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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뮤지컬 역사를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 중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가 '영웅'이다. 이 작품은 2009년,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이해 초연이 이루어졌고 이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2022년 12월에는 뮤지컬의 새로운 시리즈와 함께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어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영화사에 남을 작품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뮤지컬과 영화가 오랜 세월 큰 사랑을 받는 건 그만큼 그의 삶이 극의 제목대로 영웅적이었고 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20대 나이에 일제의 침탈로 고통받고 주권을 빼앗길 위기의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고 애국 계몽운동과 무장독립 투쟁에 나섰다. 그는 그 과정에서 좌절과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멈추지 않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고 1909년 10월 26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거사로 민족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이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생을 다했지만, 그의 독립정신과 불의에 맞서는 의지는 100년이 넘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다. 

이런 안중근과 대비되는 인물, 안중근의 총탄에 사살된 인물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그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최고 권력자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식 근대화의 길을 가던 일본을 이끌었던 인물이고 일본이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공로로 이토 히로부미는 지금도 많은 일본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이끈 인물로 우리 민족에는 침략의 원흉이다. 그가 안중근의 총탄에 사살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현재 일본의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막부 체제 속 신분제가 지속되고 있는 일본에서 농민 출신의 하급 무사 집안의 아들로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높은 지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배경과 환경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하지만 일본의 세계사의 큰 조류 속에 포함되고 나라 전체가 큰 변화의 물결 속에 들어가면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12살 되던 1853년 7월 일본의 막부 정권은 미군 군함의 무력시위에 굴복해 수백 년간 지속되던 대외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항을 선택했다. 일본 막부 정권과 미국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미국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급속히 유입되는 서구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도 컸다. 이에 막부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강력한 정치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의 세력들이 이에 적극적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성장했던 야마구치현은 반막부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고 그중 조슈번이라는 정치세력이 그 중심에 있었다. 조슈번의 사상적 기반은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이 기초했다. 그는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일왕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서양 세력에 무력으로 맞설 것을 주창했다.

존왕양이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당시 지식인과 막부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무사 계층 대중들에 지지를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훗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기초가 됐다. 요시다 쇼인은 막부정권에 의해 숙청되고 처형됐지만, 그의 사상은 반막부 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일종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에게 수학했고 조슈번에 소속되면서 존왕양이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청년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 운동을 하면서 과격한 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다. 존왕양이 운동은 폭력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였고 살인과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 가담했고 막부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을 조슈번 내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했고 그는 무사계급으로 그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점점 그의 존재감을 높여가던 이토 히로부미의 인생을 바꾸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슈번 세력은 서양 세력과 맞서면서 힘을 열세를 절감했다. 이에 조슈번에서는 서양의 문물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힘을 키워 맞서려 했다. 그 일환으로 5명의 청년을 선발해 영국 유학을 보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안에 포함되어 영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양 세력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조슈번 출신의 일본인이 쉽게 영국행을 허가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양식 복식을 했고 신분을 숨겨 밀항을 통해 영국에 입국해야 했다. 

영국은 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인 영국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식민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일본인 유학생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료들과 함께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영어를 공부하고 각종 서구 문물과 문화를 접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정치체제와 대외 관계를 살필 수 있었고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사상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과정에서 힘이 지배하는 세계질서가 어떤 것인지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이 서양 세력에 힘으로 맞서는 건 무모한 일이고 힘을 서구식 근대화를 통해 힘을 키우는 게 더 현명하며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었던 존왕양이 사상 중 양이를 버리는 계기가 됐다. 

귀국 후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의 대외 노선 변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조슈번의 대외 노선은 바뀌지 않았고 서양 세력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조슈번은 크게 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을 막기 위한 중재자로 전후 배상 문제 등의 협의 과정에서 능통한 영어를 바탕으로 협상가의 면모를 보였다. 이는 서구 국가들의 그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고 외교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했다. 또한, 조슈번과 서양 국가 사이의 강화 협상을 순조롭게 마무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는 외교적 역량은 그가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는 데 있어 큰 힘이 됐다. 

 

 

청년 이토 히로부미

 



서양 국가들과의 전쟁에 패했지만, 조슈번 세력은 대외 관계에서 현실을 인정했다. 대신 서구식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반 막부 세력의 타깃은 막부정권으로 향했다. 이는 내전으로 발전했다. 반 막부 세력은 수백 년간 일본의 지배하던 막부 세력을 타도하는 한편, 지역의 영주들까지 제압하며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일본을 면모 시켰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었다. 이후 일본은 강력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 체제가 들어선 이후 28살의 나이로 효고현의 지사로 임명되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어실력과 외교적 역량은 그의 중앙 정치의 중심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1871년부터 1873년 사이 메이저 정권이 미국을 포함한 서양 국가들에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구 국가들을 방문했다. 사절단은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선 등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장기간에 걸쳐 미국을 포함해 서구 열강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에 대한 신봉자가 됐다. 

