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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중심은 각 시대 왕들이다.  과거부터 전해지는 역사서는 왕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게 보통이고 각 그 시기 집권층들이 역사와 관련 기록 편찬을 주도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역사를 남성들의 역사로 기술하게 했다. 인류 역사에서 남성 중심으로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고 고대부터 국가 권력구조 역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각 왕조의 왕은 남성들이 승계하는 구조였다. 왕조 계승의 원칙은 부자간 세습, 더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에서 장남으로 세습이 원칙이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집권층 내 권력 투쟁의 결과로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형제 세습이 이루어지거나 형제간 권력 투쟁으로 장자 상속의 원칙이 깨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중요한 건 여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고려는 여성들의 지위 면에서 다음 왕조인 조선과 차이가 있었다. 고려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매우 강했다. 우선, 왕실을 제외하면 1부 1처제의 원칙이 강하게 유지됐다. 또한, 재산 상속과 관련해서도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혼과 재혼에 있어서도 큰 제약이 없었다. 이를 악용하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여성들 또한, 당당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재혼이 가능했다. 해당 가문에서 독자적 경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왕실에도 적용됐다. 태조 왕건부터 강력히 적용된 왕실 내 근친혼은 역설적으로 왕실을 모계 중심의 구조로 만들었다. 건국 초기 고려는 신라 말 각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호족들의 연합 정권 성격이 강했다. 태조 왕건은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기도 했고 유력 가문과는 적극적인 혼인 정책으로 왕실의 일원으로 포섭했다. 태조 왕건의 왕비는 무려 29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해당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왕후들은 중앙 정치에서 각 가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위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혼인 정책, 복잡했던 왕실의 근친혼


왕건 사후 고려 초기 혼란스러운 왕실의 권력 투쟁은 급격히 늘어난 왕족들의 증가에 왕비들을 중심으로 한 각 호족들의 이해관계 등이 결합된 형태를 보였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왕비들은 권력 투쟁의 정점에 있었고 그들의 낳은 자식들 역시 왕실 이전에 어머니 가문의 일원으로 그 가문과 강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집권층의 권력 투쟁의 과정에서 한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섰다. 역사에서 천추태후로 기록된 그는 고려 5대 왕 경종의 왕후이자 7대 왕 목종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매우 복잡한 고려 왕실 근친혼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인물이기도 있다. 

헌애왕후로도 불리는 천추태후는 경종의 왕후이기도 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손녀이고 고려 6대 왕 성종의 여동생이다. 왕족 중의 왕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바탕 위해 왕의 어머니라는 권위가 더해졌다. 왕건의 직계 혈통이면서도 왕의 어머니, 여기게 고려 개국부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황주 지역의 호족인 황보 씨 가문의 배경까지 권위와 정치적 힘을 모두 가진 인물이 천추태후였다. 

이는 그의 아들 목종이 당시로는 장성한 1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섭정의 자리에 오른 이유가 됐다. 정식 섭정은 결국,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의미했고 천추태후가 고려를 통치했다 할 수 있다. 그전 천추태후는 권력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기도 있었다. 천추태후는 남편이었던 경종이 젊은 나이에 급사하고 그의 오빠인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는 상황에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수 있었고 후계 구도의 변동에 따라 신변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넘기고 오빠 성종으로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에 계승되도록 했다. 이는 고려 역사에서 성군으로 인정받고 있는 성종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가 여러 정치적 유동성에도 이를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정치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정치 전면에 최고 권력자로 등장한 천추태후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 선 천추태후는 아들 목종이 재위했던 12년간 그 자리를 놓지 않았다. 목종 재위 기간 여러 정책결정과 국정 운영은 천추태후가 의사결정에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목종이 어머니라 하지만, 궁궐에 천추전이라는 별궁을 만들어 그를 머물게 하고 천추태후라 불리게 했던 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했던 것일 수도 있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은 부자간에도 가족 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게 정설이고 가족 간 권력 투쟁의 기록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즉, 목종과 천추태후는 모자 관계이기도 했고 정치적 동반자라 할 수 있다. 모자간의 공동 정권은 선왕 성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각종 제도 정비를 지속했고 거란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력 강화도 지속했다.

