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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격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개전 초기 러시아가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으로 우크라이나에 쉽게 승리할 것으로 보였지만,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이 힘을 합쳐 러시아에 맞서고 서방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장기전을 접어들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전쟁 양상이 변화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이 전쟁의 여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인적, 물적 피해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와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와의 갈등은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전 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전쟁의 위험과 함께 이 전쟁으로 인해 파생되는 에너지, 식량 문제는 세계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수년간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복귀하는 과정에서 전쟁은 경제 회복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전쟁이 쉽게 종전에 이르기 어렵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이전에 확보한 크름반도와 이번 전쟁으로 확보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와 남부 해안지대를 그들의 영토로 확정하려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영토 수복의 의지를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전 초기 있었던 휴전협상도 지지부진하다. 이 과정에서 주요 전장이 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피해와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과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푸틴은 1999년 12월 31일 전임 옐친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고 권력자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2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집권 기간 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이 있었고 매번 부정선거 시비가 있었다. 또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파를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는 등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푸틴은 종신집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독재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장기 집권 명분으로 강한 러시아 그리고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 재현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실제 많은 러시아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고 정보의 왜곡과 언론 장악의 영향이 있지만, 길어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푸틴의 러시아 내 지지는 아직 공고한 편이다.

아직도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상당수는 과거 미국과 2강 체제를 형성하고 세계 패권 국가로의 위상을 가졌고 소련 시절과 유럽의 강대국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아내는 등 큰 힘을 가졌던 러시아 제국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다. 푸틴은 이런 러시아 국민들의 정서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적절히 이용하면서 장기 집권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푸틴은 어쩌면 러시아 제국 역사를 시작했던 한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지도 모른다.

그 인물은 1672년 태어나 1725년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1세다. 그는 1682년부터 1725년까지 재위하면서 러시아의 서구화와 근대화를 통해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대외 전쟁에서의 거듭된 승리와 적극적인 영토 확장으로 러시아가 육지는 물론이고 해양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후 러시아는 러시아 차르국에서 러시아 제국이 됐고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첫 황제가 됐다. 이런 그의 업적으로 인한 그에게는 표트르 대제라는 칭호가 더해졌다. 

러시아는 15세기 중엽까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내륙 국가였다. 그전에는 유라시아 일대를 지배한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몽골의 문화가 일상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전통문화와 함께 했다. 이는 러시아를 유럽의 주류 국가에서 멀어지게 했다. 서구 유럽은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대외 진출과 교역이 활발해지고 산업의 발전으로 점점 번성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어정쩡한 정체성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점점 국력을 키웠고 영토 확장에 나서 유럽은 물론이고 시베리아 아시아까지 그들 영토로 편입했다. 그렇게 러시아 차르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됐지만, 여전히 유럽의 주류에서는 멀어져 있는 변방의 국가였고 세계사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국가였다. 무엇보다 대외 팽창과 교류에 절대적인 요소인 해양으로의 진출에 한계가 있었다. 해양 진출을 위해서는 강대국 스웨덴, 오스만 제국을 넘어서야 했지만, 러시아는 그럴 정도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러시아를 변화시킨 인물이 표트르 대제다. 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차르 자리에 올랐다. 어린 나이와 미약한 정치적 기반은 그의 차르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어렵게 했다. 이복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이 있었고 이복 누나 소피아 공주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섭정에 나섰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측근 인사들이 숙청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고 또 다른 이복형제와의 공동 차르 통치와 이복 누나의 섭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표트르 대제는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긴장감 속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는 이름 뿐인 차르였고 실권은 없었다. 궁궐을 나와 생활해야 했다. 시련의 시기였지만, 이는 표트르 대제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마침 그가 궁궐 밖에서 머무는 장소는 러시아에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표트르 대제는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서유럽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때의 영감은 훗날 강력한 서구화와 근대화 정책의 기반이 됐다. 

이와 함께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선진 기술과 그에 근거한 거대한 함선의 존재도 알게 됐다. 그는 이를 통해 해양 진출의 필요성을 느끼게 스스로 항해술 등 배를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 그때 가진 해양 진출의 꿈은 그가 실권을 가진 후 지속적으로 그의 대외 정책에 반영되어 추진됐다. 

한편에서는 전쟁놀이를 빙자해 이북 누나와 집권세력의 의심을 피하면서 그의 친위 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힘을 키우는 노력도 병행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후 소피아 공주가 이끄는 크름반도 전쟁에 나섰지만, 실패하는 등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소피아 공주의 친위부대인 황실 부대를 회유해 장악했고 마침내 차르로서의 권한을 되찾고 소피아 공주를 숙청했다. 하지만 그는 이복형과의 공동 차르제를 유지했고 내정보다는 국방력 강화와 대외 진출 등 문제에 주력했다. 

표트르 대제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해양 진출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자신이 진두지휘해 해양 탐사에 나서는가 하면 함선 건조를 위한 조선소를 건립하고 해군을 양성했다. 그에게는 해양 진출의 교두보인 얼지 않은 항구 부동항의 확보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영토 남부의 흑해 진출이 필요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영토가 맞닿아 있는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표트르 대제는 오스만 제국의 흑해 중요한 거점인 아조프 요새 공격에 나섰다. 1695년 1차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1696년 2차 공격에 성공하며 아조프 요새를 장악했고 흑해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 전쟁을 기점으로 표트르 대제는 군의 현대화와 조직 개편, 상비군 체제를 구축했다. 

