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750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 지배 속에 있던 아일랜드는 독립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영국의 지배는 더 강화됐다. 영국 바로 옆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과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세계 질서는 선도하는 초강대국이 된 상황에서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더 어려웠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마지막 식민지로 남아있어야 했다. 아일랜드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큰 기회가 됐다.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과 함께 협상국의 일원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과 맞서 싸웠다. 전쟁의 규모는 매우 컸고 그 피해도 막심했다. 영국은 그 영토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전비 부담을..
올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 달을 지나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러시아의 빠른 승리가 예상됐지만,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수도 키이우에서 항전을 지휘하고 있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단결해 이에 대응하면서 러시아가 주춤하는 모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애초 러시아의 상대가 안 된다는 평가였지만, 최근에는 러시아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물론, 첨단 무기가 압도적 공군 전력을 앞세운 러시아의 공세가 강력하다. 이에 우크라이나 영토 곳곳이 큰 피해를 입었고 폐허가 됐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전쟁의 여파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어렵게 빠져나오고 있는 세계 경제를 더 큰 불확실성과 위험 속으로 몰아..
우리 역사에서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시대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가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임진왜란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국토는 황폐화됐다. 산업의 근간인 농업을 지탱하는 농토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때의 피해는 조선 후기에 복구되지 못했다. 또한,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사회 시스템 전반이 파괴되고 전후 수습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16세기와 17세기 소빙기라 불릴 정도로 이상 저온 현상으로 대표되는 이상 기후는 농업생산을 더 위축시키고 식량난을 불러왔다. 전쟁과 이상기후는 일반 백성들의 삶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기아와 질..
코로나 사태 전 터키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다. 멋진 자연과 동. 서양이 교차하는 독특한 문화 전통, 6.25 한국 전쟁 참전 등의 이유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현지의 우호적 분위기도 터키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그중 이스탄불은 대표적 관광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고 아프리카와도 연결되는 지리적 위치는 이스탄불을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만들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이나 영상을 보면 이슬람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시대 그 이름을 바뀌기 전까지 비잔티움이라 불렸고 이후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콘스탄티누폴리스 등으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전장이었던 독일과 소련이 대결한 동부전선, 그 전선에서 양국이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25회에서는 독소전쟁의 양상을 크게 달라지게 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살폈다. 1942년 8월 21일 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약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측을 합쳐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된 200여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그만큼 스탈린그라드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상징적인 의미가 큰 도시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이 도시에 대해 큰 애착을 보였고 가용한 전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볼고그라드로 불리는 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었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의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324회에서는 독소전쟁의 배경과 초반 전투 상황에 이어 전개 과정을 다시 살폈다. 그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잔혹함과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관련한 비극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기조의 상호 불가침 협정을 어기고 소련 서부지역 전반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나치 독일은 개전 초반 큰 우세를 보였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가 부족했고 그들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대규모 전차부대를 앞세운 독일의 고속 기동적, 전격전에 소련의 서부 방어선을 붕괴됐고 나치 독일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빠르게 진격했다.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나치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