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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역사에서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종교다. 어느 종교나 사랑과 평화, 인류애를 말하지만, 그 종교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를 과거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도 우리는 계속 보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전쟁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그리고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이다. 

이 중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은 계속된 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와 얽힌 매우 복잡한 전쟁이다. 또한,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이스라엘과 이슬람 무장 단체의 전쟁이라는 점에서도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쟁과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인 가자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무장 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한 전쟁은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역에 대한 전면 공격으로 치열한 시가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마스는 다수의 이스라엘 외국인 인질을 잡고 있고 오랜 세월 구축한 지하터널 등을 기반으로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맞서고 있다.

 

 




하마스의 전격 공격으로 시작된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


이 전쟁은 한때 인질 석방을 위해 휴전을 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이 하마스 섬멸을 위한 가자 지구 내 작전을 지속하면서 종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미 다수의 민간인들의 사망했고 가자 지구 내 팔레스타인들 다수가 큰 고통 속에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장 적대적 관계를 유지 중인 이란이 지원하는 이슬람 무장 단체들의 개입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고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세 속에 다수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면서 인근 이슬람 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자칫, 과거 중동 전쟁처럼 가자지구에서의 전쟁이 아닌 국제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이는 중요한 에너지 자원인 석유의 생산지인 중동의 군사적 위기를 고조시키고 국제 경제에게도 결정적 타격을 발생하게 할 수도 있다. 이에 미국을 포함한 다수 국가들이 종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오랜 악연과 적개심은 종전을 이루는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주체인 강경파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마스는 처음부터 무장 단체가 아니었다. 그들의 원조는 1920년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체는 영국의 내정간섭과 이권 침탈에 시달리던 이집트의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됐다. 1928년 교사 등 소수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무슬림 형제단은 외세 배척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 세력을 확대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기본으로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를 지향했다.

 

 




하마스의 뿌리 무슬림 형제단


이런 이슬람 근본주의는 지금도 많은 이슬람 국가들의 국가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무슬림 형제단은 서구 세력과 함께 서구화로 대표되는 세속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이 주장은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고 1930년대 후반에 가면 수십만 명의 전국 단위 조직이 됐다. 당시 무슬림 형제단은 애국계몽 운동에 중점을 둔 단체였다. 

이 단체는 이후 이집트를 넘어 중동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대했고 국제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얻는 단체가 됐다.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 확대는 이집트의 권력자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이에 1948년 왕정국가였던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불법 단체로 규정됐고 정부의 탄압이 본격화됐다. 다수의 지도부 인사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무슬림 형제단은 정부 요인 암살 등으로 대응하며 정부와의 관계는 더 악화됐다. 

결정적으로 1949년 무슬림 형제단의 창시자인 하산 알반나가 암살당해 사망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장단체화가 가속화됐다. 이슬람권 전역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무장단체화에는 이스라엘의 건국도 큰 영향이 있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었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이슬람 세력들의 지원을 얻고 동시에 유대인 자본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슬람 국가의 건국과 유대인 국가 건국 지원을 함께 약속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에 동시에 두 국가가 건국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당시 그 지역의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의 평화적 공존을 깨뜨렸고 유혈 충돌 사태로 이어졌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에 영국은 중재를 포기했고 관련 사안을 유엔으로 넘기며 그 책임을 회피했다. 

이 안건을 논의한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영토 분할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영역이 축소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환경은 미국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 자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배려한 결정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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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 전쟁


이런 결정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은 1948년 5월 유대인들의 나라인 이스라엘 건국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지역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인근 이슬람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권 욕심도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건국 후 바로 인근 이슬람 국가들과의 무력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계속되는 중동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의 계속된 승리였다. 이스라엘은 중동전쟁의 거듭된 승리로 그 영토를 넓혔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영역은 점점 축소됐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지금의 요르단 국경의 서안지구와 최근 전쟁이 발발한 이집트 국경의 가자 지구로 그들의 생활권이 크게 축소됐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과 그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미국 등 서구 국가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분노를 불러왔다. 이는 중동 전쟁의 장기화로 연결됐다. 마침 중동 국가들이 중요 자원인 석유 생산에 대한 국가적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중동 전쟁의 양상도 변모했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했고 이는 1, 2차 오일 쇼크로 전 세계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우리나라 역시 경제적 충격이 엄청났다. 

이와 함께 1970년대 후반 4차 중동 전쟁에서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면서 이스라엘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런 중동 전쟁의 장기화는 세계 경제에 큰 악재로 작용했다.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미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미국은 중동전쟁의 종식이 필요했다. 

