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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린 먼로는 할리우드가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주도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여배우다. 그는 영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배우로서의 연기보다는 섹시 콘셉트 그리고 금발의 백치미 영어로 빔보(Bimbo)라는 속어로 표현되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불우한 유년기를 극복하고 최고 스타로 올라선 입지전적 인물이었고 할리우드의 악습과 관행에 정면으로 저항해 배우의 권리를 격상시킨 혁명가였다. 또한, 끊임없이 배우로서 자신의 발전시키려 했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영화 속 이미지로만 그를 재단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마를린 먼로였다. 

마를린 먼로의 모 마진 모터스다. 그는 1926년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부남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 가정을 떠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사생아였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계에서 일을 했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마를린 먼로의 육아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마를린 먼로는 어려서부터 보통의 가정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유년기 마를린 먼로 - 위키트리

 




불행 가득했던 유년기 


그는 위탁가정과 보육원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마를린 먼로는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는 보육원에서의 삶보다는 위탁가정을 선호했지만, 그런 위탁 가정에서 성적 학대에 노출되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큰 위안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여가 선용의 수단이었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이런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영화배우의 꿈을 가지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꿈을 이루기에는 당장의 현실이 너무나 암담했다. 16살이 되던 시점에 그가 머물던 위탁 가족이 타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어려서부터 살았던 지역을 떠나야 할 상황이 됐다. 마를린 먼로는 아직 미성년자였고 타 지역 이주를 거부한다면 보육원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마를린 먼로는 이를 피하기 위해 1942년 이웃이었던 오빠와 결혼을 감행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벗어나 보통의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바람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게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 살아가는 걸 어렵게 했다. 마를린 먼로의 배우자는 1944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며 집을 떠났다. 마를린 먼로는 생계를 위해 군수 공장을 취업했다. 당시 미국은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고 다수의 남성들이 스스로 참전하거나 징집됐다.

이에 각 산업체에서는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화됐다. 전쟁의 필요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서도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활발히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남성 주도의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남녀 차별의 구조를 유지했다. 미국에서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된 건 1920년대 가서야 가능했다. 여성들은 고등 교육을 받기도 힘들었고 직장도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그런 사회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속 연예인의 삶 시작 


마를린 먼로는 군수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군수공장을 찾은 한 사진작가에 눈에 띈 마를린 먼로는 모델 데뷔의 기회를 잡았다. 마침 전쟁 중에 여성 모델의 수요가 많았다. 다만, 여성 모델들은 참전한 군인들의 수요에 맞게 노출이 심하거나 성적 매력을 강조한 핀업걸이라 불렸던 사진 모델이 주류를 이뤘다. 마를린 먼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담이 될 수 있는 모델이었지만, 마를린 먼로는 모델 활동을 통해 연예인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했고 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45년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고 전문 모델의 길로 들어선 마를린 먼로는 메이저 영화사와 계약을 하고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연기자로 나서며 그는 마를린 먼로라는 예명을 지었고 금발로 이미지를 변신했다. 배우 마를린 먼로의 삶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배우 활동에 반대하는 배우자와의 갈등은 결국, 이혼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결혼 생활은 이렇게 파경으로 마무리됐다. 마를린 먼로는 개인적인 불행에도 배우로서의 삶에 온 힘을 다했다. 무명 배우였던 자신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에 참가하고 각종 행사에 참가했다.

그러면서도 마를린 먼로를 여배우에 대해 캐스팅을 조건으로 성 상납을 강요하는 등의 나쁜 관행을 거부했다. 실제 마를린 먼로도 제작자 등에게 관련한 요구를 받기도 했다. 마를린 먼로는 이를 따르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점점 캐스팅에서 멀어졌다. 작품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를린 먼로는 생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몰렸다. 배우의 삶을 포기할 수도 있는 시점에 마를린 먼로는 할리우드 최고 에이전시 중 한 명인 조니 하이드를 만났다. 

