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에서 대왕의 칭호를 받은 임금은 2명이 있다. 조선시대 한글을 창제하고 문화, 과학, 예술을 발전시키며 조선의 전성기를 열었던 세종대왕과 중국과 대결하며 고구려의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이 그들이다.
이 중 광개토대왕은 지금은 우리 역사의 현장이 아닌 드넓은 만주, 요동 지역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대결하는 시절 고구려가 그 주도권을 잡게 했던 임금이었다. 광개토대왕은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 외에 내치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군주였다. 그의 업적은 만주에 남아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비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그의 아들 장수왕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공고히 하고 고구려의 영역을 만주, 요동을 넘어 한강 이남으로까지 확장한 남진 정책을 펼친 군주였다. 그는 역사 기록에서 421년부터 491년까지 무려 79년을 재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이 기간 고구려는 최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이한 건 장수왕은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으로부터 물려받는 만주, 요동의 영토를 지키면서 그 바탕 위에 비옥한 토지의 한강 유역을 더했다. 장수왕의 치세 기간 고구려는 나라가 건국된 이후 계속된 중국과의 대결이 거의 없었다. 장수왕은 중국과의 대결을 지양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 바탕 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진 정책을 활발히 할 수 있었다.
이에 장수왕을 평가함에 있어 그의 뛰어난 외교 능력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장수왕의 대중국 외교는 크게 다자, 균형, 실리 외교로 요약된다. 장수왕은 당시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중국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했다. 중국은 서역까지 세력을 떨치던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소설 삼국지의 배경이 된 조조의 위나라, 유비와 재갈공명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가 대립하던 삼국시대를 겪었다.
중국의 분열 시기는 위나라의 재상이자 실권자 사마의의 아들대에 이르러 통일을 이룬지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됐다. 이후 중국은 과거 위나라가 있었던 화북지역은 다수의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난립하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과거 오나라의 영토였던 남쪽 지역은 한족들이 세운 나라들이 왕조를 교체하며 대결하는 시기, 남북조 시기였다. 중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혼돈의 시기였다.
고구려는 이 시기 그들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북조의 중국 왕조들과 대결 관계를 형성했다.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화북 지역의 강자 후연과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결했고 고구려가 후연을 밀어내고 요동지방을 그들의 영토로 확보했다.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후연은 지역의 패권을 잃었고 중국 화북지역은 새로운 강자 북위와 그 북쪽에 자리한 유연, 새롭게 대결구도는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과 고구려 사이에 또 다른 왕조 북연이 있었다. 북연은 후연이 멸망한 이후 새워진 왕조로 고구려 계 인물인 고운이 첫 왕위에 올랐고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사실상 고구려의 제후국에 가까운 친 고구려 국가였다. 북연의 존재는 고구려에게 중국의 왕조들과 직접 대결을 피하게 하는 일종의 완충지역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 북연이 세력을 확장하는 북위에 나라의 존립을 위협받으면서 고구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북위의 위협에 대응하기 어려웠던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밀서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더 나아가 상황에 따라 망명을 받아들여 즐 것으로 함께 요청했다. 435년의 일이었다.
장수왕으로서는 친 고구려 국가의 왕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지만, 이는 중국의 신흥 강국 북위와의 대결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전성기에 있다고 하지만, 중국 왕조와의 전면전은 분명 부담이었다. 고구려는 남진 정책을 지속 추진하면서 백제, 신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왕조와의 전쟁은 남. 북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장수왕은 일단 군대를 파견해 북연의 왕 풍홍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예상과 달랐다. 고구려 군은 북위의 군대보다 먼저 북연의 수도 황룡성에 진입했고 도성안의 각종 재화와 피난민, 북연의 왕 풍홍을 이끌고 철수했다. 북위군은 이런 고구려 군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군은 북위군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면서 실리는 취했고 북연의 영토는 북위군이 점령하도록 했다.