 

 

 



1697년에는 대규모 사절단을 서유럽에 파견해 선진 문물과 기술을 습득하고 유럽의 기술 원조를 이끌어내려 했다. 여전히 유럽의 변방에 머물던 러시아를 유럽의 주류 세력으로 알리는 역할도 있다. 표트르 대제는 그 스스로가 신분을 숨기고 직접 사절단에 포함돼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여정은 18개월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표트르 대제는 영국의 대과학자 뉴턴과 만나기도 했고 해부학이나 치과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실제 표트르 대제는 그때 배운 치과 기술로 귀족들과 측근들의 발치나 치과 치료를 직접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배운 서유럽의 기술을 러시아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런 서구식 개혁은 내부 반발을 불러왔고 황실 부대와 보수파 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연결됐다. 표트르 대제는 그 쿠데타를 진압했고 잔혹한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를 통해 그의 권력 기반은 더 단단해졌고 그의 서구식 개혁 정책은 더 힘을 얻었다. 

표트르 대제는 더 적극적으로 서유럽의 문물을 수용했다. 그 일환으로 몽골의 전통이 남아 있는 귀족들과 관리들의 복식을 서구식으로 바꾸도록 했다. 또한,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수염을 철폐하고 이를 강력히 시행했다. 마치 조선 말 시행됐던 단발령을 연상하게 하는 조치였다. 그에 대한 반발이 거세자 표트르 대제는 수염을 기르고 싶은 이들에게 수염세를 징수하는 기발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는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국고를 확충하기도 했다. 

이는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국가적인 투자로 이어졌다. 표트르 대제는 국민들의 의무복무 기간을 대폭 늘렸고 국방비를 대폭 확충해 유럽 최대의 상비군 체제를 구축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리한 징집과 세금 부담은 국민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숙원이 해양 진출을 위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700년 표트르 대제는 북유럽의 강국 스웨덴과 발트해 지배권을 놓고 대결을 펼쳤다. 대북방 전쟁으로 기록되는 이 전쟁은 전쟁 초기 스웨덴이 우세했지만, 러시아는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 전쟁을 지속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스웨덴 양국을 중심으로 여러 유럽 국가들이 나뉘어 참전하는 국제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표트르 대체는 1703년 발트해 함대를 만들어 스웨덴을 육지와 바다에서 함께 압박했다. 이 전쟁은 1721년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러시아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발트해를 러시아의 영역으로 포함하게 됐다. 지금도 러시아 해군의 주력 함대인 발트해 함대는 바로 그 북방전쟁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북방전쟁의 승리로 표트르 대제의 한층 더 공고해졌고 대외 팽창도 더 힘을 얻었다. 표트르 대제는 내부 개혁과 함께 해양진출의 교두보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이 도시 건설은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이 소요됐고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가혹한 노역에 시달렸고 다수의 인명 피해도 있었다. 그 희생 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됐다. 표트르 대제는 이후 차르라는 명칭 대신 황제로 자신을 부르도록 했고 러시아가 차르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했다. 러시아 제국의 시작이었다. 

황제가 된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숙청을 지속했고 철권통치를 강화했다. 숙청의 대상에는 그에 반대한 아들도 예외가 없었다. 그의 통치 기간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발트해는 언제든 러시아가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그들의 영역이 됐다. 

하지만 황제로서 표트르 대제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725년 표트르 대제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의 큰 변화를 가져온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의 허무한 최후였다. 절대 권력자의 사망으로 러시아는 이후 수십 년간 내부 권력 투쟁의 과정을 거치는 든 혼란기를 겪었다. 

그리고 1762년 황제 자리에 오른 러시아 제국 최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러시아 제국은 더 큰 번영을 누렸다. 그의 치세 기간 러시아는 발트해는 물론이고 흑해 연안까지 장악했고 크름반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했다. 지금의 미국 영토인 알래스카까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됐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가 예카테리나 2세 때 확보됐다. 표트르 대제가 뿌린 대제국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에 표트르 대제는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까지 많은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다. 지금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 푸틴은 마치 표트르 대체의 러시아를 재현하려는 듯한 대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를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은 침략을 당하는 나라는 물론이고 침략을 하는 나라 그리고 국민들을 모두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또한, 전 세계가 그 불행의 영향을 받고 이기도 하다. 전쟁의 승리보다는 평화가 더 큰 승리임을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시작되고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강대국으로 세력을 떨쳤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유럽 각국이 민주주의 발전 등을 통해 국민들의 주권과 인권을 신장하는 등의 정치, 사회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외면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전제 군주정을 유지했다.

이 전제군주 정은 부패했고 무능했고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민들을 억압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는 폭정을 지속했다. 심지어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는 민심을 집권층에서 멀어지게 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왕조는 단절되고 말았다.

결국, 수백 년 이어진 대제국의 역사와 권위, 광대한 영토 등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지켜온 왕조는 내부에서 썩었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러시아 제국은 그대로 보여줬다. 지금의 러시아 역시 푸틴이라는 절대 권력자와 그 추종세력들이 수십 년간 나라를 운영하는 폐쇄적 권력구조다. 언론과 정보를 통제한다고 하지만 권력의 부조리와 누적된 문제들은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절대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커지고 권력을 흔들 수 있다. 이는 절대 권력의 무리수를 불러올 수 있고 러시아의 대외 정책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도 다분히 숨어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민생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 봉착한다면 국민적 저항이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조급함을 보이고 있다. 즉, 지금은 표트르 대제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각종 정보가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고 국민들의 여론 형성 과정도 다양하다. 권력의 힘으로 이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억눌려온 국민들의 불만과 분노는 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푸틴 정권은 어쩌면 지금 너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역사의 영웅일지 모르지만, 21세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영웅담은 역사에 남아 있을 때 빛날 수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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