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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78회] 부끄럽지만, 기억해야 할 친일 매국의 역사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8. 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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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 78회에서는 광복절 특집으로 여전히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친일 매국의 역사를 다뤘다. 일제에 맞서 모든 것을 던져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와 일제의 만행으로 희생된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광복절 특집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매국노들의 이야기가 공분을 불러왔다. 

프로그램에서는 친일파의 유형을 3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일제의 국권침탈 과정에서 적극 협조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이완용으로 대표되는 매국형 친일파들이 있다. 두 번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 이에 감화되어 변절한 지식인들이 주축인 권력 부합형 친일파로 이광수, 최남선이 이에 포함됐다. 세 번째는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 적극 협조하고 지원한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한 전쟁 협력형이 있었다. 이 안에는 일제시대 최대 조선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을 창립자 박흥식이 포함됐다.

매국형 친일파들은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늑약과 이어진 한일의정서, 한일강제병합 조약까지의 과정에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관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매국의 대가로 일제에 의해 귀족으로 신분일 상승되었고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이랬다. 우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가담한 을사 오적은 학부대신 이완용을 위시하여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이에 속했다. 

 

 



1907년 일제의 침략을 세계에 알린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키고 그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체결한 한일신협약에 참여한 정미 7적에는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을 위시하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이 이에 포함됐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 내각의 차관은 모두 일본인들도 채워졌고 군대마저 해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긴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가담한 경술국적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시작으로 순종의 황후 순종효황후의 큰 아버지이나 왕실을 대표했던 윤덕영, 궁내부대신 윤덕영, 탁지부대신 고영희, 외부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가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도 누구보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야 할 인물들이었지만, 일제의 편에 서서 국권침탈에 앞장서는 매국행위를 했다. 

세 차례 협약에 모두 참여한 이완용은 대표적인 매국노로 기억되고 있다. 이완용은 소년 시절부터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고 신학문을 외교관으로 조정에서 활약했다. 애초 이완용을 미국의 근대화된 문물에 동화된 친미파로 독립협회에서 중요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친러파로 변신하여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하는 등 일제에 대항하기도 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누구보다 열성적인 친일파로 변신했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이완용에게 애국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매국 행위를 통해 이완용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때 축적한 그의 부는 자자손손 이어졌다. 그가 매국을 통해 얻은 전국 각지의 토지는 현금화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당시 이완용의 땅은 여의도 면적에 8배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의 친일 행위로 축적한 토지 중 일부를 국가에 환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환수된 토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어렵게 환수된 토지의 일부는 소송을 통해 자손들에게 반환되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이완용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상당했다. 

이완용은 1909년 20대 청년 이재명의 거사로 척살될 위기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거사의 주인공 이재명은 25살의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긴 이완용은 1926년 천수를 다 누리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친일파답게 당시 총독부는 왕에 준하는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완용은 그의 악행을 두려워해 전국 각지에 가묘를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묘를 지키려 했지만, 훗날 그의 묘는 크게 국민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의 악행에 대한 단죄를 하지 못한 건 우리 역사의 큰 오점이 아닐 수 없다. 

프로그램에서는 이완용 외에 또 다른 매국노들에 대해서도 그 행적을 찾아 나섰다. 특히, 이완용에 가려진 매국노 윤덕영의 행적은 큰 분노를 불러왔다. 윤덕영은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도 대표적인 외척이었다. 그는 일제의 한일강제병합 조약 체결 당시 순종의 옥쇄를 품에 안고 이를 막아냈던 순종 효황후로부터 옥새를 빼앗아 이완용에 전달하는 혁혁한 공(?)을 세운데 이어 대한제국 왕실이 일제에 협력하는 데 있어 앞장섰다. 일제는 한일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 왕실에서 일왕에게 알현할 것으로 요청하였지만, 고종황제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고종은 그에 대한 각종 압력과 회유에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윤덕영은 고종의 각종 약점을 파고들어 이를 관철시켰고 순종의 일왕 알현이 성사됐다. 이는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또한 윤덕영은 안중근 의사에 사살된 이토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업에 앞장서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친일의 행적을 쌓았다. 윤덕영은 이런 매국의 대가로 이완용 이상의 부를 차지했다. 현 종로구 옥인동은 그의 저택과 토지가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 크기는 이완용이 종로에서 받은 땅의 몇 배에 이르렀고 그곳에는 유럽 왕궁 이상의 대저택이 지어졌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저택은 화려함을 극치였다. 이곳에서 윤덕영은 최고의 사치를 즐기며 평생을 호의호식했다. 그의 동생 윤택영은 순종효황후의 아버지로 그 역시 매국의 대가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빚쟁이들에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는 총독부에서 그의 빛을 대신 갚아주는 조치를 하기도 했지만,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고 빚쟁이들에 쫓겨 해외에서 객사하기에 이른다. 이 또한 매국의 역사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광수의 변절과 친일 행위도 한숨이 나오게 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을 창작한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였고 한때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광수는 3.1 운동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 실패하고 이후 일제의 무난 통치를 대신한 문화통치 기간 노선을 친일로 노선을 변경한다. 그는 민족개조론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이 애초부터 열등하다는 주장을 했고 이는 일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이광수는 1930년대 일제가 벌인 전쟁에 징용과 징병을 적극 참가할 것으로 주장하는 작품을 수없이 연재하며 일제의 부역자가 됐다. 그는 그의 문학가로서의 재능을 일제가 국민들을 핍박하고 수탈하는 데 있어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이용했다. 해방 후 이광수는 작품을 통해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그의 친일 행위를 변명했지만, 그의 친일 작품은 엄연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더 안타까운 건 3.1독립 선언서를 기초했던 최남선 역시 변절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우리 독립의지를 담은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던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변절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들과 함께 이완용의 외조카로 친일 자본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한상룡과 박흥식은 일제의 전쟁에 경제 재정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로 친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한 건 해방 이후 이런 친일 매국노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해방 이후 3년간 이어진 미 군정 기간 미군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일제 치하에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던 친일 인사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해방 후 단죄 받아야 할 인사들은 대부분 요직에서 그들의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 사이 친일에서 친미로 돌아서며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에 특별법을 제정해 구성된 반민특위는 초기 활발한 활동을 통해 수백명의 친일 반민족 혐의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시작했지만, 친일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던 경찰의 노골적 방해와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포함한 국회 간첩사건 등으로 그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친일 세력들은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았고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 단죄는 광복 75주년을 맞이한 시점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시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고 그 지위는 그 자손대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자손들은 그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한 탓에 가난을 대물림 받는 일이 많았다. 친일하면 3대가 잘 살지만, 독립운동을 하며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우리의 현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친일행위자들은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제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민족을 배반한 자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나라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어렵다. 정의가 사라진 나라에서 국가적 위기에 국민들의 동참을 구하는 건 무리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기록하고 전하는 노력만이라도 이루어지고 성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친일 반민족 행위는 분명 부끄럽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이는 이념과 진영의 논리로 재단될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남은 친일에 대한 잔재를 해소하지 않은 채 일본에 역사적 반성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광복절에는 친일청산이라는 화두가 사라질 수 있을지 아직은 그 길이 너무 험난해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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