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중요 장면들을 살피는 교양 예능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 77회에서는 광복절 75주년 특집으로 꾸며졌다. 2회에 거쳐 방영되는 특징 중 첫 번째는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고 두 번째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고수리 학살사건을 살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공군의 존재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로 대표되는 육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은 교과서는 물론이고 영화화되면서 대중적으로 그 전공을 알려졌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했던 공군을 활용한 독립운동은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방송에서는 하늘에서 펼쳐진 치열했던 독립운동을 재조명했다. 공군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역설한 이는 도산 안창호였다.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외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진 안창호는 일제에 의해 기울어가는 조국의 현실에서 조국을 살리기 위해 선진화된 교육의 필요성에 주목했다. 그는 그의 배우자와 함께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 미국의 교육시스템을 경험했다. 20대의 청년이 미국의 어린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안창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미국의 지역신문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바닥부터 미국 생활을 시작한 안창호는 이후 청년 조직을 만들고 미주지역 교민들을 규합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고 임시정부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장관을 지내면서 공군 전력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900년대 초반 라이트 형제에 의해 상용화된 항공기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항공기 산업의 발전은 전쟁에 있어 중요한 무기체계의 변화로 이어졌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을 이루려는 순수한 의도에서 개발된 항공기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고 역설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분명 기술발전의 어두운 이면이 있었지만, 이후 공군력의 증강은 군사력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변화를 안창호는 미국 생활을 통해 알았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임시정부 국방부 장관 역할을 하고 있었던 노백린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희망을 안고 미국으로 향했다. 노백린 장군은 일본 육사를 나와 대한제국의 장군이 되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는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과의 연회장에서 그들을 대놓고 조롱하는 등 기백을 보였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노백린 장군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임시정부에서도 요직을 맡았다. 이어 공군 창설의 임무를 가지고 미국으로 향하게 됐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미국 교포 청년들 중 일부가 이미 비행 조종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안창호가 조직한 교민단체에 속한 청년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노백린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 양성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 노력은 1920년 미국 내 한인 비행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에 필요한 땅과 시설, 그리고 비행기를 구입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런 고민을 또 다른 미주지역 교포인 김종림과의 지원으로 해결됐다. 미국 이민자인 그는 미국에서 벼농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한인 백만장자였다.
김종림은 그의 부를 사회사업과 독립운동과 미주지역 한인들을 지원하는데 환원했다. 이런 김종림과의 만남은 큰 행운이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김종림의 농장이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한인 비행학교는 재정난에 시달리며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한인비행학교 설립과 운영 과정을 함께 이들의 열정과 노력은 이후 대한민국 공군의 든든한 뿌리가 됐다. 이 곳에서 배출된 조종사들은 이후 중국군에서 항일전의 주역으로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의 흐름은 국내에서 중국에서 이어졌다. 조선인으로 일본에서 항공기술을 익혀 최고 조종사로 명성을 떨친 안창남은 1922년 자신의 비행기로 고국의 하늘에서 감격적인 비행을 했다. 그의 비행은 당시 화재가 되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조종사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안창남이었지만, 일제 식민 지배에 신음하는 고국의 현실은 항상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이후 자행된 한 일들에 대 대한 학살사건을 일본에서 목격한 그는 식민 지배 속 조국의 현실을 더 자각하게 됐고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고 비행사로서 일본과의 항일전에도 전공을 세웠고 조종사 양성을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하지만, 1930년 안창남은 25살의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타국에서 그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런 안창남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하늘에서의 독립운동은 김구의 둘째 아들 김신에 의해 이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후 그는 공군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공군 조종사로의 교육을 받았다. 중국군에서 시작된 그의 조종사 경력은 이후 미국에서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됐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변변한 전투가 하나 없었던 대한민국 공군은 6.25 전쟁 발발 이후 미군으로부터 10여 대의 비행기를 인수받아 처음으로 실전에 나설 수 있었다. 김신은 첫 10대로 시작된 공군 조종사로 전장에 나섰다. 대한민국 공군은 그 수는 미약했지만, 그 누구보다 용감했고 곳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김신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 공군 편대는 1952년 1월 북한군의 중요한 보급로인 대동강 철교 폭파 작전을 성공하며 그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이 작전은 미 공군도 수차례 시도에도 성공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일제시대 고단의 시간 속에서 그 씨앗을 터뜨렸고 힘겨운 과정 속에서 선각자들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공군 전력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최근에는 자체적인 공군 전투기 제조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주국방을 위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뿌리는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에 있었다.
이런 영광의 기억과 함께 프로그램에서는 3.1운동 당시 일제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 학살 사건인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고수리 학살사건의 비극도 함께 전달해 주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무력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무고한 국민들 다수가 희생됐고 전 세계적으로 그 죄상이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그 시작은 경기도 화성시 일원에서 전개된 3.1 만세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상당 기간 지속됐다. 당시 화성시는 비옥한 토지와 함께 바다와 접한 환경 속에서 수산업도 발달했다. 하지만, 일제는 농토 확장을 위해 무리한 간척 사업을 강행했고 그 지역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어업을 주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던 어촌 마을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삶의 터전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을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외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통치가 지속되어 그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1 운동 소식은 지역민들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 3월 26일 소규모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28일 사람들이 다수 모이는 장터에서 더 확산되어 참여자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런 만세운동에 지역 일본 경찰은 발포를 하며 대응했고 이는 지역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이에 지역민들을 탄압하던 악질 순사들은 처단하면서 만세운동은 화성지역 전체로 급격히 퍼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경찰 대신 군인들을 현지로 파견하여 무력으로 만세운동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제암리에 침입한 일본군은 시위 주동자를 가려낸다는 명목으로 지역 남성들을 교회당 안으로 모이게 했고 무차별 발포와 방화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마을에서는 30명 가까운 남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을의 부녀자들은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일본군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인근 고수리의 민가에 있던 주민 6명을 학살하는 만행으로 이어졌다. 일본군은 이런 학살과 함께 일대에서 대규모 방화를 자행하여 마을을 초토화했다. 일제는 3.1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화성지역 만세운동의 기세를 꺾고 일본 순사들의 희생에 앙갚음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의 만행은 이후 국내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사진으로 기록되고 해외 언론에 알려졌고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했다. 이에 일제는 당시 진압 책임자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며 처벌을 하는 듯했지만, 그 책임자는 공무수행 과정에서의 과실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제는 그들의 잘못에 대해 일정 사죄가 없었고 그 아픔은 남겨진 사람들과 우리의 몫이었다. 이후 당시 생존자의 증언으로 희생자들의 시신이 수습되고 위령비가 건립되는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그 아픔은 여전히 우리 역사 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우는 구성으로 시간을 채웠다. 광복절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반갑지만,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비롯한 근현대사를 보다 세밀하고 상세하게 대중들에게 알리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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