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5주간에 걸쳐 유럽의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 진출로 대표되는 대항해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발견의 시대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15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교역을 활성화하던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그 이전 중국 명나라 영락제 때 정화라는 인물이 인도를 거쳐 아랍, 아프리카 연안에 이르는 대항해를 한 일이 있고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사고라는 부정적 주장도 존재한다. 이런 이견을 떠나서 대항해 시대는 기존 유럽과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직접 교역을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서구의 사회시스템은 국제적인 표준이 됐다. 반대로 아메리카와 아시아는 기존의 사회시스템이 무너지고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이후 대항해시대는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시대로 가는 시작점으로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크다.
신항로 개척의 중요한 이유는 동방과의 직접 교역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인도는 미지의 세계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중국 원나라에서 오랜 세월 살다 돌아온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등의 여행기는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동경을 더 강하게 했다. 그곳에서 가져오는 물건들을 대부분 고가에 거래가 됐고 교역을 주도하는 상인들에게는 막대한 부를 안겨줬다. 이전에는 실크로드로 불리는 육로를 주 교역로로 삼았다. 그 거리도 멀었지만, 그 중간중간 척박한 사막과 초원, 각종 위험을 견뎌야 했다. 목숨을 건 여정이었지만, 성공하면 그에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몽골이 유라시아 지역을 장악할 때까지만 해도 육로로의 교역은 한층 더 활발하게 전개됐다. 몽골제국의 거대한 플랫폼 안에 아시아와 유럽이 함께 하는 구조였다.
이후 몽골제국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거대한 이슬람 제국 오스만튀르크가 들어서면서 육로 교역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오스만튀르크는 동서양의 자유로운 교역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이에 유럽인들은 동방과의 직접 교역이 어려워졌다. 거래가 된다 해도 그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특히,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후추 등 향신료는 그 가치가 폭등했다. 인간의 최고 즐거움 중 하나인 먹는 즐거움을 더해줄 후추가 귀해지면서 후추는 귀족들과 부자들의 전유물이 됐고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만약, 후추를 동방에서 직접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수익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부에 대한 욕망은 동방으로의 직업 교역을 위한 바닷길을 찾도록 하는 큰 요인이 됐다.
하지만 그 길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지중해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야 하는 일이었고 전혀 가지 못한 대양으로 나가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단순한 호기심과 부에 대한 욕망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배가 필요했다. 막대한 자금도 조달해야 했다. 사적 영역에서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국가적인 지원도 의지가 필요했다. 그 모험에 기꺼이 나서는 유럽 국가가 등장했다.
이베리아반도 끝에 자리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두 나라는 유럽의 변방에 있어 지중해 무역에서는 다소 소외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슬람의 지배를 장기간 받으면서 이슬람 세력을 밀어내기 위한 전쟁을 장기간 치러야 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한 재원이 이슬람과의 전쟁에 다수 소모되면서 국가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15세기로 접어들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반도 밖으로 밀어냈고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국가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여기에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두 나라는 대외 복음 전파라는 중요한 명분도 대외 진출의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긴 전쟁의 대상이었지만, 이슬람으로부터 습득한 각종 항해술과 천문, 지리 지식과 기술 등도 대외 진출에 대한 욕망을 키우게 했다. 이와 함께 유럽의 패권 경쟁에서 밀린 상황에서 강한 나라를 위해 대외교역을 위한 부의 창출은 나라의 생존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이 먼저 나섰다. 포르투갈은 국가 차원에서 신항로 개척을 위한 지금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에 필요한 인재들을 모았다. 이미 유럽에서는 신항로 개척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그에 필요한 지원을 하는 포르투갈은 기회의 땅이었다. 포르투갈은 원거리 항해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고 각종 지식과 기술을 총망라해 대양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포르투갈의 목적은 후추의 생산지 인도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수차례 실패를 경험했고 아프리카 서쪽 해안으로 진출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실패의 경험 속에서 신항로 개척에 대한 노하우가 축적되고 항해술로 발전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맺어졌다. 1497년 7월 리스본을 출발한 탐험가 바스쿠다가마의 선단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지나 1년여의 항해 끝에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을 시작한 이후 80여 년이 지난 이운 성과였다. 바스쿠다가마 일행은 인도와의 직접 교역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유럽의 상품들은 조악하고 인도 상인들에게 매력이 없었다. 여기에 인도 지역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위협이 극심했다.