또한, 지방 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또한, 성종 때 중단됐던 불교 관련 행사를 부활하는 등 숭불정책으로 차별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서민들을 위한 정책도 함께 펼쳤다. 목종 사후 고려와 거란의 2차, 3차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꾸준한 국방력 강화와 국력 강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거란의 40만 대군에 맞서 고려가 30만의 군대로 맞섰다는 건 과장이 있었다 해도 고려의 국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목종과 천추태후 정권은 나름 성과가 있었지만, 역사에서 목종과 천추태후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목종은 그의 동성애적 성향에 어머니에 휘둘려 정치에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한 혼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천추태후는 아들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권력의 화신, 여기에 김치양이라는 내연남과의 부적절한 연예로 인한 요부의 이미지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조선 시대 기술된 고려 역사서에 근거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조선으로서는 고려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어두운 일면을 강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목종 재위 기간 비정상적인 정권의 지배체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제한하는 유교적 이념과 그에 근거한 정치, 사회 시스템을 갖춘 조선에서 강력한 권력자였던 천추태후의 존재는 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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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남과의 부적절한 관계, 사유화한 권력 


그렇다고 그의 어두운 일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는 분명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천추태후는 경종과 사별 후 궁궐 밖에서 거주했고 김치양과 연인이 됐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 자유롭고 남녀 관계에 있어 유연성이 큰 고려였지만, 왕족이 외간 남자와 사통을 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고려 초기 강력히 지켜지던 왕실의 근친혼 원칙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천추태후의 오빠인 성종은 그 사실은 인지하고 김치양을 귀양 보내고 그 관계를 단절하고 관리를 했지만, 아들 목종은 어머니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천추태후는 목종 즉위 후 강력한 김치양을 다시 불러들이고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강력한 권력자인 천추태후를 막을 이가 없었다. 

문제는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내연 관계를 지속하는 것 외에 그를 중요 요직에 임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김치양이 조정에서 권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는 권력을 사유화하는 일이었다. 또한, 목종과 천추태후 공동 정권의 틀을 깨는 일이었다.

이는 목종에게는 자신의 권위를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목종이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됐을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환멸은 그를 향락으로 빠져들게 했을 수도 있다. 당연히 조정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과적으로 권력의 정통성을 흔들고 왕실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또한, 목종이 후사가 없어 후계 구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도 왕실에는 위협 요인이었다. 여권이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하지만, 왕위 계승은 아들로 이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동성애적 성향이 강했던 목종이 자식을 낳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왕위 계승의 유력 후보가 있었다.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가 낳은 아들 대량원군 왕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순 역시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천추태후와 함께 경종의 왕비였다. 헌정왕후는 천추태후와 달리 경종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고 경종 사후 궁궐 밖에서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헌정왕후는 왕건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삼촌 뻘인 왕족, 왕욱과 연인 관계가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됐다. 그가 대량원군이고 훗날 목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현종이다.

대량원군은 고려 태조 왕건의 손자가 되고 그 어머니 역시 태조 왕건의 손녀로 어머니가 같은 항렬이 된다. 이는 천추태후와 당시 왕이었던 성종과 대량원군이 왕건의 같은 손자, 손녀가 되고 그러면서도 대량원군이 성종과 천추태후의 조카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만들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복잡한 왕실 근친혼에 따른 일이었다.

 

 

고려 사회상 담은 그림 - 위키백과

 



유교적 가치를 중요시했던 성종으로서는 그 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다.  관계가 밝혀지면서 왕욱은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그나마도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가 그가 태어난 지 얼마 후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된다. 이후 대량원군은 어렵게 그 삶을 유지했다. 

목종이 아들을 낳고 후계 구도가 명확했다면 그 존재가 부각되지 힘들었을 대량원군이었지만, 후계 구도가 불투명해지면서 차기 왕위를 이을 인물로 그 존재감이 커졌다. 이는 천추태후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천추태후는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목종을 이를 직계 후사가 절실했다. 하지만 목종은 그런 천추태후의 희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갖게 됐고 아들이 태어났다. 후계 구도에 고민이 있었던 천추태후는 연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분명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특히, 고려 멸망 후 등장한 조선에서 이런 상황은 유교적 가치관을 흔드는 일이었고 폐륜적인 일이었다. 당연히 조선에서 기술한 고려사에서 이 부분은 더 강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권이 강하고 남성과 동등한 상속 권리를 가지고 있어 모계 사회적 성향이 강했던 고려 사회에서는 무조건 비판받을 일도 아니었다. 천추태후 자체가 큰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서양에서도 아들이 아니어도 딸이 왕위를 있고 그의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다음 왕위를 이어가는 역사가 곳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왕 씨가 아닌 이가 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점은 고려 집권층에서는 상당한 거부감이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아들의 아버지 김치양이 유력 호족이나 왕족이 아니라는 점은 향후 정통성 시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목종 역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의 뜻을 받드는 아들이었던 목종은 후계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싶었다. 왕 씨가 다음 왕위를 이어가야 하다면 가장 1순위는 대량원군 왕순이었다. 목종은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멀어져야 했던 존재를 다시 소환했다. 