사절단으로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에는 정한론 논쟁이 한창이었다. 정한론은 19세기부터 일본에서 대두된 조선, 한국에 대한 정벌론이었다. 극우 세력들의 대외 정책에서 중요한 주장이기도 한 정한론은 조선에 대한 정벌에 있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 역시 강력한 정한론자였다. 이와 관련한 치열한 정치적 논쟁 속에 정한론은 일본의 대외 정책으로 채택됐다. 제국주의 일본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그 편에 섰다. 

이토 히로부미는 점점 정부의 요직에 올랐고 정치 실세가 됐다. 그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의 통일을 이끈 철혈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에 매료되어 있었고 독일제국의 정치 체제를 일본에 적용해 정치 시스템을 개편했다. 일본은 내각을 중심으로 일왕과 의회가 내각제를 도입했다. 일왕은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긴 하지만, 실권을 내각의 총리가 가지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40대 나이에 일본 총리에 올랐다. 그는 일왕의 강력한 신임을 더하며 일본의 최고 정치 지도자로 올라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국내 정치를 장악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외 팽창에 적극 나섰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도 노골화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먼저 일본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막으려 했다고 이는 1894년 청. 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이미 조선과 가까운 히로시마에 전초기지를 만들었고 해군력을 강화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 승리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하는 한 편, 막대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지금의 대만과 요동반도를 활양 받으며 막대한 전리품도 챙겼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 단단히 했다. 한편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발걸음이 한층 더 빨라졌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된 조선의 지배권을 노리는 러시아마저 1905년 러. 일 전쟁 승리와 함께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조선의 강제 병합에 한층 더 다가갔다. 일본은 이를 위해 다른 강대국인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었고 외교 협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러. 일 전쟁 직후 강화협상에서 배상금 등의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 막대한 전비가 투입된 전쟁임을 고려하면 초라한 결과였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켰다.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합을 위해 더 속도를 높였다. 이는 정한론의 실현이기도 했고 제국주의 일본의 오랜 숙원인 대륙 침략을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8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한데 이어 1907년에는 을사늑약에 대한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을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였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포함해 주권 국가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행정권과 군대, 각종 정부의 기능을 일본에 넘기며 식민지가 되는 길을 걸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이끌었다. 대한제국 병합의 완성은 그의 중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이어 저항해 1907년 군대 강제 해산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는 등 강하게 저항했지만, 중과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명령된 대한제국내 의병 고사 작전을 전개하는 등 힘으로 대한제국의 저항을 제압하는 한 편, 대한제국의 황실을 이용해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려 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영친왕이라 불리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게 해 일본식 교육을 받게 하는 등 대한제국 황실과의 돈독한 관계를 연출했다. 또한, 순종황제의 전국 순행길에 동행하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반발을 무마시키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안중근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한제국 내 부정적 여론이 강하고 의병 등 저항이 지속되며 일본에서는 강제병합의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이에 찬성했다. 그 결과 1910년 8월 한. 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에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겠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와의 외교 협상을 위해 만주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 관할이었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세발 맞고 사망했다. 9시 30분에 일어난 일이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10시경 목숨이 다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영웅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비참한 최후였다. 안중근 의사는 그 자리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외치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그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명백히 밝혔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했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주도했고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하게 하고 군대를 해산토록 했으며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 침탈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또한, 언론의 자유를 억압했고 무엇보다 세계를 솎이고 동양평화를 깨뜨리는 등 15가지의 이유를 들었다. 이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관련한 내용으로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안중근의 주장이 널리 퍼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재판을 방청객 없이 진행했고 변호사 선임을 권리도 박탈했다. 또한, 일본은 재판을 신속히 진행해 1910년 2월 7일 첫 재판을 연 이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내리고 3월 26일 사형을 집행했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평소 그의 중요한 사상인 동양평화론과 관련한 저서를 집필할 시간까지 사행 집행을 미뤄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의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은 당시 그의 절개와 의지에 탄복한 간수에 의해 미완성의 원고가 필사되어 전해지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 존중하고 번영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힘에 의한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명분으로 내세운 대동아공영,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양 세력에 맞서는 군사적, 경제적 동맹과도 배치된다.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올라선 이후 앞선 힘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그들 발 아래 두는 일종의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그들에게 평화는 일본 중심의 평화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런 제국주의 일본의 주창한 인물이었다. 안중근과는 크게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다. 이를 통해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안중근의 의거는 무장독립투쟁 등 독립운동에 큰 촉매제가 됐다. 반대로 이토 히로부미는 그가 꿈꾸던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병합을 자신이 완성하지 못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는 강한 신념을 가졌고 그 신념에 따라 일본을 이끌고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었지만, 대한제국에 자행한 각종 악행에 대한 단죄를 받았다. 그가 주도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서 더 노골적으로 대외 침략을 강행했고 결국, 패전국이자 전범국으로서 역사에 기록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유산이 결과적으로 일본을 파괴했다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의 교훈에도 일본은 과거사를 부정하는 한편, 전쟁 국가로의 변신을 노골화하는 등 극우적인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극우 정치인들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야마구치현, 이토 히로부미나 나고 성장한 지역이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전후에도 수많은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과 총리가 배출됐다. 그들은 과거 일본의 전쟁범죄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함께 역사의 교훈을 얻기 보다 당시 일본의 영광 재현에 더 주력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그림자는 여전히 동양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위키백과 /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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