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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서양의 문화와 예술에 있어 중요 근간이 되었고 지금도 서양인들의 삶 전반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의 시대를 정의하는 중세 유럽에서는 사회 전반을 지배한 절대적 기준이자 가치였다. 천년 가까이 지속된 중세 시대의 유산은 지금도 유럽 곳곳에 유적과 유물, 각종 예술품으로 남아있고 그 전통이 일상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적과 유물에는 기독교가 함께 하고 있다. 

기독교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었다. 교황은 지금도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로 자리하고 있고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교황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권위에서 절대 권력자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즉, 영적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던 교황이었다. 교황의 권위와 권력은 중세 유럽 봉건제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교황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시기, 기독교인들의 구심점이었다. 이후 기독교는 일반 서민들을 중심으로 그 세를 키우고 로마 제국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당연히 교황의 영향력도 커졌다. 313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공인되고 392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교황은 교회의 수장으로 자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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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던 종교에서 로마제국의 국교로 


교황의 권위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더 강력해졌다. 유럽은 로마가 동. 서로마로 분열되고 이민족의 유럽 침략으로 혼란해진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로마제국이 분열되고 각 지역에 영주들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격변기를 거쳤다. 이 혼란기 속에 사람들의 삶의 기준은 기독교였다. 어쩌면 종교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교회의 힘을 한층 커지게 했다. 그 힘은 교황을 신의 대리인 종교 지도자를 넘어 권력자로 만들었다. 각 지역의 왕들은 교황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아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각 지역 영주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교황의 책봉은 그것으로 기반으로 통치자로 인정받은 왕, 그 아래 영주들로 구성되는 봉건제를 구성하는 근본이었다. 이런 구조는 교황을 교회의 구심점을 넘어 권력의 정점이 되도록 했다. 만약,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건 사실상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런 교황의 힘을 상징하는 사건이 1077년 일어났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현실 사회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교황의 힘에 굴복한 사건이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가 왕이 가지고 있었던 지역 성직자의 임명권과 관련해 교황과 갈등을 빚었다. 갈등 끝에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결정했다.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영주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왕권에 큰 위협을 받았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 카노사 성을 찾았다. 그는 추운 겨울 교황을 향해 파문 철회를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엄청난 굴욕이었지만, 하인리히 4세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이를 통해 교황은 세속의 권력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물론, 하인리히 4세가 이후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교황이 있던 로마를 침공해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세우는 복수를 하기는 했지만, 교황의 종교적, 세속적 권위자와 권력자로서의 힘은 다시 공고해졌다. 왕과의 권력 투쟁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황의 이름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카노사의 굴욕 소재로 한 그림 - 위키백과

 




종교 지도자에서 세속의 권력자가 된 중세 교황 


이는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했다. 교회의 막강한 권력은 막대한 부의 축적으로 연결됐다. 유럽 각지의 교회는 대토지를 소유했고 이는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됐다. 또한, 그 재산을 상속해 대대 손 손 부와 권력을 유지했다. 성직자의 결혼 금지 규정이 있었지만, 상당수 교회 지도자들은 가족을 구성하고 있었고 자식들이 있었다. 중세 교회는 마치 세습 왕조와 같은 형태로 변질됐다. 이는 교황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교회는 이와 함께 교황이 주도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영주와 기사들의 재산을 편취하는 가 하면 막대한 헌금으로 부를 더 축적했다. 이에 더해 다양한 이권이 개입하면서 사악한 사업으로 변질된 마녀사냥도 교회 재산 증식의 또 다른 수단이 됐다.

이와 함께 상업의 발전과 이를 통한 거대 상인들의 등장은 그들로 인해 교회가 더 부를 창출하는 통로가 됐다. 중세 유럽 대표적인 거대 상인 가문인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포함해 교회와의 유착관계로 가문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 가문에서 교황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교황은 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더 강력한 힘을 가질 필요가 있었고 일정 영토를 지배했고 이를 지키기 위한 군대까지 보유하며 국왕과 같은 존대로 군림해다. 교황의 무력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 등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현재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의 존재는 중세 교황 권력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교황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엄청난 부와 명예, 이권을 가질 수 있는 교황의 자리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고 여러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이는 교황청을 정치 투쟁의 장으로 변질시켰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부정과 비리가 파생됐다. 이는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흔들리게 했다. 

