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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는 문명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만든 이후 분쟁이 이어졌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전쟁은 역사에 남을 많은 영웅들을 만들었다. 그 희생자들이 흘린 피 위에 선 영웅들이라는 점은 분명 비판 받아야 하지만, 역사는 그런 전쟁 영웅들을 중심으로 전쟁사를 기록한다. 

이 전쟁 영웅 중 우리 현대사와의 깊은 연관이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두 인물이 있다. 미국의 장군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5성 장군, 원수의 자리에 올랐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 맞서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전쟁 영웅으로 큰 칭송을 받았고 6.25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던 맥아더는 많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도 전쟁 영웅으로 자리하고 있다. 

두 인물은 침략자들과 맞선 군인이었지만, 성장 배경과 성격, 지휘 스타일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맥아더는 강하 카리스마와 신념을 가진 강한 리더십을 보였다면 아이젠하워는 소통과 조화, 포용의 리더십으로 연합군을 이끌었다. 

맥아더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가였고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집안의 큰 지지와 지원 속에 그는 군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그의 강력한 후원자 겸 나쁘게 말하면 감시자로서 그의 교육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다. 심지어 맥아더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사관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그의 교육 상황과 사생활까지 살폈다. 맥아더는 이런 어머니의 열성에 반발하기보다는 순응하는 학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

 



맥아더는 육군 사관학교를 빼어난 성적으로 졸업했고 군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군 요직에 올랐고 1917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유럽에 파병된 미국 사단을 지휘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유럽 전선에 참전하는 미국의 구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 각 주의 병력을 포함하는 파병군 구성을 제안하는 등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전장에서는 최 전선에서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런 전공을 바탕으로 맥아더는 젊은 나이에 장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철모 대신 정복 모자를 고집하는가 하면 남다른 패션으로 나서며 주목을 받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하는 일이었고 맥아더는 군인 이전에 정치인의 면모도 보였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최연소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오르는가 하면 50살이 채 안 된 나이에 4성 장군이 돼야 할 수 있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진급하며 화려한 군 생활을 지속했다. 

이런 맥아더의 군 이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1932년 일어났다. 그 해 수많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모여 정부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그들은 참전 보상금의 조속한 지급을 요구했다. 참전 용사들은 당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대부분 사회적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전쟁 참전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트라우마 치료 등 사후 관리 역시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보너스 아미, 보너스 군대로 불렸다. 그들의 요구는 무리한 게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시기로 정부 재정은 크게 부족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참전 용사들에게 보상을 하기 어려웠다.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보너스 군대의 시위도 점점 강렬해졌다. 

 

 

인천 상륙작전 맥아더

 



이에 미국 정부는 시위대의 강제해산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경찰이 나섰지만, 상황이 진정되지 않았고 군대까지 사위대 해산에 나섰다. 맥아더는 이 시위 진압군을 지휘했다. 맥아더의 군대는 한때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였던 보너스 군대를 힘으로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를 밀어낸 이후에는 그들의 모여 살던 거주지까지 파괴했다.

이는 당시 미국 후버 대통령의 명령 이상의 조치로 맥아더의 독단적 행동이었다. 맥아더는 시위대 배후에 미국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 세력이 있다고 여겼고 필요 이상의 강경 진압을 했다. 훗날 이 시위대는 대부분 퇴역 군인이었고 그들의 지원하는 사회활동가들로 구성되었음이 밝혀지면서 맥아더는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맥아더의 보너스 군대에 대한 강경 진압 지휘는 그의 독선적이면서 냉철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 미국은 미국 역사 유일의 4선 대통령에 올랐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뉴딜정책 등 과감한 재정 정책 등으로 미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군 예산 삭감을 시도했다. 이에 맥아더는 강력히 반발했고 대통령과의 언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육군참모총장의 사임까지 고려하는 등 강경하게 대통령과 맞섰다.

이는 군인 이전에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이는 그의 존재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했지만, 대통령과의 대립은 그의 군 내에서 입지를 좁히는 일이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대립하는 건 일종의 항명이라 할 수 있었다. 군인 맥아더에게는 큰 위기였다. 

이런 맥아더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 미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준비하는 아시아의 필리핀에서 맥아더를 새롭게 창설한 군 고문으로 초빙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필리핀의 군 창설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에 맥아더는 미국 생활을 정리했다. 이후 맥아더는 필리핀 군 원수로 취임하며 엄청난 권한을 행사했다. 