바스쿠다가마 일행은 정식 교역을 위한 협정을 맺지 못하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다시 1년여의 항해를 거쳐 바스쿠다가마 일행은 포르투갈로 귀환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선원들이 비타민 부족이 원인인 괴혈병에 시달리며 사망했고 4척의 배중 2척만이 돌아왔다. 하지만 신항로를 개척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여기에 소량이었지만, 캘리컷에서 구입한 후추 등 향신료와 각종 물품들은 항해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그들 항해에 투자한 이들은 수십 배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고무된 포르투갈은 본격적으로 인도를 포함한 동방 항로 개척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인도를 물론이고 한 때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마카오, 일본에도 진출했다.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전해진 신무기 조총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중요한 무기로 활용됐고 조선군에는 공포의 대상이 됐다. 대항해시대의 나비효과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에 영향을 줬다.
이렇게 인도항로 개척에서 포르투갈이 앞서가자 인접 국가 스페인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항로는 포르투갈이 극비리에 관리하고 있어 알기 어려웠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콜럼버스다. 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는 일찍부터 동방견문록 등을 통해 동방에 대한 지식과 함께 지리와 항해와 관련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동방과의 직접 교역이 큰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블루오션임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다. 그는 포르투갈이 개척한 대서양과 아프리카를 경유하는 항로 대신 서쪽으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애초 그는 포르투갈에 먼저 의사를 타진했지만, 이미 신항로 개척을 진행하고 있는 포르투갈은 그 제안을 외면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향했다. 마침 스페인은 이슬람과의 전쟁을 승리하고 단일 국가를 형성하며 대외 진출을 모색했다. 콜럼버스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이미 그 시대에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 점에 착안해 서쪽으로 항해를 한다면 더 빨리 인도에 다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연안과 달리 전혀 알지 못하는 바다로 향해야 하는 위험이 있었다. 성공 확률이 극히 낮았다. 처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사벨 여왕에 의해 채택됐다. 콜럼버스는 이후에도 스페인의 국가 정비 기간인 수년간을 더 기다린 끝에 바다로 나설 수 있었다.
콜럼버스의 함대는 서쪽으로 긴 항해를 거듭한 끝에 육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의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이었다. 콜럼버스는 그 땅을 인도의 일부로 여겼다. 하지만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는 물론이고 당시 유럽은 아메리카 신대륙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런 신대륙의 존재를 모르고 설계된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은 애초부터 설계가 잘못되어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런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죽는 날까지 그가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믿었다. 그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인디오로 불렸고 카리브해 일제는 서인도 제도로 불리게 됐다.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이름은 그곳이 신대륙임을 밝혀낸 이탈리아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에 유래됐다. 또한, 훗날 연구에 의해 북미 대륙에는 이미 바이킹들이 정착촌을 건설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즉, 유럽인들은 이미 신대륙에 다다른 적이 있지만, 그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의 대외 진출 영역을 크게 확대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애초 인도의 후추와 아시아의 금과 귀중품을 위한 항해였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는 아메리카가 존재하고 있던 문명과 원주민들에게는 큰 비극의 시작이었다. 교류와 협력을 위한 신대륙의 발견은 이후 정복과 수탈, 강압적 통치로 변질됐다.
