼 성곽인 나성 축조의 책임자가 건설을 완공하게 된다. 이 공으로 이자림은 현종으로부터 왕 씨의 성을 하사받고 왕가도로 개명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왕가도는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왕가도를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대 거란 정책에 있어 강경노선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3차례 전면전을 하는 등 고려와 거란은 수십 년 세월 전쟁 상태에 있었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하지만 3차 고려 거란 전쟁 후 양국은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교류를 하게 된다. 오랜 전쟁으로 양국 모두 상당한 피해와 국력 소모가 있었던 상황에서 실리를 택한 결과였다. 대신 고려는 거란의 형식상 책봉을 받으면서 자주성을 유지하며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그 입지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양국의 긴장관계가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고려 거란 전쟁 기간 거란은 고려 보주 지역에 성곽을 쌓고 전진 기지를 구축했고 전쟁 이후에도 그 지배권을 놓지 않았다. 이 보주성의 문제는 이후에도 고려와 거란 사이 영토 분쟁을 지속하게 했다. 

 

 

 




대 거란 강경론의 중심 왕가도 


왕가도는 이와 관련해 거란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강경론을 지속 주장했다. 이에 고려는 보주성 탈환을 위한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강경책은 현종 사후 집권한 덕종 시기 더 강하게 이어졌다. 덕종이 16살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현종과 덕종의 장인이기도 한 왕가도는 고려의 국정의 중심이 됐다. 대 거란 강경책이 한층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덕종 시기 고려는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했고 거란에 보주성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 거란의 성종 사후 지배층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고 내전 상황까지 발생하자 보주성 탈환을 위한 군사행동을 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거란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보다 적극적인 북진 정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를 위해 고려는 거란의 새로운 왕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 하면 사실상 국교를 단절하는 강경노선을 한층 강화했다. 또한, 거란의 내분 과정에서 발생한 다수의 거란 지역 귀순자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는 자칫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었지만, 덕종은 거란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왕가도가 있었다. 왕가도는 오랜 세월 국경 지역에서 장군으로 활약했고 이런 경력은 거란에 대한 강경 노선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국정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에 대한 강. 온 양면책이 대립하고 있었다.

거란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미 오랜 세월 전쟁을 치르면서 고려의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지속적인 전쟁은 무리라는 주장을 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고려 영토 내 구축한 전진기지를 유지하고 있고 언제든 고려를 재침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군사적 대비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거란이 고려 거란 전쟁의 실패 이후 점점 국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은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만약, 강경론자들의 주장대로 고려가 북진에 적극 나섰다면 고려 거란의 관계가 급변할 수도 있었다. 

 

 

 




왕가도와 덕종의 죽음, 급변한 고려의 대외 정책


하지만 고려의 강경론은 1034년 크게 다시 급변한다. 고려 조정의 실세였던 왕가도가 그해 세상을 떠났고 대 거란 강경론을 뒷받침했던 덕종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는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덕종이 어려서부터 병약했다고 하지만, 아직 20살도 안된 청년이었고 왕위에 오른 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업적을 쌓아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덕종은 그의 든든한 후견인이지 조력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왕가도의 죽임 이후 세상을 떠났다.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용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고려는 덕종 시기 대 거란 강경책을 거두고 거란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고 양국의 현안이었던 보주성 문제도 상호 협의로 절충점을 찾았다. 한편으로 고려는 덕종 때 시작했던 천리장성 축조를 지속하며 완성에 이르기도 했다. 고려는 온건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전쟁대비를 지속했다.

하지만, 대 거란 외교에 있어 대전환이 이루어진 건 분명했다. 이는 온건파가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점부터 고려 왕조는 현종과 김은부의 딸들 사이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김은부를 뿌리로 하는 신라계 세력들의 문벌 귀족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외교에서 온건론을 펼쳤다.

대신 왕가도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은 그 힘을 잃었다.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권력  투쟁의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왕가도를 중심으로 한 대 거란 강경파는 고려 조정의 중심에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왕가도의 등장과 퇴장은 고려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왕가도, 이자림이라는 인물을 분량에 상관없이 보다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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