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2차, 3차 고려 거란 전쟁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에 당시 왕이었던 현종과 3차 전쟁의 대승을 완성했던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현종을 왕위에 옹립한 정변을 일으킨 강조와 2차 전쟁의 영웅 양규가 극 초반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2차와 3차 전쟁 이전 거란의 1차 침략을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를 했다고 추앙받는 서희가 그 인물이다. 서희는 1차 전쟁 당시 거란의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통해 거란의 침략을 멈추고 강동 6주의 지배권을 확정해 영토까지 넓히는 성과를 만들었다. 각종 역사서나 위인전에서 서희가 이룬 성과는 지금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서희는 이런 외교적 성과와 함께 ..
고려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30여 년간의 고려 거란 전쟁 기간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5회부터 본격적으로 2차 고려 거란 전쟁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강조의 정변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고 현종의 즉위가 있었다. 고려 현종은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유년기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며 큰 시련을 겪어야 했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현종은 왕위 계승에 있어 우선 순위에 있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고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나 왕실 내 우호세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승려가 되기도 했고 계속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왕위에 오른 것도 선왕이 시해당하는 정변의 결과였..
서기 900년, 676년 이후 지속됐던 통일 신라 시대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발생했다. 옛 백제 지역의 군벌이었던 견훤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는 후백제 건국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신라는 한반도 전역의 지배권을 잃었고 고구려의 부활을 명분으로 궁예의 후고구려까지 삼국으로 나뉘며 후 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일각에서는 926년까지 존속했던 발해를 포함해 후사국 시대로 그 시대를 칭하기도 한다. 견훤은 이런 후삼국 시대를 연 인물로 그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그동안 평가 절하되어 왔다. 후백제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의 고려와 경쟁에서 패하며 그 존속 기간이 짧았던 탓에 관련 기록이 부족했다. 이후 고려 시대 역사도 당연히 후백제의 비중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와 근.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팽팽히 맞섰던 삼국시대가 먼저 떠오른다. 삼국은 경쟁과 협력 배신의 관계 속에서 함께 경쟁했다. 그 속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독창적인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문화, 예술의 유산은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 융합되어 한층 더 독창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우리 민족 문화, 예술의 원류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삼국시대의 역사 사료는 부족하고 그 기록의 상당 부분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삼국시대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시 중국의 사료를 상당 부분 참조했고 국 유사는 삼국 시대 역사의 또 다른 면을 살필 수 있지만, 불교와 신라 중심을 기술로 한계점이..
고려의 역사는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건국한 고려는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인들을 포용하며 진정한 통일을 이뤄냈다. 이에 고려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다. 그전 통일 신라가 있었지만,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중심이 된 발해가 건국되고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완전한 통일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고려는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신흥 강국 거란과의 대결을 극복하며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안팎의 어려움을 이겨낸 고려는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했고 활발한 대외 교역을 하는 역동적인 국가로 자리했다. 지금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표현하는 코리아의 어원은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번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