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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로 해도 될 만큼 그 영향력을 매우 컸고 고대 유적이나 유물도 존재한다. 심지어 그림이나 조각 등 예술작품에서 있어서 기독교는 중요한 소재가 됐다. 이는 유럽 각지의 수많은 명작들과 조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덧 서양의 벗아나 세계 최대 종교 중 하나가 된 기독교지만, 기독교 태동한 초기 기독교는 기나긴 박해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기독교의 시작은 고대 로마제국과 함께 하는데 그 로마에서 기독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당했고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 기독교는 로마에서 종교로 공인되고 국교가 되는 반전을 이뤄냈다. 고대 로마가 몰락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그 교세를 유럽 전역으로 확장해 서양의 주류 종교로 자리했다. 기독교의 발전사는 그만큼 극적이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시기 그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1세기 경 로마는 공화정 시대가 끝나고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다. 로마의 권력자 카이사르가 공화파 귀족들에 암살된 이후 그의 자리를 물려받는 옥타비아누스는 치열한 권력 투쟁 과정을 거쳐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됐고 그의 쌍벽을 이루던 권력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왕국 연합군과의 전쟁마저 승리하며 로마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최고 존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로마 제정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자리에 오른 이후 내치와 외치에서 큰 성과를 내며 로마제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 시기 로마는 군사적으로 강성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이런 통치의 성과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우상화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는 앞으로 그의 뒤를 이어갈 제정시대 황제권을 더 강력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황제의 우상화 작업은 황제를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로마의 신화를 만들었고 황제는 그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과거 파괴됐던 신전들이 복구되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로마의 신들로 변신했다. 신화 속 신들과 함께 정복지의 외래 신들도 그 신전에 함께 했다. 로마제국은 다수의 신들이 공존하는 다신교 국가의 성격을 보였다. 그 수많은 신 중 로마 황제가 있었다. 

국가 차원의 황제 신격화 정책은 정복지에도 적용됐다. 정복지마다 신전이 만들어지고 참배를 강요당했다. 다만, 한 지역은 예외였다.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 있던 유대왕국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가 국교였다. 그들에게 여러 신을 섬기는 로마의 종교관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신 유대왕국은 로마 황제의 귄위와 신격화를 인정하고 유대교인들이 스스로 세금을 더 부담하는 등의 방법으로 독자적인 신앙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와 유대교의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던 시기 유대 왕국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예수의 부모는 로마시대 지역의 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서도 예루살렘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살렘의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다. 기원전 시대가 끝나는 사건이었다. 추후 예수의 탄생 시점은 착오에 의한 것으로 실제는 5~6년이 더 빠르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예수의 탄생은 훗날 큰 폭풍을 몰고 왔다. 

성인이 된 예수는 유대왕국 내에서 종교 지도자로 기적을 행하는 성인으로 대중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그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 평등한 세상을 만들길 주장했다. 이는 억압받던 민중들에게는 광명과도 같은 말이었다. 특히, 오랜 세월 나라를 잃고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유대민족들에게 예수는 언젠가 그들 앞에 나타날 메시아였다. 예수의 주장은 황제에 대한 숭배 거부로 이어졌고 이는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유대왕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유대교와의 교리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갈등이 커졌다. 유대교에서는 절대적인 안식일에 대해 예수는 유연한 사고를 보였고 형식주의 안식일을 비판했다. 또한, 예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유대교 사제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기존의 유대교 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예수의 존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확대는 유대교 사제들의 큰 반감을 불러왔다. 유대교 사제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에 고발했고 예수는 로마 총독의 결정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며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그렇게 순교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 전해졌고 제자들은 서아시아 교회를 설립하고 다른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서아시아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그 교세를 확대했다. 로마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가 확산되던 초기 로마제국은 기독교의 포교 활동에 큰 제한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독교의 세력이 크지 않았고 황제 권력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대표적 폭군인 네로 황제 시기 기독교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네로 황제는 귀족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숙청하면서도 대중적인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집권 초기 그는 폭군의 이미지가 아니었지만, 로마 대화재로 민심을 잃었다.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가 아닌 타 지역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 그가 로마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급속히 확산했다.

