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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 전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이제 제2차 여요 전쟁, 고려 거란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1010년 10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서북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당시 왕이었던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는 등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다. 고려 역사에서는 아픈 순간이었지만, 이 전쟁은 결코 패배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런 판단의 배경에는 양규라는 인물이 있었다. 

양규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고려 목종 집권기 형부낭중, 법을 집행하는 기관의 관리였다. 이에 그가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한다. 그가 고려사에서 한층 비중 있게 등장하는 건 강조의 정변 이후 권력 구도가 크게 변화한 이후였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그는 서북면 방어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도순검사였다.

도순검사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을 왕위에 세우고 당시 고려 국정을 장악했던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을 숙청했을 당시 직책이었다. 그만큼 고려 군부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직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강조의 정변 이후 그 직책에 올랐다는 건 강조의 신임을 얻고 있는 인물이었고 장군으로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할 수 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최 일선 전투의 지휘관 


그가 군사를 이끌고 있었던 흥화진은 거란과의 접경지로 거란군이 침입한다면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지는 최 일선 요새였다. 양규의 당시 직책이라면 최 일선 방어선이 아닌 서북면의 방어선을 총괄하는 후방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는 최일선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는 그가 매우 책임감이 강하고 용맹한 장군이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고려 침략을 강행한 거란은 그들의 왕 성종이 직접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국경을 넘었다. 기록에는 40만의 대군이었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최일선에 있는 흥화진 점령을 위해 공격 전, 수차례 양규를 회유했지만, 양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군은 총 공세를 단행했다. 당시 흥화진에는 수천 명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력 면에서는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고려군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단단한 요새를 바탕으로 용맹하게 맞서며 거란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전쟁 초반 진격에 차질이 생긴 거란군은 병력을 나눠 후방을 방비하고 고려 수도 개경을 향해 남진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주력군과 거란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총사령관인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에서 몇 차례 승전을 하긴 했지만, 결국, 거란군에 무너졌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며 와해됐다. 총사령관 강조 역시 거란군에 포로가 됐고 그들의 회유에 굴하지 않다 처형됐다. 

주력군의 궤멸과 총사령관의 전사, 고려에는 치명적인 패배였다. 서북면 방어선의 붕괴는 항전을 지속하던 서북면 각 성들을 고립시키고 개경까지 거란군의 진격을 막을 군대가 사라지는 걸 의미했다. 고려 조정의 공포감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론이 강하게 나왔다. 

하지만, 강감찬을 포함한 대신들은 지속 항전을 주장하는 한편, 현종의 몽진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거란의 전쟁 명분이 강조가 이미 그들에 의해 처형된 상황에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졌고 여전히 서경을 포함한 서북면 고려 성들의 건재한 점을 주목했다. 거란군은 이미 고려 내륙 깊숙이 침투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졌고 지쳐있었다. 고려 조정은 왕이 그들 손에 잡히지 않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간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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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을 당혹스럽게 한 유격전


실제 거란군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거란군은 서북면의 고려 성들 상당수를 점령하지 못했고 후방에서 고려군의 지속 공격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고려 수도 개경을 점령했지만, 고려 왕을 잡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의 남진은 위험 부담이 컸다. 

그 시점에 양규는 흥화진의 방어를 위한 병력을 남기고 7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강조의 패전 이후 통주성을 지키던 김숙홍이 이끌던 고려군 1,000여 명과 힘을 합쳐 거란군의 후방을 지속 공격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거라군이 후방 병참 기지로 활용하려 했던 곽주성을 다시 장악하면서 거란군의 전쟁 수행을 더 어렵게 했다. 

이는 양규에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가 거란군의 대공세를 막아내며 흥화진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큰 수훈이 있었다. 또한, 거란군 상당수가 서북면에 주둔하고 있었다. 언제든 흥화진을 재 공격할 수 있었다. 또한, 강조의 패전과 전사로 지휘부가 붕괴된 상황에서 전쟁 지원이나 작전 수행도 원활하지 않았다. 양규는 그런 악조건을 딛고 유격전을 전개하며 거란군을 압박했다. 