이런 맥아더의 필리핀행에 있어 핵심 참모로 함께 한 인물이 아이젠하워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인정한 군 행정가였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부관으로 필리핀으로 함께 향했다. 아이젠하워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명문가 출신의 맥아더와 달리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입학 이후에도 성적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여기에 부족한 배경 등으로 그는 군에서도 항상 진급에서 뒤처졌다. 진급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야전군 지휘 기회도 얻지 못했다. 그는 만년 소령으로 긴 세월을 보냈다. 맥아더의 눈에 들어 필리핀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소령으로 군 생활을 접을 수도 있었다. 필리핀은 맥아더는 물론이고 아이젠하위에게도 기회의 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아이젠하워

 



하지만 필리핀에서 두 사람의 공존은 원만하지 않았다. 맥아더의 독선적이면서 지나치게 자기애가 강한 성격은 아이젠하워와 맞지 않았다. 맥아더는 필리핀 정부와도 수시로 갈등을 빚었고 아이젠하워는 그 중간에서 이를 수습하고 해결하는 일을 떠맡았다. 맥아더가 필리핀 정부와의 협의 없이 군사 퍼레이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더 커졌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 복귀의 명분으로 유럽에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이유로 들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1939년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을 이끄는 히틀러가 전쟁의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그 위협을 감지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는 전투부대를 지휘하며 전쟁을 대비했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된 이후에는 장군으로 진급했고 유럽 전선으로 향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전공을 인정받아 진급을 거듭했고 4성 장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아이젠하워는 나치 독일에 대응하는 서방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개성 강한 각국의 장성들의 잘 조화시키며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휘하며 그 명성을 드높였다.

연합군은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치열한 첩보전과 기만술로 독일군이 노르망디가 아닌 프랑스의 칼레로 상륙하는 것으로 믿게 했고 성공적으로 프랑스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빠르게 진격해 1944년 8월 25일 파리를 수복한 데 이후 독일 국경을 넘어 진격을 거듭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은 아이젠하워는 1944년 12월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5성 장군, 원수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참모 총장으로 역할을 했고 유럽의 군사 연합체인 나토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아이젠하워와 연합군 장군들

 



이렇게 아이젠하워가 유럽 전선에서 활약하는 사이 필리핀의 맥아더에게는 일본군의 침략이라는 위기가 발생했다. 군국주의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을 기점으로 태평양 지역을 빠르게 침략해 점령해나갔다. 필리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맞설 극동군 사령부를 창설했고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필리핀의 군 원수가 된 이후 미군에서 퇴역했던 맥아더의 복귀였다. 

하지만 맥아더는 필리핀 방어에서부터 난관에 직면했다. 1942년 필리핀의 미군은 필리핀에 침공한 일본군에 고전했다. 맥아더는 끝까지 항전했지만,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맥아더는 호주로 탈출해야 했다. 그는 호주에서 꼭 필리핀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성명을 남기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열을 정비한 미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창의적인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큰 전공을 세웠다. 1944년 10월 맥아더는 그가 공언한 대로 필리핀에 상륙했다. 애초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해 대만 점령을 우선 고려했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주장으로 필리핀 점령으로 선회했다. 필리핀 상륙은 성공했고 맥아더는 1944년 12월 5성 장국, 원수로 진급했다.

맥아더는 극동군 사령관, 군 원수의 자격으로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문서 서명 시 미 군합 미주리호에서 미국의 대표로 함께 서명했다. 이와 함께 맥아더는 점령군의 사령관으로 일본에 주둔한 미 군정의 수장으로 일했다. 맥아더는 일본의 빠른 무장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개편을 주도했다. 일본의 전쟁 포기와 정식 군대 보유 금지를 명시한 평화 헌법도 맥아더의 미 군정 시절 만들어졌다. 

맥아더는 이와 함께 일본인들이 신으로 추앙하는 천황, 일왕의 존재를 격하시키는 조치를 했다. 이제 일왕은 더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 됐다. 그와 당시 일본 왕 히로히토가 함께 찍은 사진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치 주눅이 든 듯 긴장된 자세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일왕과 달리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소 거만한 자세로 옆에 선 맥아더의 모습은 큰 대조를 보였다.

 

 

나가사키 원폭 폭발 사진

 



자칫 일본인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이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맥아더를 숭배하는 이상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에 맥아더는 점령군 사령관이었지만, 일본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미 군정은 전범들의 처리에 미온적인 모습을 보였고 미 군정이 끝나고 상당수 전범들은 대부분 정관계와 경제계로 복귀해 일본의 기득권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 의해 일본은 재무장과 함께 전쟁국가로의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찾아온 냉전체제가 만든 역설적 상황이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전선과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을 이끌었던 두 장군의 운명은 6.25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엇갈렸다. 6.25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에 머물던 맥아더에게는 북한군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조직된 유엔군 총사령관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는 북한군의 남침 후 구축된 한강 방어선 시찰을 시작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던 국군과 전쟁 발발 후 조직된 유엔군이 채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진격을 거듭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경계로 북한군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황을 크게 뒤바꿀 작전이 구상되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 대부분의 전력을 쏟아 부은 북한군의 배후를 공략할 대규모 상륙작전이 계획됐고 그 장소로 인천이 결정됐다. 

