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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2.12 군사반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서울의 봄'이 큰 반응을 얻고 있다. 12.12 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장성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계엄 사령관이었던 그들의 상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었지만, 실상은 전두환의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군을 장악하기 위한 군사반란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사건은 12.12 사태 등으로 불렸지만, 1997년 신군부 세력들을 단죄하는 재판의 대법원 판결을 통해 군사반란으로 명확히 규정됐고 12.12 군사반란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12.12 군사반란은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헌법 체제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지금의 국정원인 중앙정보부 수장인 김재규에 암살되어 서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 집무실 근처의 한 안가에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최 측근이자 정권의 실세였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김재규의 총탄으로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후 벌어진 사건은 여러 영화나 드라마, 각종 다큐, 기록물 등에 나온 대로였다. 암살을 주도한 김재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후 우왕좌왕했다. 김재규는 얼마 안 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에 의해 체포됐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당시 김재규의 요청으로 암살이 일어난 안가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

김재규는 암살 후 그를 이용해 군을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으로서는 권력 최 상층부에 있는 중앙정보부장의 호출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승화 참모총장은 빠르게 상항을 인지했고 중앙정부로 향하던 김재규를 설득해 육군 본부로 향하도록 했다. 그곳에서 그는 실상을 파악하고 조치를 했다. 그가 중앙정보부로 함께 향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김재규와의 만남과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은 결과적으로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치 군인들의 탐욕이 부른 12.12 군사 반란


김재규를 체포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은 사건 수사를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맡긴다. 보안사는 군내 정보 활동을 물론이고 민간 영역의 영역의 정보활동도 알게 모르게 했던 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와 함께 유신 권력을 뒷받침하는 중요 정보기관이었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유고와 또 다른 권력 기관이었던 대통령 경호실 실장인 차지철의 사망, 대통령 암살 사건의 피의자 된 중앙정보부장까지 핵심 권력 기관이 공백 상태에 빠졌고 당장 사건을 수사할 기관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유신헌법 체제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상황 등 복합적인 문제가 더해지며 보안사가 사건 수사 전면에 나섰다.

이는 최대 군 사조직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을 군 인사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도 그 존재가 알려지게 했다. 그가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사건 브리핑을 하는 장면은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하는 사건의 수사를 맡는다는 건 전두환에게는 큰 기회였다. 그 시점에 그는 이미 권력에 대한 야심을 마음속에 담아뒀을지도 모른다.

이미 권력의 비호를 받는 하나회를 조직하고 조직원들끼리 이권을 주고받는 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군인의 책무를 져버리고 정치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당연히 하나회는 정치 상황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두환의 급부상은 군 수뇌부에는 큰 위협요소가 될 수 있었다. 이미 하나회는 군내에서 그 존재감이 매우 컸고 군 중요 요직에 하나회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군 관련 인사가 구체화되고 있었고 전두환의 보직 변경 가능성도 컸다.

군 수뇌부가 전두환의 야심을 알아차린 것인지 하나회 조직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요직인 보안사령관 자리를 잃는 건 전두환과 하나회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그들 조직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은 이런 정치군인들이 그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탐욕이 부른 결과물이었다. 신군부는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군 수뇌부를 식사 초청을 이유로 모처로 불러 술자리를 갖도록 했고 반란에 대한 초기 대응을 어렵게 했다. 신군부는 그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서울로 이동하는 한편,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를 위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최소한의 정당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지만, 예상과 달리 최규하 대통령은 순순히 재가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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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했던 신군부, 순진했던 군 수뇌부 


그 시각, 신군부는 공관에 머물던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 사실상 강제 납치한 상황이었다. 그 자체로 항명이었고 반란이었다. 신군부 세력에게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한층 더 절실했다. 반란군 측과 최규하 대통령의 대치가 길어졌다. 그들은 그가 머물던 총리 공관을 장악했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편으로 그들 부대가 군 수뇌부가 있는 육군 본부와 그 외 정부 중요 시설 장악을 시도했다. 

그 시각 반란 징후를 포착한 군 수뇌부는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신군부에 포섭된 수도권 인근 부대 상황은 진압군이 신군부에 맞설 수단을 제한했다. 신군부 세력은 군 통신망을 감청하며 군의 대응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신군부는 확실한 정보 비대칭 상황에 계속된 회유로 군내 우호 세력을 추가로 확보했다.