 

 

 




잘못된 관행 거부한 신인 배우 그리고 잡은 기회 


그와의 만남은 마를린 먼로 배우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를 통해 마를린 먼로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정립했다. 이를 위해 성형 수술을 하기도 했다. 이 시도는 적중했고 마를린 먼로는 비중 있는 역할을 영화에서 맡을 수 있었다. 이후 조니 하이드가 사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마를린 먼로는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1951년에는 첫 주연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를 했고, 무명 배우 마를린 먼로는 섹시 심벌 이미지로 점점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높여갔다. 이를 통해 마를린 먼로를 대중들이 주목하는 팬덤을 가진 스타가 됐다. 그 속에서 섹시 심벌, 백치미를 가진 금발의 미녀 콘셉트가 그의 중요한 이미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과거 무명시절 생계를 위해 찍었던 누드 사진이 대중들에게 유출되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이에 마를린 먼로를 당시 힘겨웠던 삶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고백하며 논란을 정면을 돌파하는 과단성을 보였다. 이는 마를린 먼로가 섹시 심벌로 대중들에게 더 강하게 인식되도록 했다. 그의 누드 사진은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대표적인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지의 창간으로 연결됐다. 마를린 먼로가 대중 스타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논란을 딛고 마를린 먼로는 성공의 길을 걸었다. 1953년 첫 장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큰 흥행 성공을 거두며 마를린 먼로는 큰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로 거듭났다. 또한,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패션과 각종 아이템들은 크게 유행했다. 지금도 마를린 먼로의 스타일은 오마주되고 있다. 이제 마를린 먼로는 인기 영화배우를 넘어 유행을 선도하는 대중 스타가 됐다.

 

 

한국 공연 사진 - 위키트리

 




섹시 심벌 그리고 한국 공연 


1954년 마를린 먼로의 결혼과 이어진 일본으로의 신혼여행,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을 위한 위문 공연은 그를 미국을 벗아나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도록 했다. 그해 마를린 먼로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스타인 디마지오와 결혼했다. 그는 최고 인기 구단인 양키스의 간판선수로 리그 최고 타자로 활약했다. 지금도 깨지지 않은 56경기 연속 안타의 기록도 달성했다. 이런 활약에 디마지오는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런 스포츠 스타와 최고 인기 여배우이자 스타의 결혼은 엄청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웠던 건 마를린 먼로가 신혼여행지인 일본에서 주한 미군을 위한 위문공연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는 점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마를린 먼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방문했고 6.25 한국 전쟁 종전 직후 곳곳에 자리한 미군 부대를 방문하며 열정적인 공연을 했다.

마를린 먼로는 자신이 주연한 뮤지컬 영화 곡들을 중심으로 추운 날씨에도 원피스 무대 의상을 입고 열악한 무대에서도 열정적 공연을 했다. 이는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그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를 높였다. 이런 목적도 있었지만, 마를린 먼로는 종전 후에도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도 공연을 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보다 긍정적 이미지가 더해지는 건 당연했다. 

이렇게 스타로서 큰 성공을 거둔 마를린 먼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대형 제작사가 만든 이미지 틀에서 이미지를 소모하는 배우로만 남기를 거부했다. 또한, 여전히 열악한 배우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나섰다. 실제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은 열악했고 배우들은 전속 계약의 틀에서 다작을 강요당했다. 마를린 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불합리한 할리우드 시스템 파괴자 


마를린 먼로는 이런 불평등한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계약 변경을 물론이고 사전 대본 요구를 하며 배우가 작품을 분석하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등 제작 관행을 변화시키려 했다. 단순히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 외에 영화배우가 영화 제작의 주체로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당시 할리우드 시스템을 주도하는 대형 제작사와의 대립은 마를린 먼로가 스타라 해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마를린 먼로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자신의 연기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막강한 팬덤과 티켓 파워는 거대 제작사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마를린 먼로는 이전보다 크게 나아진 계약을 할 수 있었고 아티스로서 권리도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마를린 먼로는 7년 만의 외출이라는 영화를 통해 최고 배우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 영화에서 마를린 먼로는 영화사에 남을 명 장면인 지하철 환풍기 장면을 남겼다. 이 작품은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고 마를린 먼로를 대표하는 영화가 됐다.

이런 영광과 함께 마를린 먼로는 또 한 번 결혼 생활의 파행을 겪어야 했다. 그의 배우 활동에 불만이 있었던 디마지오와의 갈등은 폭력 사태로 번졌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도 끝을 맞이했다. 그 속에서도 마를린 먼로는 평소 자기가 하고자 했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5년 마를린 먼로는 대형 제작사와의 치열한 소송전까지 거치며 독립 제작사를 설립했다. 이전에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를 통해 마를린 먼로는 독자적인 작품 활동에 더해 제작자로도 그 영역을 넓혔다. 마를린 먼로는 소송전에서 승리하며 그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뉴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고 배우 아카데미에 입학해 연기 수업을 받는 등 더 나은 배우 그리고 제작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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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운동가 


이후 그가 제작에 관여한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작품성도 인정받으면서 마를린 먼로는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도 다질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이에 맞서 행동했다. 그는 인종차별이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흑백 불리 정책이 시행 중인 상황에도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백인 전용 클럽에서 흑인 가수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힘써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의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를린 먼로는 여성 인권운동에도 함께 했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할리우드의 잘못된 관행과 부조리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을 했고 변화를 촉구했다. 

