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결한 삼국 시대는 군사적 대결만큼이나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는 시기였다. 삼국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했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순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이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건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늦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중국의 앞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했다.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려 하면 고구려 또는 백제의 협조가 필요했다. 마침 이들 나라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고 신라로서는 중국과의 교류에 제약이 있었다. 신라는 바다 건너 일본, 왜와는 전통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어 교류보다는 군사적 충돌이 많았고 일찍부터 대외 무역과 교류가 활발했던 가야와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않았다.
이는 대외적 환경은 신라의 발전을 어렵게 했다. 고구려, 백제가 왕권을 강화하고 율령을 만들어 법치를 확립하고 불교를 통해 중앙 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는 사이에도 신라는 부족 연합체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라의 왕은 왕이 아닌 마립간으로 불렸다. 왕에 대한 우리 고유의 명칭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의미는 부족의 수장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할 수 있다.
이 상황 속에서 신라에게 고구려, 백제와의 관계 설정은 매우 중요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고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 중 전사하기도 했다.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한 근초고왕의 백제는 그들의 영토를 한강을 넘어 평양성 인근에까지 이르게 했다. 또한,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중국과 지금의 일본 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4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신라의 독산성 성주가 관내 백성들과 함께 신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백제와 이를 거부하는 신라 사이의 갈등은 양국의 관계를 냉각시켰다. 백제는 그들은 물론이고 우호적 관계에 있었던 왜와 가야와도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다. 특히, 왜의 지속된 신라 침공은 신라 수도 서라벌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신라에는 큰 국가적 위기였다.
이런 신라에게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설정은 생존의 문제였다. 마침, 백제와 주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고구려로서도 백제를 견제하는 의미에서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수만명의 정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수도 서라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고 그렇게 신라 땅으로 진입한 고구려 군은 신라를 침략한 왜의 군대를 몰아내는 한편 그들이 피신한 가야까지 침공했다. 이는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는 내용으로 400년 경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신라 파병은 고구려 세력이 낙동강 일원까지 다다른 사건이었고 이 일로 가야의 국력은 급격히 쇠락했다. 이후 가야 연맹의 중심은 낙동강 일원 김해지역의 금관가야에서 경북 내륙인 고령 지역의 대가야라고 넘어갔다. 그만큼 고구려 군의 가야 침공은 큰 충격이었고 백제가 주도하던 한반도 남부 지역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었다.
이렇게 국가적 위기를 넘겼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 공짜는 없었다. 이후 신라는 상당 기간 고구려의 속국과도 같은 처지에 놓였다. 고구려 군이 신라 땅에 주둔했고 신라 내정에 고구려가 깊숙이 간섭했다. 이는 신라의 왕위 계승에도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다. 신라의 태자는 고구려의 볼모가 되어야 했다. 박, 석, 김씨가 왕위를 번갈아 맡았던 신라가 이 시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는 체제가 된 건 내부의 권력투쟁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면서 백제를 확실히 견제할 수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기 북쪽의 영토를 잃고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을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그 복수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 고구려의 힘은 막강했다. 이러 상황에서 바로 옆 친 고구려 국가인 신라의 존재는 큰 부담이었다.
이에 백제는 신라와의 관계 회복을 도모했다. 백제는 신라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 동맹관계 수립을 제안했다. 이런 백제의 지속된 요청에 신라가 화답하면서 나제동맹이 결성됐다. 430년 경 일이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삼국 중 최 강국인 고구려와의 군사적 충돌을 피해야 했다. 고구려 역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지만, 백제와 신라와 함께 대립하는 건 부담이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그들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회유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449년 경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지금의 충주지역으로 내려와 신라 눌지 마립간을 만났다. 지금으로 말하면 양국의 정상이 만나는 정상회담이었다. 고구려는 이를 통해 신라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고 신라는 아직 고구려와의 대립이 실익이 없는 상황에서 이 만남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만큼 고구려의 외교에서 신라는 중요한 파트너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고구려의 신라 포용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신라 눌지 마립간은 집권 이후 고구려의 속국이 된 신라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고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제와의 동맹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신라의 의도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450년 신라 영토 내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신라군에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에 고구려 장수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 국경을 공격했다. 신라는 왕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더 큰 문제는 다음에 일어났다. 고구려 장수의 살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지나 신라에 주둔하고 있는 100여 명의 고구려 군이 신라군에 의해 몰살됐고 455년 백제에 침공한 고구려 군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가 원군을 파견하면서 신라는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정리하고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진정한 나제 동맹의 시작이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혼인 동맹으로 더 공고해졌다. 두 나라는 427년 평양 천도 후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는 고구려에 함께 맞섰다. 이렇게 신라라는 동맹을 확보한 백제는 전통적인 우호국인 왜는 물론이고 위진 남북조 시대 중국 여러 나라와 교류하는 등 활발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왕조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고구려는 중국 각 왕조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 역시 강성한 고구려와의 관계를 파탄 낼 수 없었다. 백제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이런 백제의 움직임은 고구려를 자극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직접 공격에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백제 개로왕을 살해했다. 수도를 잃은 백제는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천도해야 했다. 이후 백제는 그들의 역사가 시작된 한강 유역을 상실했다.
