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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65회] 중국군의 참전, 다시 반전된 6.25 전쟁 전세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5. 2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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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전쟁의 과정과 그 이면의 이야기를 수회에 거쳐 다루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265회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중국군의 참전과 흥남철수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까지 당시 전쟁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과 관점도 볼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이끄는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급반전시킬 수 있었다. 주력부대 대부분이 낙동강 전선에 발이 묶여 있던 북한군은 순식간에 보급선이 차단되고 포위되는 상황이 됐다. 급히 후퇴를 했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이미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던 북한군의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남한 지역을 신속히 장악했다. 그 기세는 순식간에 38도선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유엔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했다. 1950년 10월 1일의 일이었다. 이날은 이후 국군의 날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엔군의 중심이었던 미국은 38도선을 넘어 북진 시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개입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유엔군을 이끌던 맥아더는 북한 지역의 빠른 점령과 전쟁 종식을 우선했다. 그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북진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북한군의 저항을 미약했고 겨울이 오기 전 선두 부대는 압록강에 이를 정도였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 기념우표를 제작 발매하기도 했다. 6.25 전쟁 직후 비관적이 분위기는 사라지고 긍정적 전망이 가득했다. 맥아더 역시 크리스마스 전 전쟁 종료를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의 본격적인 북진이 개시되는 시점에 북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과 중국 마오쩌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 방송에 소개된 그의 친필 편지는 김일성의 다급함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이런 지원 요청에 중국은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당시 중국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을 긴 전쟁의 상태가 곳곳에 남아있었고 전후 복구가 시급했다. 공산주의 정권의 권력기반을 강화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전쟁 참전을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공산당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대결을 항상 고려하고 있었다. 중국이 아닌 한반도에서의 대결은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공산화를 완성하고 그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마오쩌둥이 그의 장남을 참전시키고 미군의 폭격으로 그 장남이 사망했음에도 유해를 북한 묘역에 안장하게 했다는 점은 미국과의 대결에 대한 그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의 결정으로 1950년 10월 중국군이 본격 참전하면서 대규모 군대가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군은 빠르게 남진하여 북한 지역 곳곳에 자리했다. 중국군은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거치면서 단련된 정예 부대였다. 중국군은 열악한 장비과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병사들의 뛰어난 역량과 기동력, 험준한 산악 지향에 맞는 다양한 회피 위장술로 유엔군을 솎었다. 

특히, 인해전술이라 불리는 독특한 전술은 유엔군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열악한 전력을 다수의 병력으로 극복한다고 알려진 인해전술이지만, 당시 중국군의 병력은 유엔군과 국군보다 보다 더 적었다는 것이 공식 기록에 남아있다. 중국군은 단지 숫자의 힘이 아닌 적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병력을 집중하는 전략과 함께 다양한 심리전을 통해 적을 혼란시키고 공포감을 가지게 했다. 무엇보다 적을 삽시간에 포위하는 신출기몰함은 미군을 당황스럽게 했다. 어느새 최전선에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국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이 있다. 

이런 중국군의 위협을 맥아더는 무시했고 과소평가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우려하고 있었고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이 어렵고 참전한다 해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선 공군 제공권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큰 오판이 됐다. 중국군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고 제공권의 문제는 소련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됐다. 전면적인 전쟁 개입을 주저했던 소련은 중국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군을 지원해 이를 지원했다. 

당시로는 최신 소련 미그 전투기는 미 공군에 큰 위협이 됐다. 다수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피해를 입었다. 이에 미군 역기 최신 전투기를 투입해 소련과 맞섰다. 이들 전투기는 모두 나치 독일이 개발한 제트기 기술이 기반된 전투기였다. 전쟁 역사상 최초의 제트전투기의 공중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한반도는 최신 무기의 시험장이자 대결장 됐다. 

이러한 변화는 전쟁 양상을 급변하게 했다. 때마침 겨울이 찾아오고 강추위가 몰려왔다. 중국군은 추위를 대비했지만, 유엔군과 국군은 그 대비가 부족했다. 전쟁은 중국군과 함께 추위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유엔군과 국군은 전략상 후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은 과정에서 큰 피해는 불가피했다. 후퇴 과정에서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는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개마고원 일대까지 진출한 미군 최정예 해병 1사단은 그들보다 몇 배는 많은 중국군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했다. 여기에 영하 30도 이하의 강추위까지 닥치면서 해병 1사단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정예부대는 후퇴와 전투를 병행하며 목표지점은 흥남 철수에 성공했다. 전투 과정에서 강추위에 다수의 인명 피해가 있었지만, 상당 전력을 유지하는 성과가 있었다. 미 해병 1사단을 비롯해 함경도 지역에 진출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국군에 맞서며 하나 둘 흥남에 집결했다. 6.25 전쟁사에 남은 흥남철수작전의 시작이었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대규모 병력과 무기가 장비가 있었고 선박을 이용해 철수가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20만에 이르는 피난민들 역시 흥남부두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유엔군으로서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부 장비과 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상당수 피난민들이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흥남철수의 장면을 현실적으로 소개했다. 흥남 철수작전으로 10만의 부대와 그와 비슷한 숫자의 피난민들은 무사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상 최대의 후퇴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이 작전으로 군 전력의 상당수가 보존되었고 반격할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중국군의 참전과 중국군을 과소평가한 오판의 결과는 참혹했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됐다. 중국군의 참전 이후 미국 일각에서는 핵무기의 사용을 적극 검토하기도 했다. 맥아더 역시 핵무기의 적극적 사용과 전쟁의  확전을 강하게 주장했다. 

기밀 해제된 미국 문서에는 원자폭탄의 일본 배치와 사용을 검토하는 내용이 있다. 이에 맞서 소련 역시 한반도에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도 했다. 자칫 한반도는 핵 전쟁으로 재기 불능의 땅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제3차 세계대전에 부담을 느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실행되지 않았다. 강경론자였던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넘는 전쟁의 확전을 원하지 않았고 직접적인 대결에도 부정적이었다. 

한반도에서는 우리 민족 간에 서로를 죽이고 다치게 하는 비극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중국까지 강대국들의 이해와 정치적 고려에 의해 움직이는 전장일 뿐이었다. 전황을 바꾸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찔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6.25 전쟁의 과정 속에서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당시의 비통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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