미국은 전쟁의 주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종전 협상을 중재했고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통해 중동전쟁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중동전쟁 중 점령했던 이집트 영토를 반환하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또한, 지금의 가지지구와 서안지구에 자치 허용의 내용이 담겼다. 이 협정으로 이집트의 대통령 사다트와 이스라엘 총리 베긴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평화로 연결되지 못한 평화협상


이 협정으로 오랜 앙숙이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적 관계가 만들어졌지만, 또 다른 전쟁 당사자인 시리아 영토에 관련한 내용이 빠졌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고대하던 독립국가 건설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협정은 30여 년간 이어진 중동전쟁을 끝내긴 했지만, 중동지역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슬람 지역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이 협정을 주도했던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친 서방 정책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기념식장에서 암살되어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완의 평화는 중동지역을 언제든 폭발한 화약고로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해결되지 못한 팔레스타인 문제가 자리하게 됐다. 이런 상황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주장이 큰 호응을 얻게 하는 요인이 됐다. 무슬림 형제단은 1980년대 그들의 근거지인 이집트에서 정치 세력으로 인정받으며 제도권 정치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친 서방 정책을 펼치는 무바라크 정권과는 그 이념이나 정치적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했고 무슬림 형제단의 다수는 국외로 탈출해 활동했다.

그리고 그 세력 중 과격 무장단체인 하마스로 변화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대 이스라엘 강경노선을 주창했다. 하마스는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의 대 이스라엘 민중봉기인 인티파다 기간 적극 참여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정책과 지속적 탄압과 억압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무력 대응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을 한층 더 심화했다. 이스라엘 역시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 발생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고조되는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시 국제 사회의 중재로 이어졌다. 미국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어진 인티파다가 종료되는 시점에 팔레스타인의 최대 결사 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와 이스라엘의 평화 협상을 이끌었다.

이 협상을 통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과 유혈 충돌의 역사를 끝낼 해결책으로 2국가 체제를 그 대안으로 했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 사는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들어섰다.

이 합의를 통해 협상의 주역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총리 라빈, 외부장관이었던 페레즈는 그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오슬로 협정은 1995년 9월에는 더 진전된 내용의 2차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공존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했다. 

하지만 이 합의의 주역인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극우 유대 시오니즘 세력에 암살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극우 정치세력이 집권하면서 그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 합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중요 원인이었던 서안지구 내 팔레스타인 영토에 유대인 정착촌 확대 문제와 관련하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서 갈등의 불씨는 남겨두고 말았다.

이후 극우 정권이 집권한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는 계속 진행됐고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발을 불러와왔다. 이와 함께 온건 노선으로 선회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최대 정파 파타와 대립하는 강경파 무장단체인 하마스에 이에 반대하고 무장 투쟁을 강화하면서 어렵게 열었던 평화로의 길이 점점 막하기 시작했다.

 

 

 




강경 무장 단체에서 정치 단체를 더한 하마스


이후 이스라엘에서의 유혈 충돌의 양상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대결로 변모했다. 이스라엘은 힘으로 하마스를 제압하려 했고 하마스는 게릴라전과 함께 자살 폭탄 테러로 대응했다. 양측의 대결은 2000년대 들어 더 격화됐다. 하마스는 테러 외에 로켓포 등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지도부를 타격해 조직의 와해시키려 했다. 이런 강대 강의 대결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측 모두 강경파 정권이 정치 주도권을 잡는 원인이 됐다. 

하마스는 무장단체를 넘어 2005년 정치 세력화했고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최대 정파인 파타의 무능과 부패,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 강경책에 대한 미온적 대응으로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이는 파타와 하마스 사이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연결됐다.

그리고 그 한편에서 파타를 견제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비밀리에 하마스를 지원하면서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내 입지가 더 단단해졌다. 이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에 반하는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한 또 다른 세력을 지원하는 이른바 이스라엘의 전략이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강경파 하마스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런 역학관계 속에 하마스와 파타의 대립은 팔레스타인 내전으로 발전했다. 결국,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얻었고 가자 지구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에 팔레스타인인 파타가 정권을 잡은 서안지구와 하마스가 정권을 잡은 가자 지구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에 이스라엘과 서구 국가들은 강경파 무장세력 하마스가 정권을 잡은 가자 지구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이스라엘은 더 나아가 2006년부터 가지지구와 이스라엘을 분리하는 가자 지구 봉쇄정책에 따라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을 쌓고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범위를 가자 지구로 한정했다.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은 세종시 면적의 좁은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생활하게 됐다. 이제 가자 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거주 지역이 됐다.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통제 속에 외부로의 이동과 경제 활동이 제약됐다. 많은 이들이 실업자 처지에 놓였고 빈곤한 상황에 몰렸다. 각종 사회 인프라도 열악한 상황이고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생계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하층 노동자로서 얻는 수익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철저한 통제 속에 이스라엘 검문을 통과해야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인권침해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이에 가자 지구는 거대한 수용소가 됐다. 이는 마치 과거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게토라 불리는 별도 거주지로 몰아넣고 관리하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과거 그들 조상들의 고통을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가해자로 재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봉쇄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육상의 장벽은 한층 더 견고해지고 첨단화됐고 심지어 해상에서도 장벽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인들의 해상활동마저 제한했다. 이런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은 하마스의  가지지구 내 입지를 강화하고 이는 무장 투쟁의 원동력이 됐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지지하는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긴장 상태는 하마스의 지속적인 대 이스라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에 따른 하마스의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 속에 계속되는 민간인들의 희생을 불러왔다. 피의 보복이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급기야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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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 