이렇게 확보한 수만명의 북연 피난민들은 요동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은 고구려 국력에 큰 보탬이 됐다. 이에 북위는 사신을 보내 풍홍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장수왕은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잘 받들겠다'라는 애매모호한 외교 수사로 답신하며 풍홍의 송환을 사실상 거부했다. 언뜻 북위 왕의 권위를 높이는 표현이었지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에 북위의 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계획했지만, 북위의 북쪽에는 또 다른 이민족 나라 유연이 있었고 남쪽의 송나라도 신경 쓰이는 상황 속에 전쟁을 쉽게 결행할 수 없었다. 만약, 고구려가 이들 나라와 연합한다면 북위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었다. 고구려는 이런 중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대처했다. 그러면서 의리를 지킨 군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고구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이었지만, 그는 북연의 부활을 계속 꿈꾸고 있었다. 그는 요동을 발판으로 다시 부흥의 기회를 노렸지만, 고구려가 이를 묵인할리 없었다. 또한, 그는 더는 북연의 왕이 아니었고 고구려 변방의 작은 자치구의 왕 정도로 대우받았다. 한때 중국의 한 왕조를 이끌었던 그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풍홍은 고구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풍홍은 중국 남쪽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시대 송나라와 구별해 유송이라고도 불리는 유송으로서 망명을 추진했다. 유송으로서는 중국 왕조의 왕을 받아들여 중국 내 대립 구도에서 명분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풍홍을 따르는 북연 유민들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는 고구려에는 큰 위협이었다. 자칫 백성들과 영토를 잃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수왕은 또 다른 큰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장수왕은 풍홍의 망명 시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풍홍을 붙잡아 그와 그의 아들들을 참수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있었던 중국 왕을 처형한 사건이었다. 438년의 일이었다.
이는 유송과의 관계 악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요동에 진출한 유송의 군대는 풍홍을 참수한 고구려 장수를 살해하는 등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고구려가 대응해 유송의 장수들을 붙잡아 가두면서 전쟁의 위험이 커졌다.
다시 한번 결단이 필요한 순간, 장수왕은 전쟁보다 외교적 해법을 모색했다. 장수왕은 유송의 장수들을 유송으로 보내면서 그들의 무단으로 그들의 결정에 따라 고구려의 장수를 살해했다는 죄목을 달았고 그 처결을 유송이 하도록 했다. 이를 통행 풍홍 살해 이슈는 묻히고 유송에게 외교적 부담이 더해졌다. 유송의 장수들은 월권을 한 셈이 되고 만약, 왕명을 받든 것이라면 이는 고구려에 대한 침략 행위가 될 수 있었다. 장수왕은 유송에게 선택의 공을 넘겼다.
이에 유송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피하는 결정을 했다. 고구려가 중국 북조의 국가들과 연합해 그들과 대립한다면 유송 역시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연의 왕 풍홍은 고구려와 중국 남북조 왕조 사이의 외교 줄다리기 사이에서 희생양이 됐고 북연 역시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외교전을 통해 고구려는 중국 남. 북조 왕조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과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 고구려가 동북아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국가로 그 위상을 높였다.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중국 국가들로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고구려가 어느 한쪽에 기운다면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고구려와의 원만한 관계는 그들 안보에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고구려 역시 막대한 국력 손실이 일어날 수 있는 중국 왕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실리를 챙겼다. 중국 왕조의 책봉을 형식적으로나마 받아들였고 조공 외교를 통해 중국의 문화와 물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중국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혼란기였지만, 고구려는 그 혼란을 피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장수왕의 균형 외교의 결과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장수왕 치세 기간 평화시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력을 남진 정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철저히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했고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은 등거리 외교, 다자 외교, 균형 외교를 통해 나라의 안보를 튼튼히 했다. 고구려는 중국의 왕조들에게는 그들의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변수였고 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는 존재였다. 고구려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외교술을 발휘했고 그런 외교를 할 수 있는 국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장수왕의 외교는 오늘날 강대국들 사이에 자리한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맞서는 접점에 자리하고 있고 그들 세력의 대결에 있어 최일선에 있다. 그 때문에 한반도는 오랜 세월 전쟁이 빈번히 일어났고 지금도 긴장감 가득한 대립구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우리나라에 다자외교, 균형 외교는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장수왕 치세 고구려는 국제 정세를 냉철히 파악하고 대응했다. 장수왕은 실리를 위해 중국의 왕을 참수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중국 왕조에 저자세 외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알고 대처했다. 그러면서도 장수왕은 나라의 품위와 품격을 잃지 않았다.
이를 통해 장수왕의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국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장수왕은 단순히 수성만을 했던 왕이 아닌 뛰어난 지략을 가진 왕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jihuni74,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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