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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조선 역사에서 최악의 군주는 단연 연산군이 첫 손에 꼽힌다. 임진왜란의 비극을 초래하고 백성들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명나라 망명까지 고려했고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선조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치욕이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의 패전과 함께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인조도 있지만, 연산군이 실정과 폭정에는 이르지 못한다. 

연산군은 조선 초기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이룬 최 전성기의 정점에서 조선의 국정 운영 시스템을 무너뜨렸고 결국, 대신들의 반정으로 물러나면서 조선이 신권이 왕권을 앞서는 정치 흐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한 임금이었다. 그만큼 그의 각종 악행은 최악 그 이상이었다.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보기 드문 정통성을 가지고 왕위에 올랐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승계의 중요한 요소인 적장자였다. 그의 어머니 윤씨는 폐비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중전이었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 모든 왕들이 그토록 원하던 정실의 소생이었다. 이후 세자로서 오랜 세월 제왕 수업을 받았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는 많지 않다. 세자가 되기 전 병 등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세자 시절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중전으로부터 자식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도 연산군은 집권 직후부터 신권의 견제를 받았다. 조선의 전성기를 완성한 그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공신들이 중심이 된 집권세력인 훈구세력과 함께 재야의 사림들을 적극 등용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기득권이 된 훈구세력들을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고 성리학적 가치에 입각한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왕도 정치 구현의 의미도 있었다. 

사림 세력들은 주로 언론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삼사,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에 소속됐다. 삼사는 수시로 왕에게 간언을 하고 각종 현안에 대한 조성의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 성종은 이런 삼사를 국정 운영의 중요한 파트너로 삼았고 수시로 의견을 수렴하기를 즐겼다. 분명 이상적인 정치 시스템이었지만, 이는 왕의 능력과 고도의 정치력도 요구되는 일이었다.

 

 

AI 생성 이미지

 




적장자의 정통성 그러나 견제 받는 권력이었던 연산군 


성종은 인수대비라는 매우 유능하고 정치력이 뛰어난 어머니가 있었고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을 성군으로 이끌었다. 막후에서 정치력을 발휘해 성종의 치세를 지원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에 부정적이었던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조선에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인수대비의 존재는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빠르게 국정을 장악하고 친정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하지만 어머니 인수대비의 정치력 영향력은 성종의 중요한 방패막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 조선 정치사의 큰 비극과도 연결된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사사되는 게 인수대비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성종과 다른 후궁들과의 관계를 크게 질투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 문제는 왕과 중전이 풀어가는 게 맞았다.

성리학에서 여성의 남편에 대한 투기는 문제가 됐지만, 성종은 지나치게 많은 후궁들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자식만 해도 19남 15녀가 있었다. 왕실을 부흥시키는 목적도 있지만, 이는 향후 후계구도 등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외척들의 문제도 야기할 수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문제는 남. 여 간의 치정관계로만 보기는 힘든 일이라 할 수 있다. 

생모의 비극 속에서 연산군은 1476년 태어나 7살인 1483년 세자에 책봉됐고 18살이 되던 1494년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당시 18살이면 성인이라 할 수 있었고 제왕 수업도 충분히 받았다. 명군으로 불렸던 성종이 남긴 정치적 유산도 계승했다.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이 있었음에도 굳건히 세자 자리를 지켰다는 건 성종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고 할머니 인수대비 역시 그를 지지했다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연산군은 충분히 성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성종만큼의 정치적 역량이나 제왕의 자질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성종의 여러 업적들이 큰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시점에도 성종의 어머니이자 할머니 인수대비가 생존해 있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고 하지만, 그 영향력은 컸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성종 시대 그 권한이 커진 삼사의 존재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 건국과 그의 할아버지 세조의 정권 찬탈 과정에도 일조한 훈구파 세력들도 연산군에게는 버거운 존재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집권 초기 연산군에게는 답답한 정국이었다. 특히, 삼사의 계속되는 견제는 그에게 가장 성가신 일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 성종처럼 토론과 협의에 능숙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지만, 연산군은 성종과는 달랐다. 연산군은 보다 제왕적인 임금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의 묘 - 위키트리