2023년 10월 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무력화하는 대대적인 로켓포 공격과 장벽을 넘어서 이스라엘 영토에 다수의 하마스 대원들을 침투시키는 기습 공격을 단행했다. 이 공격으로 천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살해되고 다수가 인질이 되어 가자 지구로 끌려갔다. 이런 하마스의 전면 공세는 이미 주변국들의 우려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위협을 과소평가했고 이는 초기 대응을 어렵게 했다. 

하마스는 최근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국가들의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슬람 세계에서의 입지 하락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마스의 전면 공격은 그들의 국. 내외적 존재감을 다시 부각하려는 의도가 함께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유대인 정착촌 확대와 그 이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 고사 정책에 대한 반발이 자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에서 기존 팔레스타인 거주지에서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속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이 강제 퇴거당하는 일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반발에 이스라엘은 폭력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희생되고 있다. 

이는 국제법적으로 근거가 없는 일이고 과거 2국가 체제를 지향하는 과거 오슬로 협의에도 배치되는 일이지만, 극우 이스라엘 정권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에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의 인구는 수십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사회의 비난도 커지고 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반감은 극에 달해 있다. 이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있어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이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커져가는 갈등에 이슬람교도들이 경악할 사건도 있었다. 예수살렘에 있는 이슬람 성지 사원에 이스라엘 경찰이 진입해 이슬람교도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긴장 가득한 곳이지만, 최소한 이슬람교와 기독교, 유대교 성지가 공존하는 장소만큼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스라엘에 의해 이 불문율이 깨졌고 이슬람 성지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건 이슬람 세계 전체에 반 이스라엘 정서를 더 확산시키는 일이었다. 이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면서 성전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종전을 막는 내. 외부 환경


이와 함께 이스라엘 내부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도 이번 전쟁과 관련이 있다. 극우 정치세력과 연합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네탄야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스라엘 법원이 제동을 걸면서 네탄야후는 사법개혁이라는 법원의 기능을 축소하고 독재의 길로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많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등 반발하는 상황에서 네탄야후 정권은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이 커져가고 있었다.

하마스는 이런 내적, 외적 변수를 모두 고려해 공격의 시기를 결정했다.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의 강한 반격을 불러왔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내 대규모 육군 병력을 진입시키고 무차별 폭격으로 하마스의 본거지 가지지구 북부를 초토화시켰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다수의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키고 가자 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을 더 깊은 비극 속으로 몰아넣었다. 가자 지구 내 인도적 지원마저 막힌 상황에서 가자 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은 매일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질 석방과 관련하 협상 등으로 잠시 휴전이 있었지만, 전쟁은 재개됐고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에 하마스 세력을 완전히 섬멸하려 하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에 맞서 하마스 역시 다수의 인질들을 석방하지 않으면서 항전을 지속하고 있다. 하마스는 오랜 세월 가자 지구 내 구축한 길고 복잡한 땅굴을 바탕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이에 맞서 첨단 무기를 총동원하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매우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의 참전이 이루어진다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닌 중동전쟁으로 확산할 수 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근거한 무장단체로 군사력이 하마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아직은 직접적인 참전에 이르고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북쪽 공격에 자리한 헤즈볼라가 참전한다면 이란의 참전 가능성까지 커질 수 있다. 

 

 

 




계속되는 전쟁, 커져가는 민간인들의 피해 


이런 확전을 막기 위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휴전을 위한 중재를 하고 있지만, 협상의 진전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국내 정치에서 국민적 반대가 큰 이스라엘 총리 네탄야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대 팔레스타인 강경책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사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마스 이번 전쟁을 팔레스타인인 물론이고 이슬람에서의 입지를 다시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어 쉽게 휴전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장기화는 결국, 무고한 이들의 피해로 연결되고 있다. 이미 철저하게 파괴된 가자 지구는 사회 인프라와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그나마 지역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국제 구호품조차 공급되지 못하면서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전쟁이 지속한다면 상당수 팔레스타인인들은 기아와 질병 등 전쟁 외적 요인으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하루빨리 종전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하마스나 이스라엘 지도부 모두 그럴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 모두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교리에 근거하는 근본주의를 내세운다.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는 분명, 생명에 대한 존중과 평화를 가르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주의 세력들이 맞서는 이 전쟁은 매우 파괴적으로 참혹하기만 하다.

어느 종교도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고 있는 근본주의 시오니즘 주의자들 모두 종교의 본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루빨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길 바란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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