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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전쟁은 그 참혹함과 파괴적인 성격으로 인해 모두가 두려워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자들의 욕심으로 인해 발생하고 많은 피해를 감당하곤 했다. 그때마다 인류는 전쟁 재발을 다짐하지만, 그 다짐은 공허한 외침이 되곤 했다. 

수많은 전쟁의 역사 중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00여 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현재 이스라엘에 속해있지만, 당시는 이슬람 세력의 영역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둘러싼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 전쟁을 살피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중요한 성지였다. 기독교에서 예루살렘은 예수가 박해를 받아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이른 후 부활 한 장소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여기지는 장소에는 교회가 세워져 있고 그곳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생전에 꼭 찾아야 할 성지로 인식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예루살렘은 그 창시자가 신의 계시를 받은 장소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곳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고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대교에서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공교롭게도 그 성지는 모두 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고 세 종교인들이 함께 각자의 성지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종교적 갈등의 상징 예루살렘


이는 예루살렘을 평화로운 마을, 신성한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게 했다. 이 이름대로라면 예수 살람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 돼야 하지만, 현재 예루살렘의 극한의 대립과 갈등의 장소이고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는 위험한 공간이 됐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에도 예루살렘의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이슬람 지역에서 이슬람 제국, 셀주크 트루크가 들어서고 그 세력이 확대하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예루살렘을 포함한 동 지중해 일대는 셀주크 트루크가 장악하게 됐고 동방교회의 마지막 버팀목이라 할 수 있고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도 강한 압박을 받고 그 세력이 축소됐다. 이런 대외 상황 변화는 유럽인들에게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셀주크튀르크는 예루살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를 금지시켰다.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피부에 와닿는 일이었다. 여기에 셀주크튀르크의 공세에 시달리던 동로마 제국에서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상황 변화가 발생했다.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서유럽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차단하는 명분에 더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추가하며 군사행동을 전 유럽에 촉구했다. 이 이면에는 국왕들의 권력이 강력해지면서 현세에서 권력과 지위가 점점 추락하는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또한, 동. 서 교회가 분열되면서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위까지 쇠락해지는 상황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르바노 2세




성지 회복 그 이면에 있었던 교황의 정치적 계산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 참여를 촉구했고 유럽 전역에서 지지를 이끌어냈다. 교황의 권위가 이전 같지 않다고 해고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는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였고 그 기독교의 성지가 이교도들에 장악되고 찾을 수 없는 상황은 유럽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전에는 유럽 각국의 국왕과 영주, 일반 시민들까지 적극 참여했고 이는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교황은 성전에 참여한 이들에게 죄에 대한 면책권을 부여하고 사후 구원을 약속하며 더 많은 이들의 참전을 이끌었다. 이 시기 유럽 각지의 성직자들도 성전에 대한 민중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 이에 1차 십자군 전쟁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사들 중심이 아닌 일반 민중들이 먼저 성전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민중 십자군이라 불리는 평민들 중심의 십자군은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도 아니었고 남. 여 노소를 불문하고 종교적 열정에 따라 모인 이들이었다. 당연히 그 조직은 허술했고 국가적 지원도 없어 무장이나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의 목적지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조차 거의 없었다. 민중 십자군은 막연한 기대감과 열정만으로 먼 원정에 나섰고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다수의 희생자만 남긴 채 와해되고 말았다. 

민중 십자군의 실패 이후 영주와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규 십자군이 조직됐다. 1096년부터 1099년까지 이어진 1차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다. 1차 십자군은 중무장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진격했고 동로마 제국 영토로 향했다.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고대하던 원군이었지만, 그들의 군세를 보고 한편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또한, 전후 처리와 관련해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도 해야 했다.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군수 지원과 함께 획득한 영토에 대한 처리 문제에 합의하고 전투에 나섰다. 