거란군은 고려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긴 원정으로 지쳐 있었다. 빠른 기동력을 앞세운 고려군의 계속된 기습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아마 거란군에게 양규의 고려군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후방 상황은 거란군의 지속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고 강화협상에 응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거란군은 고려 왕이 추후 친조를 약속받고 고려 사신을 인질 삼아 후퇴를 시작했다. 고려가 추후 항복을 약속했다고 하지만, 큰 성과 없는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후퇴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지속적인 유격전으로 거란군을 괴롭혔다. 거란군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후퇴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양규는 후퇴하는 거란군을 지속 타격하는 한편, 그들에게 포로로 잡힌 고려 백성들을 구출했다. 그 수는 3만여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거란이 전쟁을 통해 인적 수탈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동력은 당시 중요한 생산 자원이었다.  유목민족인 거란으로서는 나라를 건국하고 유지하기 위해 이를 지탱할 인적 자원, 노동력이 절실했다.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고려 백성들은 여러 가지로 유용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특히, 포로가 된 고려 백성들의 상당수는 그들과 국경을 맞되고 있는 서북지역의 백성들로 고려의 향후 방어선을 약하게 할 수 있었다. 

양규의 유격전은 거란군에 직접적인 타격을 하는 것 외에 고려의 미래를 지키는 일로 큰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거란의 대 부대와 직접 대결이 어려운 상황에서 양규의 고려군은 빠른 기동이 필요했고 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이를 이끈 양규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수의 병력으로 대승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양규 개인 역시 엄청난 무력을 지난 장군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역사 기록에 양규의 부대는 7번 싸워 모두 대승을 했고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빛나는 전공, 장렬한 최후 


이렇게 고려군의 지속적인 반격에 고전하던 거란군은 마침내 고려 국경을 넘어 귀환을 할 수 있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양규와 고려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을 추격해 치열하게 싸웠다. 양규와 또 다른 용장 김숙홍은 1011년 1월 28일, 거란군의 본대와 마주했다. 양규의 부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맞서 싸웠고 양규는 김숙홍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에도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으며 힘겹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양규의 전공은 고려 현종은 물론이고 후대 왕들에게서도 계속 칭송받았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공신의 집안으로 우대받았다. 2차 거란 전쟁 후 고려 현종은 양규의 부인에게 직접 쓴 공신 교서를 내려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양규의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의 승전은 패배감에 사로잡힐 수 있었던 고려에 빛과 같은 일이었고 이어질 거란과의 전쟁에 대한 결의를 다지게 했다. 전쟁 영웅의 우대는 흐트러진 고려의 민심을 다시 모으는 일이기도 했다. 이는 3차 고려 거란 전쟁 승전의 바탕이 됐다.

거란군은 3차 침공시 부대의 규모가 10만명 정도로 2차 침공시 40만명 보다 크게 줄었다. 당시 기록에 과장이 있었다고 해도 부대 규모의 축소는 2차 침공 당시 거란군 역시 상당한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의 지속적인 항전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전쟁 영웅 양규의 존재는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후 거란과의 전쟁, 험난했던 몽진 과정을 거치며 추락한 왕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측면도 있었다. 이는 고려 현종에게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양규의 영웅적인 전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고려 거란 전쟁의 승리는 1019년 거란의 3차 침공을 막아낸 귀주대첩을 주도한 강감찬을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거듭된 거란의 침공에 맞선 여러 장수들과 이름 없이 사라져간 고려의 백성들, 그들을 도운 또 다른 백성들의 피와 땀이 응축된 결과물이었다. 양규는 그들의 희생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전쟁 영웅이자 참 군인 


양규가 더 칭송받야 하는 이유는 강조의 정변 등 고려 조정의 혼란기에도 군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했고 자신을 희생했다는 점이다. 강조가 패전하고 그의 처형된 이후 거란은 강조의 명령서를 위조해 양규에서 다시 한번 항복을 권유했다. 이에 양규는 자신은 왕의 명령을 받지 강조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로 이를 거부했다. 이 일화는 양규의 참 군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양규는 앞서 언급한 대로 흥화진 전투에서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고 계속된 유격전 승리로 큰 전공을 세웠다. 그것만으로 전쟁 후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전후 고려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그의 입지였다. 그가 자신의 안위를 신경썼다 해도 비난 받을 일도 아니었다.  즉,양규가 후퇴하는 거란의 본대와 맞서 싸우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양규는 한 명의 거란군을 더 섬멸하고 한 명의 백성들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라 할 수 있는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마지막까지 추격해 섬멸하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연상하게 한다. 이 점에서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으로 지금도 칭송받고 있는 강감찬 외에 양규 역시 주목해야 할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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