유엔군을 이 작전을 통해 적의 배후를 장악하고 보급을 차단하는 한편, 북한군의 주력부대를 고립시키려 했다. 이와 관련해 논의 과정에서 격론이 일어났다. 맥아더는 인천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 작전 시간에 제한이 있었고 넓은 개펄도 인해 대형 선박의 정박과 상륙군의 진입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5천분의 1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맥아더는 성공에 대한 강한 신념과 사전 준비로 인천 상륙작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맥아더는 오히려 이런 낮은 확률이 적의 대비를 느슨하게 할 수 있고 작전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음을 확신했다. 총사령관의 주장은 결국 채택됐다. 그 사이 유엔군은 인천이 아닌 원산 등 다른 지역에 상륙작전 가능성을 흘리며 북한군에 대한 기만술을 펼치려 그들에게 혼선을 줬다. 

 

 

맥아더와 히로히토 일왕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의 대규모 부대가 인천 앞바다로 향했고 지금의 월미도 상륙을 시작으로 인천 상륙작전이 전개됐다. 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빠르게 진격했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계획대로 유엔군은 북한군의 배후지역을 장악하고 남쪽 전선에 몰려있던 북한군은 고립됐다. 전세는 금방 역전됐다. 유엔군과 국군은 빠르게 기존 국경선이었던 38도 선 지역까지 북상했고 이에 그치지 않고 북진을 거듭해 평양과 원산, 압록강 지역까지 점령했다. 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이 시점에 맥아더는 중요한 오판을 했다. 그는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군이 개입한다 해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중국군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고 엄청난 기동력으로 북한 영토로 진입해 유엔군과 국군을 포위 공격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유엔군과 북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고 전선은 38도 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맥아더는 교착된 전쟁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중국의 만주지역과 본토를 타격하고 필요하면 핵 공격을 할 것으로 주장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의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 되는 상황이 있더라고 침략군을 섬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얼마 안 지난 시점에 또 다른 세계 대전에 부정적 입장이었고 사회 여론도 길어지는 전쟁을 종식을 원하는 분위기였다. 미국에서는 종전을 위한 협상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맥아더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결국, 맥아더는 1951년 4월 총사령관에 해임됐고 그대로 불명예 제대했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퇴임 연설을 하며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의 군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했다. 

맥아더에게 한국 전쟁이 군인 맥아더의 마지막이었다면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은 정치인 아이젠하워의 시작점이었다. 그는 1952년 5월 군에서 퇴역했다. 이런 아이젠하워에 대해 정치권에서의 영입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미 전쟁영웅으로 국민적 인기가 절정에 있었던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움직였다.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큰 뜻을 가지지 않았지만, 정치권의 거듭된 요청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고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 후보로 선출됐다. 

 

 

6.25 한군전쟁 사진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내내 6.25 한국전쟁의 빠른 종식을 공약으로 했고 압도적 표차로 미국 3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1952년 11월 당선자 신분으로 전쟁이 한창인 한국을 방문했고 전선을 시찰했다. 이후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정전을 위한 노력을 박차를 가했고 그의 노력과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던 소련의 독재다 스탈린의 사망 등 사건이 겹치며 휴전 협상이 빠르게 진척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현 전선에서 전쟁의 중단되고 남. 북한이 대립하는 지금의 휴전체제가 시작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미국과 한국은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긴 유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미. 소 중심의 냉전 체제 속에 강대 강의 대립보다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한 편에서는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 정책도 병행했다. 또한, 내정에서 아이젠하워는 미국 내 공공연하게 유지되고 있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했고 미국 대법원에 의해 결정된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 정책 철폐를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한 공립 학교에 연방 군대를 파견해 흑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하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집권기 미국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 정책의 철폐에 물꼬가 트였고 법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재선에도 성공한 아이젠하워는 집권 내내 비교적 긍정적인 직무 평가를 받았고 1961년 1월 대통령에서 퇴임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아이젠하워의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은 정치인 아이젠하워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 됐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이는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 젊은 대통령 케네디였다. 그 시기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고 큰 부흥기를 보냈다. 

 

 

 



한편 맥아더는 정치인으로서 정계 진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그는 민간 기업의 대표 등을 역임하긴 했지만,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군 시절 대외적으로 그 존재감을 활발히 알렸던 것과는 다른 삶이었다. 그렇게 맥아더는 대통령으로 더 기억되는 아이젠하워와 달리 영원한 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두 전쟁 영웅의 삶은 크게 엇갈렸다. 군인으로서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보다 크게 앞서가는 삶을 살았지만,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기회를 기다리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맥아더와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오히려 군인 이후의 삶은 맥아더 보다 성공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와 같았다. 하지만 맥아더는 전장에서 수많은 전공을 쌓았고 특히, 6.25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인천 상륙작전은 지금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작전이었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영웅으로 남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전쟁 영웅의 성공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2,000만 명이 넘는 군인들이 전사했고 민간인까지 포함해 8천여만 명의 인명이 사망한 역대 최악의 전쟁이었다. 이어진 한국전쟁을 포함하면 그 수는 다시 늘어난다. 현대사의 큰 비극인 이 전쟁과 관련해 우리는 전쟁의 전개 과정과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두 전쟁 영웅의 성공 스토리를 살피며 그들의 서사 역시 중요하지만, 이면에 자리한 수많은 이들의 비극에 대해서는 우리는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곳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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