대량원군 왕순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으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았고 암살될 위기를 수차례 넘기기도 했다. 왕족이었음에도 자신의 의지가 상관없이 승려가 되기도 했다.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의 과도한 권력욕을 꺾어야 했다.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는 목종과 천추태후 공동 정권의 균열을 불러왔고 모자간 권력 투쟁이 불가피했다. 누군가는 사라져야 끝나는 싸움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고려 강동 6주 - 위키백과

 




복잡한 고려 왕실의 후계 구도, 강조의 정변과 실각 


역사적으로 김치양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목종을 시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목종은 그런 상황은 충분히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최정예 부대가 있는 서북면의 장군 강조에게 신변 보호를 명했다는 점은 목종 역시 무력 충돌에 대한 대비를 했고 김치양과 천추태후 세력의 숙청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권력층의 대립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고려 정국을 이끌었다. 애초 목종의 명을 받고 개경으로 향하던 강조가 돌연 반란을 일으켰고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숙청함과 동시에 목종을 폐위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왕실과 개경의 정세와 관련한 정보가 부족했던 강조가 목종이 시해당했다는 가짜 뉴스에 반란을 감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과정에서 목종의 생존 소식을 알았던 강조였지만, 이미 반란군의 수장이 된 상황에서 상황을 되돌리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려 왕실의 복잡하고 왜곡된 후계구도, 그에게는 천한 신분인 김치양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상황에 강조에 환멸을 느껴 반란을 결행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보통의 반란처럼 혼란한 정세 속에서 권력 찬탈을 위해 군사를 움직였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고려 집권층의 권력 투쟁과 이로 인한 정치 혼란이 강조의 반란, 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강조는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의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잃고 실각한 천추태후와 목종은 함께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목종이 강조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적 상황을 맞이했다. 이는 강조가 후환을 없애기 위한 일이었고 여전히 왕실의 어른으로 영향력이 있는 천추태후 정치 복귀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기도 했다. 천추태후는 목종이 살해당하고 현종이 즉위한 이후 고향인 항주에서 20년 넘게 살았고 세상을 떠날 시점에서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고려는 현종 재위 기간 거란의 2차, 3차 침략을 막아내며 자주국의 지위를 지켜냈고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고려, 송, 요나라가 상호 견제와 교류를 하는 동북아 질서의 3각 구도 속에 당당히 포함될 수 있었다.

 

 

 




반란군에 피살된 아들 목종, 비극적인 인생 말년 


또한, 고려는 국난 극복을 통해 왕권과 문인들의 통치가 공고히 되는 문벌 귀족 사회로 접어들었고 중앙 집권 국가의 면모를 확립했다. 또한, 향후 북방 민족들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 국력을 더 신장시키며 외교와 국방, 안정 정치가 함께 하는 평화시기를 맞이했다.

천추태후는 이런 고려의 변화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자신의 권력욕으로 결국, 아들이 젊은 나이에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살해당하는 비극을 기억하며 후회의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천추태후가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보다 책임감 있는 정치를 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를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여성의 몸으로 권력을 장악했다는 건 그에 상응하는 정치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내연남과의 관계가 부각되긴 했지만, 목종 집권기 민생이나 각종 국가 운영과 관련한 실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목종이 상당 부분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거나 천추태후가 국정 운영의 능력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천추태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부분은 천추태후에게 큰 오점이 되고 말았다. 그 오점은 그의 역사적 평가를 좌우하고 말았다. 훗날 고려 역사를 기록한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천추태후에 대한 평가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추태후는 명. 암이 너무가 크게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고려 역사 최악의 요부라는 그의 어두운 면이 더 알려져 있긴 하지만, 고려 거란 전쟁 당시의 역사를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천추태후의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사진 : K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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