그들에 맞설 수 있는 군부대는 장태완 장군의 수도방위 사령부와 육군 본부 산하 일부 병력, 아직 신군부 세력으로 돌아서지 않은 특전사의 일부 부대 정도였다. 하지만 신군부 행위 자체가 정당성이 없었고 그들의 군 전체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군 수뇌부가 상황을 냉정히 잃고 대처를 했다면 상황을 달라질 수 있었다. 실제 장태완 수도방위 사령관은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대응했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역시 회유에 응하지 않고 항전 의지를 보였다. 그 시점에 신군부의 영향밖에 있었던 9공수 특전여단을 서울에 진입시켜 신군부 세력을 막으려 했다. 만약, 9공수 여단이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보안사령부를 타격했다면 상황은 급변할 수 있었다. 대치 상황이 길어지고 이와 관련한 소식이 국. 내외에 알려지면 신군부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과 미군이 군사반란을 지지할리 없었다. 

신군부 측은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 했다. 당연히 마음이 급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계속 겁박하는 한편, 잠적했던 국방부 장관을 찾아 그를 회유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 근처에 있었고 총격전이 발생하자 몸을 숨겼다. 군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정점에 있는 그로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보호하는데 급급했다. 그는 위험을 피해 숨어있다 신군부 측에 발견되어 사실상 끌려 나오는 굴욕을 당했다. 그는 신군부의 의도대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체포 재가를 최규하 대통령에 건의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결재서에 서명을 했다. 다만, 서명 시간을 함께 표시하면서 사후 재가임을 명백히 하는 증거를 남겼다.

이후 신군부는 더 거침이 없게 됐다. 대통령의 재가는 그들이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에 맞서는 군 수뇌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칫 우리 군 사이에 무력 충돌 우려가 커졌다. 이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양측이 신사협정을 맺어 상호 군부대를 철수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군 사이에 유혈 충돌에 대한 우려를 공감한 결정이라 할 수 있었지만, 군 수뇌부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미 반란을 결행한 신군부 세력으로서는 이대로 상황을 종료하는 건 추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적 이익을 위해 군을 동원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정당성을 잃었다. 군 진압군이 병력 이동을 취소했음에도 신군부 측은 서울에 병력 진입을 더 가속화했다. 심지어 전방을 지키는 9사단 병력까지 동원했다. 당시 9사단장은 노태우였다. 그의 결정은 신군부의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의 팽팽한 균형을 완전히 깨뜨리는 일이었다. 노태우의 이런 결정은 그를 전두환 정권에서 정권의 2인자로 자리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이제 진압군이 신군부를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장태완 수도방위 사령관은 한강 다리의  통행을 차단하는 등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지만, 점점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유혈 충돌을 막아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그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수방사 부대 상당수도 신군부 측에 가담한 상황에서 장태완의 분투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반란군에 저항한 김오랑 그리고 정선엽 


그가 좌절하는 상황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특전사령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과 국방부 헌헌병중대 정선엽 병장이 있었다. 김오랑 소령은 특전 사령부를 접수하고 특전 사령관 정병기 소장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진입한 신군부 반란군에 홀로 맞섰고 총격전 끝에 반란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와 맞서던 반란군의 선두에는 평소 이웃에 살며 절친한 관계였던 박종규 중령이 있었고 김오랑 소령은 그의 총탄에 전사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그 시점에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 벙커를 지키던 중 반란군의 투항 요구를 거부하고 맞서다 그들의 총탄에 전사했다.

그들의 전사는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국민들의 기대했던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사라지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봄이 되면 피어야 할 꽃이 피지 못하고 지는 것을 상징했다. 그들은 불의한 명령에 굴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분을 마지막까지 다했다.

김오랑과 정선엽은 당시 충분히 상황 판단이 가능했었고 눈치껏 반란군에 순응했거나 몸을 피했다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직분에 마지막까지 충실했다. 이런 군인들에게 돌아온 건 함께 적과 싸워야 할 아군의 총탄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너무나도 원통한 죽음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을 성공시킨 신군부 세력은 보란 듯이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가 하면 모처에서 파티를 열어 성공을 자축했다. 이후 신군부는 군에 이어 정부 중요 기관을 장악하고 언론을 장악하며 그들에 유리한 언론 환경을 사전에 구축하는 등의 권력 찬탈의 과정을 치밀하게 밟아갔다.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는 등 헌정을 중단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비극이 있었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성공 이후 소장에서 중장과 대장으로 빠르게 셀프 진급을 했고 대장으로 예편 후 유신헌법 체제에서 대통령에 오른 후 다시 헌법을 개정해 7년 단임의 대통령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요식 행위에 불과한 2차례 체육관 선거가 있었다. 5공화국 시대의 시작이었다.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5공화국 시절 중요 요직을 차지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어진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 선거로 정국은 급변했다. 그 속에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야권의 분열을 틈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은 사실상 5년 더 연장됐다. 그 사이 12.12 군사반란 세력과 그들에 부역하는 세력들은 스스로를 보수정치 세력으로 포장하며 부도덕함과 부족한 정통성을 포장했다. 그 결과 군사반란과 내란에 대한 단죄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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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등장, 단죄된 신군부 그러나 절반의 단죄 


하지만 노태우 정권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진압군에 있었던 인사들이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고소고발을 통해 그들의 각종 범죄에 대한 처벌을 공론화했고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문민정부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신군부 세력들의 군사반란과 쿠데타 그 외 5공화국 시절 비리 등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그리고 긴 수사와 재판을 통해 신군부 세력을 각종 죄상과 비리 등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유죄가 확정된 전두환과 노태우는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와 동시에 군내 사조직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정치군인들은 설자리를 잃게 됐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쿠데타로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역사의 정의가 실현되는 상황에도 불의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이들은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진압군 편에 있었던 장성급 인사들은 이후 중요 직책을 받거나 정치인으로 변신해 나름 역할을 했지만,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존재는 잊히고 말았다. 