연산군 집권기 더 득세한 환관 세력 


자신의 정치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힘든 여건에서 연산군이 의지할 수 있는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한 환관들이었다. 환관 또는 내관이라 불리는 이들은 어린 나이에 거세를 해 남성성을 제거해야 하고 이를 확인한 후에 시험을 거쳐 궁궐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 역대 왕조는 물론이고 그 영향을 크게 받았던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도 환관들은 최고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환관들은 궁의 일을 처리하거나 주로 왕이나 왕족들의 일상을 돌보고 보좌하는 역할을 했지만, 권력과 가깝다는 점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있는 가능성이 상존했다. 실제 중국 역대 왕조에서도 환관들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해 사실상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문제는 그런 환관들이 정치가 강력해지는 시기, 중국의 왕조들은 국운이 약해지고 혼란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소위 문고리 권력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의 정치 관여는 국정 운영의 시스템을 흔드는 일이고 정상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권력의 비호 속에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비선 정치가 판을 치고 이는 각종 부정과 비리를 초래했다. 이에 편승해 왕에서 옳은 말을 하는 대신들은 사라지고 간신들이 득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국가 운영이 될 수 없었다. 우리 역대 왕조에서도 환관들이 부정과 비리와 관련한 기록은 곳곳에서 나온다. 이 때문인지 모르지만, 환관들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스스로 남성을 제거한 점은 조롱과 비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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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 직언한 환관 김처선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간언을 했던 환관도 있다. 김처선이 그 인물이다. 김처선은 실록 등에서 1505년, 김처선은 연산군에서 폭정을 멈출 것을 연산군 면전에서 강력한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대규모 살육을 자행한 후,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은 그에게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김처선을 향해 활을 쏘고 다리를 자르고 혀를 잘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야사에 등장하는 예기지만, 연산군이 갑자사화에서 저지른 폐륜 행위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당시 연산군은 극심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 궁궐에는 매일 대규모 연회가 열렸다. 조선 각지의 수많은 여성들이 왕을 위해 차출됐다. 이런 여성들을 훈련시키고 조달하기 위한 기관으로 흥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성들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는 채홍사를 하면서 고위 관직에 오른 임사홍이라는 간신도 등장했다. 

그 속에서 국고는 크게 소모되고 세종과 성종을 거치며 완성된 국가 운영 시스템도 무너졌다. 유흥을 위해 재산을 마구 사용한다는 의미의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연산군 시대의 흥청에서 비롯됐다. 이런 비상식의 시대에 대신들은 임사홍과 같이 연산군의 바위를 맞추며 자리를 보존하고 부를 챙기는 간신이 되거나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죽음에 공포에 침묵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궁궐에서 각종 악행과 기행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들에게 말을 삼가라는 의미의 신언패를 목에 걸도록 했다. 그 역시 자신의 일에 대한 일말의 부끄러움과 권력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대신 자신에게 충성할 수 있는 이들을 더 중용했다. 환관들은 그에 부합하는 이들이었다. 여기에 기생 출신인 장녹수가 연산군의 총애를 얻으며, 환관을 대표하는 인물 김자원과 함께 정권의 실세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당연히 대신들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들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않고 피의 응징을 하는 연산군의 위세에 누구도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이는 조선 초기부터 정치의 중심이 있었던 훈구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 시기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삼사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훈구 세력 역시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림들을 숙청하려는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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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숙청과 사치 향락으로 스스로를 망친 연산군 


무오사화 이후 사람 세력을 급격히 위축됐다. 하지만 훈구세력들도 숙청의 칼날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그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진 피의 보복이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드라마나 영화가 다수 제작되기도 했다. 

