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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역사는 대외적으로 거란과의 치열한 대결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간 중요한 장면이 있었다. 1009년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고려 역사상 최초로 왕이 신하에게 폐위되고 시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후사가 없었던 목종의 죽음은 고려 태조 왕건의 직계 자손들의 왕위 계승이 단절된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건은 발단은 목종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고려 목종이 무능력하고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의 내연남 김치양에 휘둘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왕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사를 배경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목종은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더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목종의 치세 기간 고려는 거란, 송나라와 실리 외교를 펼치며 전쟁을 방지했고 북방의 군사력을 강화해 거란의 침략에도 철저히 대비했다. 지금의 평양인 옛 고구려 수도 서경을 한층 더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내치에서도 선대 왕이었던 성종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 경영으로 왕실과 그 관계가 멀어졌던 불교를 더 크게 우대하고 팔관회를 부활하려 하기도 했다.

목종은 재위 기간 큰 실정이 없었고 오히려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조치를 했다. 또한, 역사 곳곳에서 목종은 성군의 면모도 보였다. 무엇보다 목종은 고려 태조 왕권의 직계 후손이었고 고려 왕실의 근친혼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외가와 친가가 모두 왕실에 속하는 정통성이 있었다. 

 

 




왜곡된 고려 목종의 치세 


이는 그동안 목종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과는 배치되는 부분이다. 또한, 그가 왕위에 있었던 상당 기간 어머니 천추태후가 섭정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천추태후에 씌워진 요부와 악녀의 이미지도 상당 부분 후대에 왜곡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런 목종이었지만, 그는 선대 왕이었던 성종과 달리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의 내연남 김치양의 부적절한 관계를 관리하지 못했다. 김치양은 목종 재위 기간 천추태후에 의해 중용됐고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정권의 실제 역할을 했다. 김치양은 그 권세를 이용해 세력을 확대했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김치양의 전횡에 대응하지 못한 목종은 그 자신도 측근 인사를 중용하며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국정 운영에 있어 정상적인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권력 투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목종 이후 왕위에 대한 다툼으로 연결됐다. 이와 관련해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목종은 이에 반발했고 두 정치세력 간 대결은 불가피했다. 목종으로서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도 차기 구도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목종은 왕위 계승에서 가장 앞선 순위에 있었던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왕순은 고려 왕실의 복잡한 근친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났고 강한 견제를 받았다. 이에 왕순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사찰에서 승려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천추태후와 김치양, 목종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수없이 겪었다. 목종은 이런 왕순을 궁으로 불러들여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 세력과의 정면 대결이 불가피했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치양은 언제든 왕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도 있었다. 실제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비호 속에 목종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궁궐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궁궐을 장악하고 목종을 시해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에 맞서 목종은 김치양과 대척점을 이루는 정치세력을 규합했고 부족한 무력을 보강하기 위해 거란과 접한 서북면의 군사들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서북면의 고려 최정예 부대가 배치된 곳으로 고려 군사력의 핵심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책임자가 강조였다. 

애초 강조는 각종 기록에서 정치적 야심을 표출하지 않았고 천상 군인이었다. 목종이 그를 서북면 방위의 책임자로 보냈다는 건 상당한 신뢰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목종으로서는 김치양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보다 강한 무력이 필요했고 그를 불러들이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정치를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고 군을 동원한 것은 결과적으로 목종에게는 큰 비극으로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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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고려 정치 상황 속 정치 전면에 등장한 군인, 강조 


당시 급박하게 전개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목종의 거취 등 개경의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미 개경에서는 목종이 시해되고 김치양이 궁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강조 역시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강조로서는 왕의 명을 받아 반란 세력을 척결하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킨 상황에서 왕의 부재 소식은 그를 당황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강조는 목종의 사망을 전제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척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거병 명분을 변경했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세력에 맞서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옹립해 고려 왕조를 지킨다는 건 큰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간 목종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는 강조의 거병이 반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도 목종의 뜻을 이행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할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반란군의 수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조는 그대로 개경으로 진격해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척결,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하고 계획대로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목종으로서는 왕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 도리어 자신을 왕위에서 물어나게 하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이후 목종은 유배지로 향하는 도중에 강조에 의해 살해되며 28살의 짧은 생을 길 위에서 비참하게 마무리하고 말았다. 

 

 

 



강조의 정변은 기존 고려의 정치 시스템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왕을 시해한 반란이었다. 하지만 고려 왕실의 복합한 권력 투쟁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는 목종의 중요한 실책이 되고 말았다. 목종은 그의 어머니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김치양 세력을 더 강하게 견제할 필요가 있었지만, 어머니와 정적 관계가 되는 것에 부담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김치양의 야심을 알았지만, 자신을 지키기도 버거운 상황에 몰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 세력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이로써 고려는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공포 정치를 펼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던 고려 4대 왕 광종 이후 고려 정치가 신권이 주도하는 양상으로 변하게 됐다. 강조는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그는 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한 상황이었고 안팎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지방 호족들이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 정부의 혼란과 정통성 부재는 국가 경영을 어렵게 할 수 있었다. 조정 내에서도 또 다른 알력은 불가피했다. 

이런 고려에게 거란의 위협이 다시 심화되는 건 큰 위기였다. 강조의 군부 세력은 기본적으로 거란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강조 정권은 거란에 대한 적대 정책을 더 강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고려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형식적 사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제후국으로 왕위의 책봉을 받았다. 요나라의 책봉을 받았던 고려 왕이 시해를 당하고 그들에 적대적인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은 요나라의 침략 명분을 주는 일이었다. 

당시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하려 했던 요나라로서는 송나라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그들 배후에 있는 고려가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요나라는 고려를 완벽히 복속해 후환을 없애려 했고 대규모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강조의 정변은 요나라에는 좋은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정변을 일으킨 강조를 벌한다는 명분에 고려의 정치적 혼란까지 요나라에는 고려 정벌의 큰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 다시 심화되는 거란과의 전쟁 위협


이 점에서 강조의 정변은 고려 왕위 계승의 흐름을 바꾸는 것 외에 대 거란 정책의 변화와 전쟁의 위협을 높이는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요나라는 오래전부터 고려 정복의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강조의 정변이 아니라 해도 언제든 고려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즉, 고려와 거란의 전면전은 예고된 일이었다. 강조의 정변은 그 시기를 더 앞당기는 일이었다. 또한, 강조가 목종의 명에 따라 김치양 세력만을 척결했다 해도 여전히 천추태후가 목종의 어머니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환경에서 정치 시스템의 개혁이 가능했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그 점에서 강조의 정변은 단순한 반란으로 보기 어렵다. 고려 태조 왕건 이후 추진했던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 정책과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의 복잡한 근친혼으로 인한 왕실의 승계 구도가 왜곡된 현상이 왕실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할 수 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3회에서 이 강조의 정변을 다뤘다. 1회 분량으로 모둔 세세한 내용을 모두 보여주기는 무리가 있었지만, 당시 고려의 상황과 정변이 발생한 이유 등을 잘 담아냈다. 이를 통해 건강한 정치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폐해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드라마는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에 큰 상처를 남긴 거란의 2차 침략으로 숨 가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강감찬이 고려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과정도 함께 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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