하지만 양측의 신뢰는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다. 동 지중해 지역의 거점인 니케아 공방전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과의 밀약을 통해 니케아를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의 양상은 성지 회복 이전에 영토와 이권 쟁탈전 양상으로 변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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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학살과 약탈로 이어진 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십자군은 기독교의 또 다른 성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고 이는 이슬람인들의 큰 반감을 불러왔다. 십자군은 이슬람의 반격에 성에 갇히는 처지가 됐다. 동로마 제국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십자군은 고립되어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에서 지금도 예수와 성물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십자가 못 박힌 예수를 찌른 창이라 불렸던 롱기루스의 창이 발견되면서 십자군들의 사기가 크게 치솟았다.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인식은 십자군들이 심기일전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십자군은 성을 박차고 나와 반격을 했고 전투에서 거듭 승리하며 동 지중해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1099년 십자군은 고대하던 성지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전리품을 챙겼다.

이에 십자군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성지 회복 전쟁의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 이후 예루살렘 공국 등 동 지중에 일대에 십자군의 나라를 건국했다. 이를 통해 성지순례의 안전은 보장됐지만, 이슬람 세력과는 씻을 수 없는 악연이 생겼고 계속된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는 성지 순례에 나서는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여전히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성지순례 객들의 안전을 위해 유럽에서는 템플 기사단 등 다양한 기사단이 조직되기도 했다. 이런 기사단의 존재는 훗날 각종 소설과 문학작품 등 각종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기도 했고 십자군에 대한 이미지를 대표했다. 

이렇게 1차 십자군 전쟁이 마무리됐지만, 유럽과 이슬람과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1차 십자군 전쟁 후 이슬람 세력의 반격이 본격화됐고 십자군이 수복한 영토들 일부가 이슬람 세력에 점령됐다. 이에 이슬람 세력을 응징하기 위한 2차 십자군이 조직됐다. 하지만 1147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가 주축이 된 2차 십자군은 대패를 당했고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 영역이 됐다. 

 

 

살라진 동상

 




십자군 전쟁의 이슬람 영웅 살라딘 


이 시기 이슬람에는 살라딘이라는 영웅이 있었다.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 제국은 이슬람 영역은 물론이고 동지중해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유럽을 다시 위협했다. 그는 매우 용맹한 군주였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자비로운 군주의 면모도 보였다. 살라딘의 이런 이미지는 서양에서도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살라딘과 십자군의 대결은 3차 십자군 전쟁에서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해 1189년 시작된 3차 십자군 전쟁은 사자심왕이라 불렸던 용맹한 왕 잉글랜드의 리차드 1세를 포함해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까지 서유럽의 강국이 망라된 군대였다. 하지만 3차 십자군은 그 사이에서 알력이 있었고 그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더군다나 원정길에 나서는 도중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신성로마 제국 군대가 중도에 철군하는 일도 있었다. 관계가 악화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갈등은 전쟁 도중 프랑스 군의 철군으로 이어졌다. 

이런 악재에도 리차드 1세의 잉글랜드 군을 중심으로 한 십자군은 강력했다. 그들은 살라딘의 이슬람 제국과 치열하게 대결했다. 살라진과 라차드 1세는 군의 수장으로 맞섰지만, 강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는 등 대결 속에서 신뢰를 함께 쌓았다.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 내부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리차드 1세는 철군이 불가피했다. 결국, 십자군과 이슬람 제국은 협상을 통해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권을 인정하고 성지 순례객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협정 체결과 전쟁을 마무리했다. 성지순례 자유 인정은 성과였지만, 애초 계획했던 성지 탈환에 이르지 못하면서 3차 십자군 전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종교의 공존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또다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202년 교황권 확대에 대한 야망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중심으로 한 4차 십자군이 조직됐기 때문이었다. 성지 재탈환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조직된 십자군이었지만, 그 호응도는 이전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십자군 전쟁의 성과가 크지 않았고 전쟁에 참전한 나라와 영주들의 피해도 컸다. 이에 4차 십자군은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프랑스의 일부 영주들의 중심으로 조직됐다. 

