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30여 년간의 고려 거란 전쟁 기간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5회부터 본격적으로 2차 고려 거란 전쟁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강조의 정변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고 현종의 즉위가 있었다.
고려 현종은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유년기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며 큰 시련을 겪어야 했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현종은 왕위 계승에 있어 우선 순위에 있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고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나 왕실 내 우호세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승려가 되기도 했고 계속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왕위에 오른 것도 선왕이 시해당하는 정변의 결과였다.
어렵게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현종은 왕이 되기 전 거치는 태자로서의 시간도 없었고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옹립됐다.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고 정통성에 대한 시비도 생길 수 있었다. 그를 옹립한 강조를 위시한 군부 세력과 기존 관료들 사이에서 그의 왕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종에게 거란이 세운 동북아시아의 강국 요나라의 침략이라는 대외적인 위기가 더해졌다.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고려 그리고 현종
요나라의 왕 성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려 정벌을 단행했고 이것이 거란의 2차 침략이었다.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상은 송나라와 친교 관계를 유지하는 고려는 완벽하게 굴복시켜, 향후 송나라와의 전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선제적 침략이었다. 만약, 거란의 의도대로 고려가 굴복한다면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 역시 그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거란은 자신들에 우호적인 고려 정권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고 고려 현종이 자신의 왕위를 지키는 전쟁이기도 했다. 하지만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현종은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없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국정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를 왕으로 옹립한 강조가 조정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종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이 거란군에 궤멸되면서 고려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거란군은 고려의 최전방 방어진인 흥화진 함락에 실패하면서 전쟁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기마부대를 중심으로 한 빠른 기동력으로 고려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이를 통해 개경을 함락하고 고려 왕의 항복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강조는 거란군의 진격로를 막고 분전했지만, 진형의 약점을 간과했고 대패를 피할 수 없었다.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한 거란군의 남하는 거침이 없었다.
이 시점에 고려 조정은 전쟁 지속과 항복이라는 선택을 해야 했다. 주력군이 궤멸한 상황에서 항복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강감찬을 포함한 일부 대신들은 주전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거란군이 북방의 고려 방어선을 지나쳐 남하를 했고 보급선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 흥화진을 포함해 북방의 고려 성 상당수가 건재했다.
장거리 이동으로 지친 거란군 이 장기전을 치르는데 무리가 있었다. 고려군은 흥화진의 양규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유격전으로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강감찬 등은 개경을 내준다 해도 왕이 그들에게 잡히지 않는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고려 현종의 험난한 몽진길
이에 고려 조정은 고려 왕의 친조 요청을 이유로 협상을 하며 거란군의 남하를 지연했다. 그 사이 현종은 몽진을 시행했다. 현종은 거란군을 피해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그의 여정은 전라도 나주까지 이어졌다. 전쟁 상황이었지만, 그의 몽진길은 매우 험난했다. 왕의 이동이었지만, 그를 호위하는 병력이나 함께 하는 이들의 규모는 왕의 이동이라 하기에는 매우 초라했다. 전시 상황임을 고려해 현종이 원했다는 하기도 하지만, 거란군의 남하 속도가 예상보다 매우 빨랐고 급히 몽진을 결정한 탓에 제대로 된 인원 구성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종과 2명의 왕후는 소수의 인원과 함께 몽진길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현종은 지방의 향리들과 호족들에게 지속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당했고 노골적인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를 수행하던 이들 상당수도 이탈하면서 그의 몽진길은 더욱더 힘겨워졌다. 다행히 지채문 등 그를 끝까지 호송한 무장들과 대신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수차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현종으로서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도 힘겨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현종의 몽진까지 감행하며 벌인 고려의 버티기 전술은 성공이었다. 거란의 왕 성종은 고려 왕의 친조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철군을 단행했다. 형식적으로는 고려가 항복을 한 것이었지만, 고려 왕의 친조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고 말뿐인 항복이었다. 거란은 고려의 실권자인 강조를 잡아 처형하고 고려 수도 개경을 점령해 파괴하긴 했지만, 40만 대군은 동원하고도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전쟁이었다.
