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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73회] 1965년 한일 협정, 막전 막후 이야기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7. 3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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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마무리하고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일제에 의한 한일강제병합과 이어진 식민통치,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교류가 중단되었던 대한민국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에 있어 근간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협정이다. 

하지만 이 협정은 양측의 해석상 차이와 과거사 문제에 인식이 차이를 비켜간 협정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전후 배상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일본의 경제 보복과 함께 그 골이 더 깊어졌다. 이로 인해 한일협정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역사저널 그날 273회에서는 협정 당시 국내외 상황과 그 배경, 최근 알려진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뤘다. 

한일 협정 당시 우리 측 중요 당사자는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정권을 잡은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모색했다. 중요한 명분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통해 낙후된 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한일 협정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 금액을 얼마로 할지 여부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렀다. 

 

 



이런 우리의 자세는 일본에 협상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일본은 패망 이후 전후 배상에 있어 한국을 배제했다. 1952년 전후 배상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대한민국은 배상국에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 중으로 외교역량을 집중할 수 없었다. 또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전승국의 지위조차 얻지 못했다.

이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대한민국은 한 푼의 배상금도 받을 수 없었다. 그 조약을 통해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 그 액수는 많게는 3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들 국가들은 4~5년간의 식민 지배에 따른 배상금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 지배를 통해 인적, 물적, 문화적 수탈을 당했던 대한민국은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그에 따른 배상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후 일본은 대한민국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 식민 지배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식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등 망언을 일삼았다. 해방 후 미국이 주선으로 한일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하긴 했지만,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분명한 인식차로 협상이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비록,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따른 4.19 혁명으로 몰락하긴 했지만, 전후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한일 국교정상화에 있어 일본의 사과와 그에 상응하는 배상금 지급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 또한 단호하게 대응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 역시 그 흐름을 유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으로 2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하였다. 

이런 차이로 지지부진하던 양국의 국교정상화 협상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국가 재건회의가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국가 재건회의 의장 자격으로 박정희 장군은 일본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일본의 정관계 실력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협상의 기반을 다졌다. 박정희 의장은 일제시대 그가 교육을 받았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인맥을 활용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는 일본이 중국 침략 후 세운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 산하의 기관이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많은 나이로 입교가 어려웠지만, 일황에 충성 혈서를 쓰고 입교한 것이 당시 신문에도 기사화되었을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이런 이력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논란에 중요한 단초가 됐다. 

전후 일본의 정관계에는 만주국 출신들이 상당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였다. 현 일본 수상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에서 중요한 요직을 지냈고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투옥되기도 했지만, 1948년 석방되어 일본 정계에 복귀했고 정계의 실력자로 오랜 기간 활약하며 수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전범국 일본의 군사적 행동을 금지하는 일본 헌법을 개정을 주장하기도 한 극우적 성향을 보였고 그의 유지는 현재 아베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와 연결되어 한일 협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일본 측으로서 자신들과 여러 인연이 닿아 있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은 한일 수교협상을 위한 중요한 기회가 됐다. 이후 실무 협상은 김종필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 주도했다. 협상은 비밀스럽게 이어졌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 현안이었지만, 국민들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빠른 결과를 원했고 상당 부분 협상에서 양보가 불가피했다. 마침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이 개입하면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은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 타결이 더 시급했던 대한민국에 불리한 협상이었다. 

우선 배상금의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양국은 협상을 통해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로 배상금 규모가 정해졌다. 식민 지배의 기간이나 피해 정도를 고려하면 우리에게는 크게 부족했다. 그나마도 일본은 협상 결과에 크게 못 미치는 금액을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 금액도 과도하다는 내부 여론이 비등했다. 그 금액은 명복도 배상금이 아닌 대한민국의 독립 축하금 성격임을 강조했다. 이는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나 잘못에 대한 반성을 고려하지 않음을 명백히 했다.

