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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두 전쟁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선조와 광해군, 인조가 임금으로 집권하던 시기 일어났다. 그 피해는 극심했고 조선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의 복구는 조선 말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시대 부흥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후 극 소수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변화하는 세계 흐름에도 뒤처지며 조선은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암흑의 역사로 이어졌다. 두 전쟁이 준 상처는 그만큼 크고 깊었다. 역사적으로 두 전쟁은 드라마틱 한 장면이기도 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 교양 예능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두 전쟁이 모두 조선에는 비극의 역사였다는 점이다. 

특히, 병자호란은 어렵게 전후 복구를 하던 조선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더 큰 문제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걷어차며 위험을 자초했다는 점이었다. 조선은 여진족이 만주에 새운 후금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지 못했고 쇠락하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지속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며 도운 나라라는 명분에 근거했지만, 조선은 누구를 돕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조선의 땅에서 일어난 전쟁의 피해는 크고 광범위했다. 새로운 전쟁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백성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았다. 

 

 

 

 



선조 사후 임금이 된 광해군은 이 점을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신한 선조를 대신해 전시 조정을 이끌며 의병들을 규합하고 전시 내각을 운영하며 항전했다. 선조의 계속된 몽진과 실정으로 조정에 대한 신뢰를 거둔 백성들은 광해군에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해 군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민심도 함께 얻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냉혹한 국제 정세와 백성들의 비참한 삶, 민심과 동떨어진 정치에 대한 문제점을 분명히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전후 광해군은 전후 복구와 함께 민생을 돌보는 정치를 했다. 임진왜란 전후 강성해진 후금과 날로 그 세력이 약해지는 명나라의 상황 속에서 양측에 대한 등거리 외교로 전쟁의 가능성을 막고자 했다. 후금은 명나라 공략을 위해 배후에 자리한 조선과 명나라의 협공을 경계해야 했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적대적 관계 형성을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외교로 후금의 관심에서 조선을 멀어지게 했다. 실제 명나라의 요청으로 명나라와 후금의 전투에 지원군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지원군이 바로 후금에 투항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도 후금에 대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는 걸 막기도 했다. 

광해군의 치세에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펼친 중립 외교는 큰 치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층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성리학 사고가 국가 운영의 근간이었던 조선시대 광해군의 외교는 명분을 잃는 일이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중요한 나라의 정책인 상황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내부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이후 인조반정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광해군은 소수 정권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선조가 늦은 나이에 어린 중전으로부터 아들을 얻으면서 그의 세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렸다. 선조는 뒤늦게 얻은 아들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큰 위협이었다. 스스로가 적장자가 아니었던 선조는 적장자에 대한 왕위 승계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창대군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였고 광해군은 정치적 정적과도 같았다. 영창대군의 성장은 광해군에게 위기로 다가왔다. 조정의 대신들도 성리학적 명분론 등에 따라 차기 권력으로 광해군보다 영창대군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위기의 광해군에게 선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새로운 기회가 됐다. 나이 어린 영창대군의 왕위 승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은 어렵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통성에 대한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에게는 정치적으로 소수의 북인 세력만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며 여소 야대의 정국에서 그의 권력은 항상 위험 속에 있었다. 영창대군을 중심으로 한 반정의 가능성을 그는 항상 경계해야 했다. 

이는 그의 강압적인 통치를 불러왔다. 광해군은 수차례 역모죄로 숙청을 단행하며 반대 세력을 견제했다. 급기야 중요한 위험 요소인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그의 생모이자 왕실에서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하기에 이른다. 광해군으로서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향후 인조반정에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영창대군 사사 후 광해군은 정치적 위험요소가 사라졌다고 여겼지만, 그에 대한 반정의 움직임은 계속됐다. 결국 광해군은 서인 세력이 주도하는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계속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광해군은 역사에서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광해군을 몰아낸 이후 서인 세력은 외교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반정 명분이었던 명나라의 사대 관계 복원과 후금을 배척했다. 그들도 국제 정세를 모를 리 없었지만, 정권의 유지가 더 중요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전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은 명나라 공략을 위해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가 중요했다.  이런 조선이 친명 정책을 노골화하자 청나라는 힘으로 복속하는 것을 선택했다. 

청나라는 정예 부대를 조선에 보내 침략을 감행했다. 조선은 나름 방비를 한다고 했지만, 청나라의 빠른 기습에 대응하지 못했고 순식간에 수도 한양이 점령될 위기를 맞이했다.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의 몽진을 추진했지만, 선조는 끝내 강화도로 향하기 못하고 남한산성에 은거해 항전해야 했다. 조선은 이를 통해 의병들의 구원과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한겨울 한파와 부족한 식량 속에서 청나라와 맞섰다. 

그를 구원할 의병의 규모와 힘은 미약했고 청나라 군대는 강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세 역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의병이었지만, 병자호란 당시 의병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다. 그만큼 민심은 조정을 떠나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현실을 인정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론과 끝까지 항전하길 주정하는 주전론으로 맞서 대립했다. 나라의 위가에서 나올 수 있는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에 있어 백성들의 삶에 대한 고찰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민심을 수습하고 국난에 함께 대응할 구심점과 리더십이 조선에는 없었다. 명나라 역시  조선을 구원할 힘이 없었다. 

결국, 왕실의 대부분이 피신해 있었던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싸울 힘을 완전히 잃은 조선은 임금인 인조가 청나라 왕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며 항복을 했다. 조선은 그들이 오랑캐로 칭하던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와 굴욕적인 군신의 관계를 맺어야 했다. 청나라는 조선 말기까지 영향을 행사하게 된다. 

또한, 전후 조선은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고 인적 물적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짊어져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나라 재건에 온 힘을 다해야 할 조선이었지만, 병자호란은 조선의 부흥을 위한 동력을 상실하게 했다. 그나마 전쟁이 전국적이 아닌 국지전이었다는 점이 작은 위안이었다. 병자호란은 당시 집권 세력의 잘못된 판단이 부른 참사였고 그들의 그렇게 소중했던 명분마저 잃는 결과가 됐다. 물론, 중립외교가 지속되었다 해도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으 크다. 하지만 전쟁 패배에 따른 굴욕적인 항복과 지속적인 수탈을 최소화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집권층은 권력 유지와 사상적 정치적 판단으로 민생을 외면했다.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아픈 기억에도 반성하지 않았고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더 큰 노력을 했다. 불필요한 예법이 강조되고 남녀 간 존중은 가부장적 불평등의 고착화로 이어졌다. 권력을 사이에 두고 정파 간 대립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된 숙청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에 조선은 더 폐쇄적인 나라가 됐고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을 상실했다. 

지금도 우리는 강대국 틈에서 외교적으로 복잡한 함수를 풀어가야 한다. 병자호란의 역사는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집콕이 대세가 된 요즘 TV에서 병자호란과 관련한 드라마와 영화, 다큐 등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때의 선택에 대해 되짚어 보는 요즘이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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