여기에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고착화되고 국가 정책, 특히 안보와 관련해 목소리를 내기 힘든 시기에도 반핵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반핵단체에 참여한 거의 유일한 여배우였다. 마를린 먼로는 그의 영화 속 캐릭터와 달리 항상 지식을 쌓고 사회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이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게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던 그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쳐왔다. 그는 당대 최고 작가 중 한 명인 아서 밀러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최고 지성인과 최고 여배우의 만남은 대중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마를린 먼로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자식을 얻지 못했다. 아서 밀러와의 사이에서 마를린 먼로는 두 차례 유산을 겪고 말았다. 

이에 더해 아서 밀러는 당시 매우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으로 그의 지인들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와 연관이 있었다. 공산주의 그리고 그 맹주라 할 수 있는 소련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공포와 증오, 혐오가 극에 달했던 시절, 공산주의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숙청하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다. 아서 밀러와 그의 배우자이자 사회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마를린 먼로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정보기관은 그들을 수시로 감시했다. 

 

 

지하철 통풍기 장면 - 위키트리

 




거듭된 불행으로 채워진 결혼 생활


이런 주변의 상황과 거듭된 유산 등 불행했던 결혼 생활이 겹치며 마를린 먼로는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렸고 병적인 증세를 보였다. 본업이 배우 활동에도 지장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 마를린 먼로는 술과 약물에 의존하게 됐다. 결국, 마를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결별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배우로 돌아온 마를린 먼로는 이번에 유력 정치인들과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그 정치인들은 케네디 형제들이었다. 존 에프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미국 정치의 명문가로 성장한 케네디가의 역량이 집약된 끝에 40대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됐다.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에 중요 현안에 있어 과감하고 단호한 의사결정은 미국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마를린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의 정치적 후원자로 관계를 시작했지만, 이내 연인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고 그와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는 매우 모범적인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으로 긍정 이미지를 쌓았다. 자칫 케네디와 마를린 먼로의 관계가 알려지면 정치적으로도 큰 타격이 생길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파티에서 마를린 먼로가 축하 공연을 하면서 노골적으로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이 전국에 방송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은 마를린 먼로에게 결별은 선언하며 관계를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마를린 먼로와 연인 관계가 됐다. 문제는 그 역시 유부남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관계는 알려져서는 안되고 더 발전할 수 없는 한계점이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마를린 먼로는 케네디 형제에 진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사회 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전력과 이미 영화배우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던 점을 고려하면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마를린 먼로가 이들에게 집착한 이유로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마를린 먼로는 케네디 형제들을 통해 그가 바라던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열렬한 지지가 애정으로 변화했을 수도 있다. 

 

 




비극적 최후로 이어진 케네디 형제와의 염문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당사자 마를린 먼로였지만, 그는 케네디 형제와의 관계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시점인 1962년 8월, 자택  잠자리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평소 복용하던 약물 과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사인으로 발표됐지만, 새로운 작품을 촬영 중이었고 사망한 당일까지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이에 케네디 형제들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는 풍문이 대중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죽음과 관련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세월의 흐른 후 재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달라진 것 없었다. 마를린 먼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로버트 케네디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이는 정권 차원에서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점도 케네디 정권에서는 모종의 조치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마를린 먼로는 아직 영화배우로서는 한창 활동할 시기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비극적인 최후였지만, 마를린 먼로는 대중 스타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 그리고 유행의 선도자로 미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섹시 심벌 등으로 인식된 것과 달리 마를린 먼로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컸고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대중 문화의 전설


마를린 먼로가 불행을 떨쳐내고 배우로서 다시 활동을 했다면 더 많은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삶은 대중 스타들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대중스타가 되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관심과 인기에 대한 압박감을 짊어져야 한다. 사생활의 대부분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상황도 견뎌야 한다.

최근에는 실시간 소통 수단인 SNS가 보편화되면서 대중 스타들이 모든 행동과 말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유통되는 세상이다. 스타라는 이름의 무게감이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무분별한 사생활 노출도 문제지만, 그만큼 사회적 책임 또한 스타들에게 요구된다. 

마를린 먼로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스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건 배우로서의 삶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억될 수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점에서 마를린 먼로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https://blog.naver.com/youlsim74/22347793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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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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