12.12 군사 반란 직후 이들의 죽음은 근무 중 사고에 따른 순직으로 처리됐고 국립묘지 한편에 잠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원통함이 풀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관련법에 적과의 교전이나 적의 행위로 인한 사망과 무장폭동이나 반란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경우 전사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즉,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은 대법원 판결로도 규정된 12. 12 군사 반란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전사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순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 그들을 기념하는 단체 등에서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정치권 내 12.12 군사반란 세력과 연결된 이들이 존재했고 신군부 세력에 뿌리는 두는 정치 세력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뒤 늦은 명예회복 


그들이 전사자로 인정된 건 최근의 일이다. 12. 12 군사반란이 있은 후 40년이 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었다. 12.12 군사 반란이 명백히 규명되고도 20년 넘어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그 사이 김오랑 소령의 배우자는 그가 전사한 직후 충격으로 실명을 했고 이후 그를 기념하는 명예 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하다 1991년 6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사병이었던 정선엽 병장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됐고 유족들은 오랜 세월 더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늦었지만 그들의 의로운 행동이 다시 조명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사자로 만든 이들에 대한 단죄는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할 수 없다. 신군부 인사들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얼마 안 가 사면을 받도 풀려났고 이전에 축적했던 재산과 사회적 지위 등을 바탕으로 편안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의는 시대를 초월해 지탄받아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군부 인사들 대부분은 그들의 당시 군사반란과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있고 그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일 또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로 나라를 구한 혁명이라 항변하고 있다. 그들은 보수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여전히 호의호식하고 있다. 

하지만 12. 12 군사반란과 이어진 5.17 쿠데타는 정파적 이해관계와 이념, 정치적 성향을 떠나 불의 한 일이었고 헌법을 파괴하고 자신이 가진 권한과 지위를 사익을 위해 사용한 파렴치한 범죄였다. 이는 누구에게도 비판받아야 하는 일이다. 그 행동을 정당화하고 불가피성을 긍정한다면 이와 같은 일의 반복을 막을 근거를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2.12 군사반란과 이어진 신군부의 행태는 그 죄상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지속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 국가 기관이나 선출되지 않은 자가 자신의 권한과 지위를 악용해 사익을 도모하고 국가 시스템을 그것을 권력 탈취의 수단으로 삼는 일을 방지하는 일이기도 하다.

 

 

 



망각되면 안 될 역사 그리고 계속해야 할 역사적 단죄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정 요건이 되면 누구나 피선거권이 있다. 권력을 잡고자 한다면 민주주의 정치 틀에 들어와 정치활동을 하며 실현하면 될 일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가진 힘으로 이를 실현하려 한다면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의 최후는 인류 역사에서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불의에 맞선 이들의 의로운 행동 역시 잊히지 않게 계속 알려야 한다. 그 점에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은 잊힘의 흐름 속에 그들을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들의 삶이 미디어의 소재로 소비되고 마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들의 삶이 가치있게 알려지는 건 불의에 대한 저항이 옳은 일이고 정당하며 예우 받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김오랑과 정선엽을 찾고 그들의 기억하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흥행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에서 이들의 의로움이 대중들에게 다시 알려지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악과의 싸움의 연속이다. 방심하면 언제든 그 봄은 겨울로 변할 수 있다. 우리 자유 의지대로 권력을 위임할 대상에서 투표를 할 수 있고 권력자들과 정치인들을 언제든 비판할 수 있고 조롱할 수 있고 풍자할 수 있는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그런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세력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얼마전 우리 역사에서도 있었다.

영화 '서울의 봄'은 그 점에서 한번 소비되고 마는 콘텐츠가 돼서는 안 된다. 영화 관람객 중 상당수는 불의가 승리하는 너무 현실적인 장면 장면에 분노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비통함 한편에 불의에 저항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 점에서 12.12. 군사반란은 불의가 승리한 역사가 아니다. '서울의 봄' 영화가 다시 사람들에게 재현한 그날의 역사는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고 그때도 정의로운 이들이 있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 한편에 김오랑과 정선엽이 있었다.  



사진 : 영화 서울의 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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