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6.25 한국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263회 전쟁 개전 전 상황을 살펴본데 이어 개전 이후 서울 함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 서울 함락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치열한 접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까지 과정을 전쟁 초기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치밀한 준비 끝에 우리의 방심을 틈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우리 군은 대비가 부족했고 전선의 상황을 개전 초기부터 크게 불리했다. 특히, 소련제 신형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세에 우리 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 군에는 탱크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탱크의 위력 앞에 군의 방어선을 속절없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38선 방어선을 넘어 서울로 빠르게 진격했다.
이런 전선의 급박한 상황은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정보는 공유되지 않았다. 정부는 국군의 잘 대응하고 있고 서울이 안전하다고만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수도 서울은 점점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6월 27일 국회는 서울 사수 결의안을 가지고 이승만 대통령을 찾았지만, 대통령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배우자가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이미 피난을 떠났다. 그는 대전을 거쳐 대구로 급히 집무실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녹음 방송을 통해 서울이 우리 군이 북한군의 공세를 잘 대응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여기에 국방부 장관과 군 참모총장까지 낙관적인 전황을 소식을 전했다. 언론들도 불리한 전황을 보도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이는 거짓말이 됐다. 국민들의 이런 정부의 발표를 믿었다. 이미 38선을 중심으로 국지전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면전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다. 여기에 지도층마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전쟁의 상황을 더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 당시 효과적인 후퇴와 시민 소개 작전을 전개했다면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자원을 보다 더 지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 서울시민들 상당수가 북한군 치하에 고통받는 일도 막을 수 있었다. 실제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영국 공사도 이에 포함되었다.
이후 북한군 탱크가 서울 북부지역에 다다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서울 시민들은 북한군을 피해 급히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지만, 일시에 몰린 인파로 이동은 제한됐다. 미쳐 후퇴하지 못한 군 병력과 피난민이 함께 남으로 향했다. 6월 28일 새벽 수많은 피난민이 한강교를 건너는 순간, 큰 폭발이 발생했다.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교를 폭파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통보도 없었던 탓에 한강교를 건너던 군 병력과 피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명피해에 대한 위험은 충분히 인지되었지만, 당시 폭파 담당자들은 급박한 상황에 최소한의 안전조치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리 폭파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무고한 생명의 희생에 대한 비판은 상당했다. 이후 폭파 책임자가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지만, 명령권자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전쟁의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전쟁에 대한 전략 부재가 낳은 참상이었다. 문제는 다리 폭파마저 제대로 이루어지 않은 탓에 북한군은 얼마 안 가 다리를 복구하고 빠른 남하를 할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전술적으로 모두 실패한 한강교 폭파였다.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정부는 대비가 부족했고 파죽 시세의 적에게 사실상 패닉 상태에 빠졌다. 개전 이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정부는 급히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은 유엔 안보리 소집을 주도했고 북한을 침략군을 규정하는 한편 유엔군을 구성했다. 미국은 일본 주둔군을 곧바로 한반도로 급파하여 대응했다. 신속한 대응이었다. 이에 대한 배경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여론은 국제 분쟁에 관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전쟁 반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고위층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고 있었다. 미국은 6.25 전쟁을 소련의 침략으로 규정했고 중국의 공산화에 이은 아시아의 공산화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명분을 바탕으로 미국은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미국 내 여론도 이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6.25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세계 민주주의 진영의 수호자로 패권국가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지원이 있었지만, 전쟁 초기 상황은 여전히 불리했다. 한반도에 급파된 미군의 전투력은 정예 북한군에 미치지 못했다. 첫 전투에서 미군은 참패당했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등 수백 명이 전사하고 상당수가 포로가 됐다.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은 과소평가했고 대비가 부족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투병력이 제대하면서 병사들의 전투력 수준도 떨어져 있었다. 점령군으로 일본에 주둔한 군인들의 훈련이나 실전 경험도 부족했다. 이렇게 준비 안된 파병은 패배로 연결됐다.
이에 미군 사령부는 전략적 철수를 통해 전력을 증강하고 반격의 기회를 모색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저지선으로 북한군의 발을 묶고 제공권을 장악해 지속적인 공습으로 북한군에 치명타를 가했다. 북한군의 긴 보급에 문제가 전력이 약화됐다. 개전 초기 14만 명이 이르던 병력은 7만 명 대로 줄었다. 그 사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14만 명으로 증원됐다. 하지만 낙동강을 넘어 반격은 많은 희생이 불가피했다.
이에 미군은 상륙 작전을 통해 적의 보급선을 끊고 적을 영남지역으로 진출한 적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현실화됐다. 애초 이 작전에 대해 미군 최고위층은 반대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총사령관 맥아더는 이를 고집해 관철했다. 인천 상륙은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가 있어 상륙 시간이 제한적이고 펄 지형으로 이동에 제한이 있었다. 그만큼 성공 확률이 낮은 작전이었다.
맥아더는 보급선 차단과 포위 섬멸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천을 최적지로 여겼다. 수도 서울 수복을 빠르게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미군의 작전에 대해 소련과 중국은 예상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인천을 직접 거론하며 경계했고 김일성에게 대비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나름의 대비를 했지만, 미군은 인천 외에 원산, 군산, 평택 등 여러 상륙 예상지에 공격을 하는 기만전술과 역정보를 흘리며 북한군의 선택을 교란하게 했다. 김일성은 전쟁 전체를 읽는 눈과 역량이 부족했다. 김일성은 남한 지역 전체 점령만을 제1과제로 삼았다. 상륙작전에 대한 경고가 수차례 있었지만, 낙동강 전선 돌파가 더 중요했다. 결국, 북한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대비는 느슨했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확률이 1/5,000이라는 우려를 딛고 성공했다.
이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 고립된 북한군의 사실상 포위됐고 궤멸 상태에 빠졌다. 미군과 국군의 반격도 본격화됐다. 이에 북한군은 빠르게 후퇴했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후 전쟁은 미군과 국군의 북진과 함께 전세가 역전됐다. 하지만 승리의 기세는 중국군의 본격 참전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등장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개전 초기 상황은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의 부재를 곳곳에서 드러냈다. 오히려 잘못된 정보로 국민들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대통령의 안위가 중요했지만, 사실상 국민을 솎이면서 먼저 피난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다행히 미국의 빠른 지원과 참전이 전세를 반전시키긴 했지만, 그때까지 우리 정부의 역할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수복 이후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절차를 무시하는 등 파행적인 방법으로 무고한 희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피난하지 못한 서울시민들을 잠재적 부역자로 규정했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에 미온적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너무 대조적이었다.
또 한 편으로는 민족의 비극인 전쟁이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대결구도 속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 두 강대국에게는 그들의 이해관계의 틀에서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시청 내내 안타까움 가득한 순간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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