그런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지만, 갑자사화의 이면에는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들에 대한 숙청의 의미도 있었다.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를 포함한 할아버지 세조의 공신 세력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사화 때도 죽은 이들의 묘소를 파묘하고 그 시신을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피의 숙청과 보복을 거치며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더 나은 국정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면 그나마 그 악행이 덜어졌겠지만, 연산군은 권력을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했다. 또한, 환관들과 장녹수 등 측근 세력들은 그들을 사유화하고 각정 이권을 챙겼다. 이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연산군의 숙청을 피한 대신들의 불만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달했던 시점에 김처선이 나섰다. 당시 그는 80대의 노인이었다. 그는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명의 임금은 섬긴 환관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궁궐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건들을 직접 접했고 권력의 흥망성쇠를 몸소 체험했다.

물론, 김처선 역시 젊은 시절에는 그의 본분을 잊고 일탈을 저지르기도 했고 이로 인해 처벌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 지형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성종 때에 이르러 김처선은 그의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고 환관들 중 가장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의 측근 중 측근이었던 김처선이었지만,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 김처선은 성종이 이른 조선의 전성기에 임금을 보좌한 인물이었다. 이러 처신이 성종이 그를 절대 신임하도록 했다. 김처선은 바람직한 정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산군과 관련해 그의 성장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봤고 연산군 생모의 비극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게 마지막 기회였던 김처선의 직언 


김처선은 누구보다 연산군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연산군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 걱정과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연산군이 내시부 수장인 자신이 아닌 처세에 능한 간신이라 할 수 있는 김자원을 중용하고 그에게 권력이 쏠리는 상황도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80대 노인이 된 김처선은 묵묵히 하는 일만 하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연산군으로서도 누구보다 궁궐 사정과 자신을 잘 아는 김처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폭정을 일삼았던 연산군은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항상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독살 위험에도 민감했다. 김처선은 일찍부터 왕의 식사를 검수하는 등 안전과 관련한 일을 했다.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환관이었다.

그가 조선 시대에는 매우 귀했던 말을 성종 때 하사를 받았다는 기록은 그의 궁궐 내 입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김처선은 조용히 천수를 누리기를 거부했다. 1505년 김처선은 연산군의 폭정과 각종 폐륜 행위를 꾸짖는 고언을 면전에서 했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결과는 김처선의 비참한 최후였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7촌까지 피의  보복을 했고 그의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신들 중 김처선과 같은 이름을 한 이들에게 개명을 하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이는 보복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폭정에 의한 비극적 최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김처선의 직언은 연산군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기회마저 스스로 차버린 연산군은 1506년 반정에 의해 폐위됐고 강화도로 유배길을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결국, 그는 교동도의 유배지에서 얼마 안 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0살 때 일이었다. 그의 연산군의 비참한 최후는 폭정을 일삼았던 부패한 절대 권력의 최후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권력의 의미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연산군과 김처선


그리고 이런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죽임을 각오한 직언을 했던 환관 김처선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는 직언을 하기 전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김처선의 의로운 죽음은 긴 세월이 흘러 영. 정조 시대 재조명됐고 충신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를 통해 김처선은 환관이 아닌 폭정에 맞선 충신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권력의 측근이라고 하면 권력자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누구보다 각종 이권과 거리를 두고 청렴함을 보여야 한다. 권력의 최상부가 깨끗할 때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고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이 편향된 사고에 매몰되어 있고 이를 사유화한다면 또한, 자신에 반하는 의견을 묵살하거나 이를 억누르려 한다면 그 권력은 이미 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나라를 병들게 한다. 왕조 시대에도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살피는 정치를 했다. 하물며 국민이 주인인 나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여론을 종합하고 그 속에서 정책을 도출하고 시행하는 건 정권을 잡은 이들이 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런 기본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를 권력을 이용해 힘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더 큰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 현대사에서 그런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시민혁명이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권력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자가 일정 기간 위임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주인들은 권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남용하는 정권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는 학창 시절 배우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권력의 남용과 잘못된 사용을 일삼았던 정권의 결말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권력자들은 훗날 자신이 역사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조선 시대, 연산군은 그러지 못했고 김처선은 그렇게 했다. 이는 그들의 역사적 평가를 달라지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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