거란군의 철군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고려군이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기습공격하며 거란군의 피해가 누적됐다. 거란군이 중요하게 여겼던 고려 포로들도 상당수 고려군에 의해 구출됐다. 그 과정에서 양규 등 고려 장군들이 다수 전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군 과정에서 거란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큰 고비를 넘긴 고려는 빠른 전후 복구와 함께 또 다른 전쟁을 대비했다. 현종은 강조라는 정치적 장애물이 전쟁 과정에서 사라졌고 전쟁을 치르면서 관료들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자신에게 우군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몽진길에서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여전히 중앙 정부의 힘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도 인지할 수 있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후 강한 군주로 거듭난 현종
현종에게는 큰 고난이었지만, 그는 진정한 왕으로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정치적 역량도 키울 수 있었다. 2차 거란 전쟁 후가 어쩌면 현종의 진정한 치세라 할 수 있다. 현종은 거란의 친조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는 한편 거란의 재침에 대비했다. 국내 정치에서도 강감찬 등을 중용하며 그의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아울러 적극적인 혼인 정책으로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왕실의 후사를 풍성하게 했다. 고려는 현종 때 이르러 부자 승계 구도가 확립할 수 있었다. 현종 이후 고려 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현종은 한편으로 냉혹한 군주의 모습도 보였다. 거란과의 오랜 전쟁과 강조의 정변 등으로 비대해진 군부 세력을 대거 숙청하며 문치를 한층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문인과 무인들의 차별 구조가 고착화되고 문인 우대의 정책적 한계가 있었지만, 현종으로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리더십을 회복한 현종은 철저한 전쟁 준비를 통해 거란의 침략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1018년 3차 거란 침략에서 현종은 수도 개경을 사수하며 거란군과 맞섰다. 거란군은 2차 침략 때처럼 북방의 고려 성들을 지나쳐 개경을 직접 공격하는 속도전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감강찬이 이끄는 고려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군의 추격보다 빠르게 개경에 접근할 수 있었다. 대부분 부대가 거란과의 전쟁에 투입된 상황에서 개경의 수비 병력 규모는 많지 않았다.
만약, 거란군이 그대로 공성전을 전개한다면 개경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현종으로서는 또 한 번의 몽진을 고려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개경에 남아 항전했다. 이런 자신감에는 전쟁에 대비해 개경의 방비가 한층 강화됐기 때문이었다. 거란군은 공성전을 전개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기만술로 고려군의 허점을 파고들려 했지만, 그들의 기습을 현종의 친위 부대가 막아내면서 거란군의 추가 도발 가능성을 차단했다.
결국, 거란군은 아마 소득 없이 후퇴해야 했다. 이미 적진 깊숙이 들어온 거란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없었고 크게 지쳐있었다.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거란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침내 귀주에서 정면 대결을 펼친 고려군과 거란군의 결전은 고려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됐다. 우리 역사에 귀주대첩으로 기록된 이 전쟁은 3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 거란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이후 고려는 대등한 조건에서 거란과 화친을 맺을 수 있었고 자주적 국가로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사대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거란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북방의 강동 6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송나라의 외교 관계도 복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동북아시아 3국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송나라, 거란, 일본으로 연결되는 동북아시아 교류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는 동북아시아 각 나라의 육로와 해로 교통을 연결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를 통해 고려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100년이 넘는 평화시기로 접어들 수 있었다.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주, 그리고 고려 왕조를 반석 위에 세운 군주
고려 현종은 두 차례 큰 전란에서 고려를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는 강감찬을 영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왕권이 없었다면 강감찬은 권력 투쟁 속에서 한 정치 세력의 수장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강감찬이 그가 원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함에 있어 그와 함께 하는 왕의 권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현종은 전후 복구와 함께 지지부진하던 지방 행정조직을 완비하고 중앙 집권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 시점에 고려 지방은 고려 행정단위로 완전히 편입됐다. 이와 함께 고려의 대표적 성군이었던 성종 시기 폐지됐던 팔관회와 연등회를 부활하고 다소 소외됐던 불교를 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를 통해 정치 체제는 유교적 이념에 기초로 하지만, 국가의 통합은 불교를 통해 이루도록 했다.
이는 그가 오랜 세월 승려로 있었던 경험과 함께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믿고 따른 불교를 통치 안정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었다. 또한, 대규모 불교 행사는 왕의 권위를 높이고 민심을 다독이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국가적 행사를 할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그의 왕권이 강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려 현종은 고려 왕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 왕조를 안정시킨 군주였다. 또한, 그 어느 왕보다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큰 업적을 남긴 군주이기도 했다. 고려 거란 전쟁은 그의 성장 스토리와 함께 하고 있다. 드라마 초반 현종은 힘없고 각종 시류에 흔들리는 나약한 군주지만, 점점 왕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여러 위기와 시련은 그를 강한 군주로 만들었다. 이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헌신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고 그의 강한 의지와 현명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거란 전쟁은 전쟁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한편에 가려졌던 고려 현종의 영웅 서사가 함께 하고 있다. 고려 현종이 진정한 군주가 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 드라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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