여기에 교황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주도했던 십자군 전쟁이 큰 실패로 돌아갔고 중세 유럽 사회의 붕괴를 초래한 흑사병의 창궐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연결됐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은 당시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크게 하고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당장의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사후 세계에서의 행복은 그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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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흑사병 창궐, 르네상스 


또한, 기독교의 세계관 속에서 교회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행복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사람들은 점점 교회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나날이 피폐해져 가는 일반 대중들과 삶과 달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의 존재는 의구심을 넘어 분노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현세의 행복, 인간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중세 시대 그 존재마저 희미해졌던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이 더해져 나온 문예사조인 르네상스는 현실에서 교회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각 나라별로 왕권이 커지고 민족의식의 성장과 함께 국가가 형성되면서 교황의 세속적 지위는 점점 감소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에 있던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로 이주해 머물렀던 아비뇽 유스는 왕권의 교회에 대한 우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교황권 추락을 심화시켰다. 

외적 요인과 함께 교회 내부의 분열은 교황 권력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14세기 교회는 세 명의 교황이 함께 존재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교화의 분열을 종식하고 교리를 재정립하는 등의 노력도 있었지만, 이는 왕권이 그 배후가 있었고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다시 강화시키는 일은 아니었다. 

시대 변화 속에 교황권을 다시 강화하려는 교황들의 시도도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오히려 더 심화되는 부정과 비리, 계속되는 탐욕이 교황과 교회를 점점 더 대중들과 멀어지게 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일부 교황들은 문화, 예술 진흥에 관심을 보이고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등의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예술작품을 통해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거의 절대적 권력을 되찾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교황들의 계속되는 권력의 사유화와 부정과 비리는 여전했고 오히려 더 심화됐다. 일부 교황들의 사치와 향락,  문란한 사생활도 큰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는 교회 지도자로서의 권위마저 흔들리게 했다.

 

 

면벌부 판매, 레오 10세 - 위키백과

 




타락한 교황의 지속 등장


1471년에서 1484년 재위한 식스토 4세는 문화 예술 진행에 공이 있었지만, 족벌주의로 권력 사유화의 문을 열었고 정치적 음모에 적극 관여하면서 명성이 빛을 잃었다. 1492년부터 1503년까지 재위한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 선출 과정에서 금권 선거를 자행했고 권력 사유화 심화, 심각한 성 추문과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1503년부터 1513년까지 재위한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성당 신축사업이나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을 지시하는 등의 업적이 있었지만, 전사 교황이라는 별칭처럼 그 스스로가 독립적인 교황권과 별도의 교황 영역 확립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등 한 나라의 국왕 같은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 역시 흔들리는 교황권을 새롭게 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1513년부터 1521년 사이 교황으로 있었던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는 기존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다. 레오 10세는 매우 사치스러운 인물이었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교회 재정을 한층 더 어렵게 했다. 이에 교황은 면벌부 발행으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려 했고 교황에 대한 여론은 더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독일이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면벌부 발행과 교회의 타락에 대한 반발과 그에 따른 주장을 담은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재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기록한다. 그 권위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회의 힘이 큰 상황에서 루터의 주장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거침이 없었다. 또한,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마르틴 루터 - 위키백과

 




교회의 타락과 탐욕이 부른 종교개혁 


루터는 일반 대중들에게 어려운 성경을 번역해 일반인들도 쉽게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서 기독교를 특정 집단을 위한 특정 집단에 의한 종교가 아닌 대중들이 함께 하는 종교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성경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주장했다. 이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교황은 그를 파문 조치했다. 

하지만 루터는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의 지지층에는 독일 지역 영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를 지지하는 영주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연구과 저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바람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를 시작으로 기존 교회와 다른 새로운 교회가 신교로서 그 힘을 얻었다. 개신교의 시작이었다. 

이에 맞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구교 세력은 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를 새롭게 결속하고 내부 개혁을 하기도 했지만, 신교 세력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긴 세월 유럽을 종교전쟁의 비극으로 이끌었다. 이후 교회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구분되어 발전해 나갔다. 

이런 변화는 기존 교회의 탐욕이 초래한 일이었다. 교회는 절대적인 권위를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으로 악용했고 종교와 정치를 모두 지배하는 존재가 됐다. 이는 부정과 비리에도 이를 스스로 정화할 수 없도록 했고 그들을 개혁되어 할 존재로 만들었다. 만일, 교황과 교황과 그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자체 개혁을 했다면 교회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고 자정능력을 잃은 권력과 힘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수많은 역사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종교개혁은 그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교훈으로 다가온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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