이에 네로 황제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화재 발생이 죄를 씌웠고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처형됐다. 그중에는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와 바울도 있었다.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의 박해였다. 아직 소수파 종교였던 기독교는 집권층의 실정을 덮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네로 황제 시대의 박해는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이런 박해는 로마제국의 통치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기독교의 교리도 원인이었다. 기독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한편 평등을 강조했다. 그 안에는 로마를 지탱하는 노예제와 극심했던 남녀 차별의 철폐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교리는 당시 로마 청년들 특히, 여성들이 원치 않는 혼인을 거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로마 사회의 분위기와 정면으로 배치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는 로마 사회 전반에 번져있던 쾌락주의와도 큰 거리가 있었다. 이는 로마 권력층이 점점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로마는 지속적인 정복 활동을 위해 군사력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인구가 있어야 했다. 로마에서 결혼은 제국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여성은 그런 인구를 생산하기 위한 도구였다. 여성들이 자존감을 높이고 기존의 역할을 거부한다는 건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또한, 국민들에게 여가와 놀 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고 이를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로마로서는 기독교의 금욕주의가 통치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건 반역의 죄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질감은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로 이어졌다. 기독교는 로마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종교로 불법화되고 기독교인임이 드러나면 중형으로 처벌받았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세력은 줄어 들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갔다. 이에 기독교는 황제의 성향에 따라 박해와 묵인 사이에서 불안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이른 시기는 235년부터 284년까지 이어진 군인황제 시대였다. 이 시기 로마는 18명의 황제가 들어설 정도로 정치적 혼란기였다. 군인들에 의해 쿠데타가 암살이 끊이지 않았고 다수의 황제가 제위 도중 살해됐다. 정치적 혼란은 로마의 상공업을 위축하고 도시가 쇠퇴하는 등 로마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혼란기를 끝냈건 284년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노스 황제 시기였다. 그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4개로 나눠 통치했다. 그는 집권 초기 기독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후 강경 대응으로 변화했다. 그는 외침에 대비해 군비 증강을 추구했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징집을 시도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이에 거부했다. 그들은 병역에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이는 황제의 큰 분노를 불러왔고 기독교에 대한 강경파에 힘이 실렸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다수의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이어 집권한 갈레리우스 황제 때까지 잔혹한 박해는 계속됐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점점 힘을 잃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장한 기독교는 다수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종교로 성장했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했다. 로마 황제도 기독교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기독교 역사의 큰 전환점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시기였다. 그는 치열한 권력 투쟁의 과정을 이겨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로마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한 내전 당시 그의 군대는 기독교 표식이 있는 방패를 들고 전투에 나섰다. 설화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기독교 세력이 커졌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박해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더 나아가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 신자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이를 위해 기독교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한편, 기독교 신자들의 주일을 인정하고 일요일 휴일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이후, 기독교는 소수파 종교가 아닌 주류 종교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임종하기 전 기독교 세례를 받고 신자로서 세상을 떠났다. 기독교 신자 황제의 등장은 큰 사건이었다. 

 

 

 



이후 기독교는 큰 부흥기로 접어들었다. 마침내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박해받았던 종교가 주류 종교가 되는 일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도 기독교 신자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주류 종교가 된 기독교는 오히려 타 종교를 박해하는 종교가 됐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에서는 과거 그들의 전통 속 신들이 있었던 모셔진 다스의 신전들이 파괴되고 기독교 외 이교도들의 행사가 금지됐다. 393년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지는 고대 올림픽도 중단됐다. 올림픽은 이후 1896년에 가서야 근대 올림픽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그만큼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의 영향력을 막대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유럽을 중심으로 서구 문화의 구심점이 됐고 기독교의 세계관이 유럽을 지배했다. 그 영향력은 이후 서구 역사와 함께 했다.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는 사람들의 일상 전반을 지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다수의 종교가 된 기독교지만, 그들의 주류가 된 이후 애초 기독교가 처음 생겨났을 때 가졌던 평등사상을 지속적으로 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특히, 중세 시대 기독교는 정치, 경제 전반을 지배했고 권력자로 자리하기도 했다. 기독교의 교리가 일반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봉건 영주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면벌부를 발행해 그들의 권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종교개혁이라는 내부 개혁과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기독교의 발전사는 분명 고통과 박해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박해를 벗아난 이후에는 누군가를 박해하고 억압하는 역사이기도 했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벗어났을 때 어떤 부작용과 폐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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