유럽의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3대 문명인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을 정복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그들의 목적은 그 문명의 기록이 아닌 금이었다. 여기에 그들이 지배하는 원주민들은 노예화됐고 극심한 차별과 착취 구조 속에 놓이게 됐다. 여기에 유럽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 각종 감염병은 원주민들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일각에서는 거의 90% 이상의 원주민들이 감염병 등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만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인적 물적 피해는 극심했고 고대의 찬란했던 문명 역시 보전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에 콜럼버스는 최근 위대한 탐험가가 아닌 아메리카 대륙에 비극을 몰고 온 인물로 비판이 대상이 되고 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수탈의 장소가 됐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된 은은 이후 유렵의 아시와의 교역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됐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의 문물은 중국과 인도에 미치지 못했고 교역물품도 보잘것없었다. 더 많은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원하는 물품이 필요했고 은이 그 기능을 했다. 유럽의 상인들은 은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도자기, 비단, 차 등을 인도에서 향신료와 면화 등을 수입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은 플랜테이션 농업의 중심지가 됐다. 아메리카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자본이 결합해 환금성이 뛰어난 농산물을 재배하는 이 농업은 대항해 시대 당시 시작됐다. 지금도 인건비가 싼 지역에 공장이나 농장을 조성하고 생산을 하는 산업구조가 존재하고 있지만, 당시는 철저히 착취구조에 있었다. 플랜테이션 농업의 주요 작물은 당시 유럽의 기호식품인 설탕을 위한 사탕수수 재배였다. 농장에서는 사탕수수 재배와 수확, 설탕 재조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공정은 대부분은 사람들 손으로 이루어졌고 노동집약적이었다.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다. 그 농장이 커지면서 현지에서 인력을 충원할 수 없었다.
유럽은 아프리카에 눈을 돌렸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은 농장에 대규모 이주시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가 상관없이 이주를 당했고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노예무역이 활성화됐다. 아프리카인들은 인권이 철저히 무시된 채 거래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짐짝처럼 배에 실려 농장으로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팔려갔다. 비인격적 대우는 보편적이었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움직일 수도 없고 쇠사슬로 묶인 채 노예선에 실려가는 이들의 그림은 당시 노예들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 노예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유럽의 몇몇 지식인들의 노예제도에 대해 받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막대한 부의 원천이 노예제도는 대항해 시대 자리를 잡았고 수백 년 기간 존속됐다. 유럽에서 시작된 보험업의 시초가 노예들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시작됐다는 점은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다.
이 과정에서 인종의 우열이 정해졌다는 인종주의가 서구사회에 자리를 잡았고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씨앗이 뿌려졌다.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들은 철저히 피해자였지만, 열등한 존재로 격하되고 말았다. 유럽에서는 이후 자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그곳이 세계 표준이 되는 통치체제가 됐지만, 그들의 민주주의 발전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칸인들은 없었다. 훗날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아픈 역사를 만들며 대항해시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하며 본격화됐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아프리카를 경유하는 신항로 대신 남아메리카 남단을 경유해 태평양으로 향하는 신항로를 개척했다. 스페인의 탐험가 마젤란은 태평양을 거쳐 필리핀에 도착했고 필리핀은 이후 스페인의 아시아 지역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이는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유럽의 아시아 지역 교역 거점은 점점 확대됐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강력한 경쟁 체제를 구축하며 아시아 지역 해상무역을 장악했고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특히,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불리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도 했다.
이들의 독주는 후발주자의 등장으로 큰 도전에 직면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대항해 시대 새로운 강자가 됐다. 중부 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는 작지만 강한 나라의 전형을 보이며 해상무역에서 큰 성과를 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열악한 환경과 강대국 틈에서 시달려야 하는 지리적 불리함이 있었다. 또한,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독자적인 발전이 어려웠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장기간에 걸친 독립전쟁을 하면서 대외 진출을 모색했다.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대외 진출의 필수적이었다.
네덜란드는 초기 기밀이었던 포르투갈의 아시아 항로를 입수해 해외 항로 개척을 했고 인도네시아에 그들의 무역 거점을 마련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인도네시아는 유럽의 대표적 향신료인 후추보다 훨씬 가치가 큰 육두구 무역을 독점했다. 후추는 점점 공급이 과잉되고 유럽에서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네덜란드는 귀족층의 수요가 많은 향신료를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네덜란드는 지금의 주식회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무역을 위한 자금을 조달했다. 초기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신분이나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투자가 가능했고 주식을 보유할 수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안정적으로 투자금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무역의 성과를 주주들에 배당했다. 배당비율은 수십 프로를 넘었다. 당연히 막대한 자금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 몰렸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에 무역 거점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면서 힘을 실어줬다. 동인도 회사는 초법적인 권한으로 무역을 할 수 있었고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이는 네덜란드의 부로 이어졌다.
