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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62회] 친일 청산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반민특위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4. 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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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미진했던 친일청산이었다. 친일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자리하고 있다. 일제에 협력해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은 자자손손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 사회의 중요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 대비되며 국민적 공분을 불러왔다. 

이러한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번번이 벽이 부딪혔다. 세대가 바꾸면서 친일청산의 문제는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친일 청산을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48년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는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와 영합한 이들에 대해 법적 응징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2회에서는 이 반민특위의 시작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민특위의 구성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근거로 제정된 특별법에 기초해 구성된 반민특위는 입법적 기능과 함께 사법 기능, 경찰 기능 까기 망라한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해방 후 친일세력에 대한 응징을 기대하는 국민적 여망과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반민특위는 이를 근거로 각 지역별로 조직을 가동하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체포했다. 

 

 



반민족 행위자에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었던 화신백화점의 소유자 박흥식과 악명 높았던 친일 경찰로 일제시대 최고위층 자리에 올랐던 노덕술, 이광수와 최남선 등 문화계 인사까지 사회 각계각층에 분포하고 있었다. 친일 세력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와 협력해 얻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상당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그 활동에 있어 큰 명분이 있었지만, 시작 전부터 계속된 방해에 시달려야 했다. 사회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친일세력들로서는 반민특위가 큰 위협이었다. 친일 세력들을 정권의 중요 기반으로 삼았던 이승만 정권 역시 반민특위에 부정적이었다. 

정권의 비호를 받은 반민특위 방해 활동을 조직적이고 광범위했다. 반민특위를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가 정부의 지원 아래 곳곳에서 일어났고 반민특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게 했다. 그 시위는 반공을 기치로 반민특위를 공산주의 세력과 연결 지어 비판했다. 일제와 결탁했던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은 반공의 가치를 저해하는 일이 됐다. 

이와 함께 반민특위 와해를 위해 공작은 더 치밀하게 이어졌다. 1949년 6월 발생한 경찰의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은 반민특위에 치명적이었다. 당시 경찰은 친일 세력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민특위에 가장 반감을 가진 조직이기도 했다. 이런 경찰은 이승만 정권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무력 수단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경찰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유착되어 있었다. 경찰은 법에 보장된 반민특위 활동을 지속 방해했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이런 경찰의 탄압에 함께 1949년 5월에는 반민특위를 적극 지지하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다수 포함된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그 요지는 이들인 남로당 조직의 지령을 받아 활동한다는 것으로 소장파 국회의원 중 상당수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체포되어 처벌되었다. 이는 반민특위에 있어 정치적 지지세력이 사라지는 일이었다. 

이와 함께 대통령 이승만 역시 노골적으로 반민특위에 반감을 드러내며 직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친일 경찰 노덕술을 비호하는가 하면 반민특위 활동 중단을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반민특위에 대한 반감을 반민특위 방해공작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고 반민특위 활동은 더 힘을 잃었다. 

이에 더해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지지하던 독립운동가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잃고 다수가 암살되면서 반민특위는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특히,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반민특위의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지게 하는 일이었다. 1949년 6월은 이승만 정권의 주도로 반민특위 방해공작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였고 김구의 암살까지 더해지며 정점에 다다랐다. 

결국, 1949년 7월 반민특위와 관련한 특별법이 개정되어 공소시효 단축이 이루어지면서 그 권한과 힘이 줄었고 이에 반발해 다수의 반민특위 구성원들이 사직했고 이어 1949년 9월 반민특위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반민특위가 체포 수사했던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자유의 몸이 됐다. 6.25 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는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마저 폐지하면서 친일청산을 위한 법적 근거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정부 수립 후 활발히 전개되었던 반민특위는 이렇게 허무하게 짧은 역사 기록만을 남기고 말았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친일청산의 실패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했고 이승만 정권에 협력한 친일세력은 반공을 방패막이 삼아 그들의 과거 반민족 행위를 감추고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친일세력들은 일제시대를 살아온 모든 이들이 친일파일 수 있는 친일 공범론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국정운영 경험이 있는 친일 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재 중용론 등의 논리를 앞세워 그들의 반민족 행위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특히, 대표적 친일 문학가인 이광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자신을 버리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에 대한 큰 모독이었다. 

특히, 친일 세력들 다수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한 전범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필요한 돈과 물자를 제공했고 문학가들은 일제를 찬양하고 침략 전쟁에 참전하기를 글을 통해 독려하기도 했다. 친일 세력들은 단순히 이익을 취한 것 이상으로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했다 할 수 있다. 이런 이들이 반성이나 사죄도 없었다. 오히려 반민특위의 좌절로 면죄부까지 받았다. 

반민특위에 의한 친일파 척결 실패는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의 안정을 위해 중요한 대의를 저버렸다. 이승만은 그 스스로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지만, 해방 후 그는 친일파들과 손을 잡고 친일파 척결을 스스로 포기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정의롭지 못한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으로 요청하는 건 애초 무리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7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친일의 청산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되고 있다. 친일 청산은 이제 미완의 과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점에서 반민특위의 좌절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울분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더는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 남은 과제의 친일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역사적 단죄를 제대로 받게 하는 일이다. 이는 반민특위를 좌절과 실패의 기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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