 

 

 




최악의 십자군, 4차 십자군 전쟁 


4차 십자군은 그 규모도 줄었지만, 준비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막대한 전비를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그들의 원정 전략도 육로를 이용한 예루살렘 공략이 아닌 해군을 이용해 이집트를 먼저 공략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에 베네치아가 십자군 후원에 나섰다. 베네치아는 이를 통해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에 따른 이권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또한, 외상으로 군수 지원을 하고 향후 전리품 분배로 이익을 챙기는 협의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 구성이 난항을 보이면서 원정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원정에 필요한 대규모 함선 건조에 온 힘을 다했던 베네치아로서는 큰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베네치아는 군수 지원을 지속하는 조건으로 그들과 앙숙 관계에 있었던 지중해의 도시 자라 공격을 함께 할 것으로 요청했다. 문제는 자라가 기독교 도시라는 점이었다. 

이슬람 세력에 맞서 기독교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조직한 십자군이 따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당연히 내부 반발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막대한 군비 지원을 외상으로 받은 상황에서 이를 타개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함께 자라 공격에 나섰고 자라를 함락했다. 기독교 군대가 기독교 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약탈과 파괴를 한 추악한 장면이었다. 

이에 교황은 십자군과 베네치아를 파문하는 조치를 하기도 했지만, 계속된 전쟁 수행을 위해 이를 철회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는 십자군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용병으로 전락한 그들의 타락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권력 투쟁에 개입해 수도 비잔티움을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 지급받기로 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자 십자군은 1204년 비잔티움 재 점령에 나섰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더해 비잔티움에 십자군 국가를 건국하기까지 했다. 

 

 

 




실패로 끝난 십자군 전쟁


이런 십자군의 모습은 동로마제국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서유럽에 대한 큰 반감으로 연결됐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 서 교회의 통합과 교황권 재 확립이라는 교황의 목표로 퇴색되고 말았다. 이는 동. 서 교회가 완전히 갈라서는 계기가 됐다. 이 점에서 4차 십자군 전쟁은 명분과 실리는 모두 잃은 최악의 전쟁이 됐다. 

이후 십자군 전쟁은 9차까지 전개됐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이슬람 제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성해졌고 이미 그 명분이 퇴색된 십자군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지지부진한 십자군 원정은 1291년 십자군의 최후 근거지 아크레가 이슬람 제국에 점령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십자군 전쟁은 성지 회복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종교적 갈등만을 더 키운 키우고 말았다. 십자군의 전쟁 중 자행한 학살과 약탈, 파괴행위는 유럽의 흑역사로 남았다. 그의 전쟁 범죄는 현대 들어 교황이 이를 사과할 정도로 참혹했다. 

이에 전쟁을 주도했던 교황의 현세적 권력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그 권위 역시 크게 추락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다수의 영주와 기사들이 전사하거나 몰락하면서 봉건제 중세 사회 구조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서는 전쟁 과정에서 동방의 선진 문물이 유입되는 순기능도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지도

 



중세 유럽의 붕괴를 촉진한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후 유럽은 14세기 전 유럽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흑사병으로 막대한 인명 손실이 발생하면서 사회 변화가 가속화됐다. 농업 중심의 장원 경제는 붕괴되고 상공업의 발전이 본격화됐다. 여기에 1453년 동방의 기독교 문명 마지막 보루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제국에 함락되고 다수의 동방 문화와 기술이 유입되면서 유럽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는 유럽을 근대사회로 이끈 르네상스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강성한 이슬람 제국에 막혀 동방과의 무역에 제약이 생긴 유럽인들이 바닷길을 개척하면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신대륙 발견 등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을 기독교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끄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전쟁 범죄는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흑역사가 유럽을 종교가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로 이끌기도 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은 900년 전 유럽에 큰 변화를 불러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지만, 그때 생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단정할 수 없지만, 이후 각 종교에 대한 존중과 이해, 다양성이 사라졌고 극심한 대립이 두 종교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종교의 공통된 신념인 관용과 자유, 상호 존중과 사랑으로 종교적 갈등을 사라지게 하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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