이런 위기에서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으로 고구려의 추가 남하는 저지하며 다시 나라를 재 정비하고 국력을 키웠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구권을 회복하고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신라는 늦었지만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워 나갔다. 나제 동맹은 고구려의 위협에 대응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나라를 함께 발전시키는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었다. 이후 한반도의 정세는 절대 강자 고구려와 이에 맞서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 그들과 가까운, 가야와 왜가 함께 대응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이런 구도는 6세기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의 치세를 거치면서 중앙집권 국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국력이 크게 성장했다. 백제 역시 성왕 때 이르러 웅진에서 사비 천도 후 나라의 힘을 회복했다. 두 나라의 동맹은 이제 고구려와 상대해도 될 수준으로 그 힘이 커졌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장수왕의 치세를 지나 최 정점에서 국력이 내림세를 보이는 시점이었고 집권층 사이 갈등으로 국력이 쇠퇴하는 시점이었다. 북쪽 중국 왕조와의 대립도 점점 격화되는 시점이었다.
551년 나.제 동맹군은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시작했고 한강 유역의 고구려 군을 북쪽으로 밀어냈다. 고구려는 두 나라 연합군에 밀려 한강 유역을 내주고 철수했다. 백제는 그들의 옛 수도 한성을 포함해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했다. 나제 동맹의 성공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이웃도 없다는 말이 이 시기 그대로 나타났다. 당시 한강 하류를 점령한 백제는 당장 그 지역을 관리한 병력과 역량이 부족했다. 이에 백제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한강 하류지역에서 철수한 사이 신라 진흥왕은 비어있는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며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신라는 여세를 몰아 북진을 지속했고 함경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런 신라에 고구려가 접근했다. 고구려는 신라의 한강유역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더 이상의 북진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신라가 이를 받아들이는 밀약을 체결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의 확실한 지배를 위해서는 고구려 군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대신 백제와의 오랜 동맹을 파기하는 일이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이었지만, 신라에게는 실리를 위한 선택이었다.
백제 성왕은 그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며 관계 회복에 나서는 듯 보였지만, 신라를 공격하며 보복에 나섰다. 하지만 지금의 충북 옥천 지역인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신라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로써 100년 넘게 지속된 나제 동맹은 두 나라를 원수로 만들며 파기됐다.
이후 백제의 주적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바뀌었다.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는 아니었지만, 백제의 공세는 신라에 집중됐다. 신라에 대한 복수에 국력이 집중됐다. 백제는 신라 공략을 위해 왜와의 동맹관계를 더 공고히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바다 건너 왜까지 적대적 관계가 되면서 포위된 형국이 됐다.
이런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라는 대중국 외교에 총력을 다했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세에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도 적대국 고구려와 왜와의 관계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 왜와의 관계를 회복되지 않았고 신라는 중국 통일 왕조 당나라 외교에 주력했다. 마침, 고구려와 강하게 대립하던 당나라는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고구려 공격을 위한 나. 당 연합군이 결성됐다.
이런 국제정세 변화가 있었지만, 백제는 이에 둔감했다. 그들은 신라 공격에만 집중했고 신라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백제는 중국의 공격이 고구려에 집중된 상황에서 나. 당 연합군이 위협이 그들을 향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나. 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하게 했고 그들의 공격에 백제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이 됐다. 이렇게 백제는 660년 수도 사비성을 잃고 멸망했다.
하지만 백제는 각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부흥군은 백제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기도 했다. 백제 부흥군은 왜에 머물던 의자왕의 아들 풍을 귀국시켜 왕으로 삼고 백제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왜가 나라의 역량을 집중해 지원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을 더 힘을 얻었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 사이 내분이 발생하면서 지도부의 공백이 발생하고 믿었던 왜의 지원군이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백제 부흥군의 힘은 급격히 쇠퇴했다. 결국, 백제 부흥은 3년여 만에 좌절됐다. 수백 년 왕조의 허망한 최후였다. 이와 관련해 의자왕의 실정을 중요한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백제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백제는 대중국 외교에 점점 소홀했고 국가의 역량을 신라 공격에만 집중하면서 신라의 대외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했다. 왜가 그들의 중요한 우호국으로 그들을 총력 지원하긴 했지만, 그 시점이 늦었고 그들의 군사력은 나. 당 연합군을 상대한 수준은 아니었다. 백제로서는 더 많은 우군을 확보해야 했고 고구려와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는 삼국 시대 경쟁에서 가장 빠른 퇴장이었다.
백제의 멸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더 가속화했다. 고구려에게 백제의 존재는 신라를 강력히 견제하고 나. 당 연합군의 힘을 약하게 했지만, 백제의 멸망은 위아래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하는 형국이 됐다. 당나라와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의 강력한 우방이었던 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노력을 하면서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더 고립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층의 내분은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런 삼국의 흥망성쇠는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신라는 국익의 극대화를 위해 어느 누구와도 손을 잡고 그 관계를 정리하는 철저한 실리 외교를 했다. 그 속에서 위기를 나라를 살리기도 했고 나라의 부흥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백제는 그러지 못했고 왜에게만 의존하는 외교적 고립에 빠졌다. 특히, 당나라와의 관계 악화는 결정적 실책이 됐다.
이는 외교가 그 나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느끼게 한다. 백제와 신라의 사례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역사는 현재를 사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특히, 외교에서는 과거 역사를 큰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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