이후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너뜨리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영국과의 오랜 전쟁에서도 밀리지 않았고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 그들의 아시아 지역 무역로를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미국 내 그들의 영역이었던 그 어원이 뉴암스테르담인 뉴욕을 영국에 넘겨줬다. 뉴욕은 이후 영국의 중요한 미국 대륙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신흥 무역강국 네덜란드는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영국은 각지에 그들의 식민지를 조성했고 식민지의 물적,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 패권국가로 자리했다. 특히,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식민지와 피식민지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애초 영국은 인도로부터 향신료 외에 면직물을 다수 수입했다. 인도의 면직물은 기존 유럽의 양모를 기반으로 ㅎ는 모직물보다 훨씬 통기성이 좋고 착용감이 우수했다. 또한, 인도 장인들의 기술이 더해져 옷의 품격도 있었다. 심지어 모직물에 비해 가격도 저렴했다. 이에 면직물은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보편화됐다. 이는 기존 모직물 산업 전체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기존 모직물 산업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의회 차원에도 면직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는 노력도 했지만, 대중의 기호가 변화한 상황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에 영국은 인도의 면화를 값싸게 수입해 자극 공장에서 면직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장인들의 수공업에 의존하던 면직물의 생산은 영국에서 자동화 공정이 개발되면서 그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여기에 석탄의 발견과 이에 편승한 증기기관의 발명은 면직물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에 영국은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인위적으로 파괴했다. 면직물 장인들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등 비인권적 일을 서슴지 않으며 인도의 면직물 산업 기반을 잃게 했다. 이후 인도는 저렴한 면화 공급지로 전락했고 영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철저히 영국의 필요에 의해 이용당하는 식민지의 모습이었다.
이런 행태는 영국을 포함해 유럽 국가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전반에서 일어났다. 피식민지 국가들은 지속적인 수탈과 탄압 속에 놓였다. 독자적인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없었고 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커졌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식민지 확보 경쟁에 나섰다. 대항해 시대를 넘어 제국주의 시대로의 변화였다. 대항해시대부터 나타난 힘의 논리가 더 강하게 전 세계를 지배했고 약자는 철저히 강자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됐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이 그랬고 대항해 시대까지만 해도 앞선 문명국이었던 인도와 중국도 비운의 역사를 써야 했다.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던 일본은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를 본받아 빠르게 산업화에 성공했고 제국주의의 주체가 되면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대동아 공영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을 앞세워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대항해 시대의 유산은 유럽에게는 축복과도 같았지만, 여타 지역에는 재앙이었다. 그때 생겨난 인종주의는 여전히 서구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때 발생한 경제적 부의 차이는 서구와 여타 대륙의 부의 불균형으로 남아있다. 서구 국가들은 대항해시대부터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했고 앞선 문물과 사회시스템을 만들었다. 선진국이라 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의 부의 원천은 피식민지 국가들로부터 수탈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대항해시대를 모험과 대발견의 시대로 칭송할 수 없게 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각종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거 식민 지배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된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에 가톨릭 교회가 이를 막도록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교세 확장을 이유로 지배자들에 협력하는 등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발언을 했다. 최고 종교 지도자의 발언은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과거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는 건 절대 아니다.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고증과 이를 잘 알리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서구사회의 시각으로 기록된 대항해시대 역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다.
글 : jihuni74
'문화 > 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지리산 15, 16회] 탐욕과 이기심이 부른 비극, 다시 찾아온 일상의 평화 (7) | 2021.12.14 |
---|---|
[드라마 지리산 13, 14회] 또 다른 용의자 등장, 끝나지 않은 30년 전 비극 (11) | 2021.12.08 |
[드라마 지리산 11, 12회] 압축되는 용의자, 사건을 관통하는 아픈 과거사 (8) | 2021.12.01 |
[드라마 지리산] 후반부, 보이지 않는 연쇄 살인범과의 진짜 대결 시작될까? (14) | 2021.11.22 |
[드라마 검은 태양 11, 12회] 괴물이 되기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이룬 정의 구현 (7) | 2021.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