실제 협정문에도 식민 지배와 관련한 조항은 없었다. 과거 대한 제국과 일본 간 잘못된 조약에 대해 무효임을 밝히긴 했지만, 그 시점을 애매하게 하면서 식민 지배의 위법성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우리는 당연히 협정이 모두 무효라는 점을 주장했지만, 일본은 한일협정을 그 시점으로 해석하면서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회피하고자 했다. 이는 지금도 갈등의 큰 축으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협정 곳곳에는 양국의 입장 차가 있는 사안을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의 불씨는 남기고 말았다. 더 충격적인 건 한일 갈등의 중요한 지점은 독도 문제에 있어 우리 협상을 주도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중앙 정보부장 모두 독도를 폭파해서 없애자는 말을 남기면서 우리 영토임을 명확히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런 발언은 사려 깊지 못했고 우리에게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는 외교에 있어 미숙함이 있었고 그들의 목표를 위해 세심하게 협상을 하지 못했다. 일본이 주도하는 협상은 우리 입장을 모두 반영할 수 없었다. 이는 향후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을 어렵게 했다. 최근 일제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 요구에 일본은 한일협정을 통해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이 수탈한 각종 문화재 등에 대한 반화 요구의 근거도 함께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한일협정은 명분과 실리는 모두 잃는 협정이었다. 

그나마 무상 3억 불의 배상금 중 상당 부분은 현금이 아닌 일본의 물자나 용역에 의한 간접 지원이었다. 이런 불리한 협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금액은 대한민국 기간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키는데 활용되어 경제발전에 일정 기여를 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다. 특히,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한 대가는 지금 크게 작용하고 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 정보기관의 문서에서 일본 기업들이 당시 박정희 정부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일협정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면의 협의가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 한일협정 과정에서 국민적인 합의는 없었다. 

당연히 당시에도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 여론은 상당했다. 진보와 보수 진영을 불문하고 정부의 외교에 대한 비판이 컸고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그 시위에는 보수적인 장성들 대학교수들도 있었다. 그만큼 불평등한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여론은 크게 부정적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 발동 등 강압적인 방법으로 반대 여론을 힘으로 제압했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에게 한일협정은 중요한 과제였다. 일정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한일 양국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고 식민 지배에 따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어렵게 하고 있다. 또한, 그때부터 고착화된 일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는 우리나라가 많은 수출을 하고 발전할수록 일본이 돈을 버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었다. 

일본은 6.25 전쟁을 통해 전쟁 후 피폐해진 그들이 경제를 재건하는 결정적 계기로 삼았고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 한일간이 왜곡된 경제구조는 무역 불균형을 지속하도록 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상당한 적자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소재와 설비에 절대 의존하는 경제구조에 기인한 결과물이다. 이는 한일 협정 이후 현재를 살아가는 당시 미래세대에도 부담이 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이 배상을 판결과 위안부 합의 파기 등을 이유로 수출규제 등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된 뒤에는 이런 경제적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잘못 끼워진 한일간이 외교 복원과 전후 관계 설정은 두고두고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그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고 우리 영토가 분명한 독도 문제에 대해 그들의 영토임을 지속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에도 노골적인 방해를 지속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본에 동조하는 세력이 우리나라에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의 불법성을 부정하거나 하는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긍정하는 지식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이 버젓이 그들의 주장을 드러내는 현실이 여전하다. 

역사에 만약을 찾는 건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당시 체결된 한일협정은 많은 아쉬움이 있다. 정권의 필요에 의해 체결된 외교 협정이라는 점과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 협정의 미래 가치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점 등 문제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1965년 한일협정은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우리의 삶과 함께 하는 유산이다. 협정의 불공정성은 우리에게 너무 큰 족쇄가 되고 있고 한일간의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는 물론이고 일본에도 결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안되는 상황은 양국의 공동번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집권층은 이런 한일 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전과 다르다면 우리의 국력이 이전과 달리 크게 발전하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케이팝을 필두로 하는 우리 문화는 이제 전 세계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같이 일본이 경제적 우위를 앞세워 외교에서 우리에게 일방적 우위를 점하던 상황은 점점 변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도 우리는 잘 대응하고 있고 국민 스스로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으로 대응하면서 단호함을 보였다. 일본의 경제 보복을 그들이 기대하는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고 최근 코로나 사태 대응에서 일본은 더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 선진국 일본의 위상은 결코 과거와 같지 않다.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지는 길은 다소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본을 선진국으로 우러러보던 시선을 거둬드릴 시점이 됐다. 

분명한 건 1965년 한일협정은 피해자에게 불합리하고 역사적 인식이 결여된 협정이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물론이고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세대에게도 이 협정은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 역학관계 등을 고려하면 힘든 길이지만, 이제는 한일협정  체제를 뛰어넘는 일본과의 관계 정립을 모색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일본 집권 세력들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서는 정치적 이해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는 단호한 대체가 필요하다. 역사저널 그날 273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큰 과제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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