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서양의 역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는 큰 변화의 시기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중세를 벗어나 종교가 아닌 인간이 사상과 철학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이후 유럽의 문화, 예술은 종교적 경직성을 벗어나 한층 자유로워지고 다양해졌다. 또한, 수학과 과학 등 실용 학문이 발달하면서 훗날 문명 발전의 토대도 마련됐다. 이런 과학의 발전을 기술의 발전을 불러왔고 동양의 문명을 동경하던 서양이 근세 들어 동양을 앞지르는 바탕이 됐다.
르네상스의 시대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는 중세 시대 동서양의 무역을 장악하며 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과 근접하고 있었고 이는 다양한 문물을 수용하고 상업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고대 로마시대의 유산도 남아 있었고 오스만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지역의 문명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탈리아가 각 도시별로 강력한 자치권을 가지는 도시 국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지역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환경적 요건도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이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전한 상업 도시이자 르네상스 시대 큰 번영을 누렸던 도시, 문화와 예술 부흥에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역의 지배자 메디치 가문이 있었던 피렌체에 두 명의 뛰어난 예술가가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그들이었다. 두 예술가는 미술사에서 항상 등장하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작품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두 예술가는 20년이 넘는 나이차가 있었지만, 동시대 예술에 있어 강한 라이벌이었고 또한, 서로에서 예술창작의 자극제가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성격이나 작품관 등에서 상당한 대조를 보인 인물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피렌체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도시에서 공증인으로 일했고 부유했다. 그는 다빈치의 어머니를 만나 다빈치는 낳았지만, 신분적 차이 등을 이유로 혼인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빈치는 사생아로 자랐다. 사생아라는 신분은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다빈치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공부를 했고 미술을 배웠다.
우연히 그를 만난 아버지가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했고 다빈치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피렌체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피렌체에서 정식으로 미술 수업을 듣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가 베로키오의 공방으로 들어가 제자가 됐다. 다빈치의 실력을 크게 발전했고 스승의 그림 작품에도 참여했다. 그의 천재성과 예술가로의 능력은 베로키오도 인정했다. 베로키오가 다빈치의 그림을 보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열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다빈치는 그곳에서 색과 색 사이에 구분을 명확하지 않게 하고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이렇게 피렌체의 저명한 예술가였던 베로키오의 인정을 받은 청년 화가 다빈치는 1477년 자신만의 공방을 차리고 독자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의 공방 운영은 원활하지 않았다. 그림이나 조각 등의 작품을 의뢰받아 그 대가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다빈치의 지독한 완벽주의는 작품의 완성을 항상 더디게만 했다. 이는 의뢰인들에게 큰 불만이 될 수 있었고 작품 의뢰가 줄었다. 당연히 경제적 어려움도 가중됐다.
1481년 다빈치는 한 수도원의 작품 의뢰를 받고 그 작품 완성 시 수도원이 기부받은 땅의 1/3을 지급받는 계약을 했다. 대신, 다빈치는 작업에 필요한 재료 등을 자체 충당해야 했다. 당시 작품 의뢰 시 재료비 등은 작품을 의뢰한 이가 부담하는 게 관례였지만, 다빈치는 파격적인 계약을 했다. 어쩌면 좀처럼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동기 부여를 하게 하려는 과감한 계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빈치는 다시 완성작을 만들지 못했고 큰 손해만 발생했다. 결국, 다빈치는 공방을 접고 생계를 위해 식당을 운영하는 등 경제활동을 하기도 했다.
자칫 피렌체의 괴짜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다빈치에게 그의 인생을 바꿀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지배자 메디치 가문의 사절단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방문했고 밀라노의 명문가 스포르차 가문과 연결됐다. 스포르차 가문의 후원을 받고 밀라노에 정착한 다빈치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발명가와 수학자, 해부학 등 의학 분야까지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1482년부터 시작된 다빈치의 밀라노서 시대는 다빈치가 지금도 인정받는 다방면의 천재이자 과학자, 예술가로 역사에 남게 했다.
밀라노에서 다빈치의 연구는 지금도 구현이 가능한 대형 석궁과 전차 형태의 무기, 자전거와 낙하산 등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 많았다. 그의 아이디어는 수학과 해부학, 다양한 분야를 망라했고 그의 연구 노트인 다빈치 노트는 중요한 인류 유산으로 남아있다. 1506년부터 1510년 사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총 72페이스 분량의 다빈치 노트는 1994년 예술품 경매 시장에서 당시 가치로 300억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낙찰자가 빌 게이츠였다는 사실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런 다빈치의 다방면의 천재적 능력은 사회 전반에 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었다.
다빈치는 이런 연구를 하면서도 예술가로서, 화가로서의 본업을 놓지 않았다. 밀라노의 다빈치에게서 시대의 역작들이 탄생했다. 1495년부터 1498년 사이 작업을 했던 밀라노의 한 성당에 그려진 벽화 '최후의 만찬'은 예수와 그의 12제자까지 작품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까지 알 수 있는 세세한 묘사와 수학의 원근법을 이용한 입체감 등 다빈치의 예술적 역량과 과학자로서의 면모까지 모두 집약된 역작이었다. 그의 '최후의 만찬'은 이전 같은 주제의 작품과 비교할 수 없는 작품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했다.
또 다른 역작이나 다빈치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평가받는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1503년부터 1506년 사이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작품은 다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이 사용됐고 섬세한 묘사와 명암 처리, 안정적인 구도 등 그의 화가로서 역량이 집약되어 있다. 모나리자 작품을 상징하는 그 미소는 평소 해부학을 전공하며 해부도까지 남긴 다빈치가 구강의 구조 등을 고려해 작품에 반영했다.
현재 이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해마다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끌게 하고 있다. 이런 유명세로 인해 모나리자에는 작품의 주인공과 눈썹이 없는 등 미완의 작품에 대한 여러 추측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까지 그 명성을 떨치는 사이 또 다른 청년 예술가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 인물이다. 그 역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특히, 조각가로 큰 명성을 얻었고 위대한 회화 작품도 남겼다.
1475년 피렌체 인근의 도시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후원으로 피렌체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유력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후원을 받으며 미술 외에 다방면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때 공부한 의학, 해부학은 훗날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로 큰 성공을 하는 데 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499년 청년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진출했고 그곳에서 대표적인 조각 작품은 피에타를 완성했다. 인물의 근육과 핏줄까지 보이는 섬세한 표현력과 인물 묘사, 보는 각도에 따라 작품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를 당대 최고 조각가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 역시 피에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남몰래 자신의 이름을 조각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의 급부상은 이미 최고 예술가 자리에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했다. 두 인물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문 분야에서 대조를 보였고 성격상으로도 뛰어난 친화력과 준수한 외모의 다빈치와 달리 독선적이고 외골수 적 성격의 미켈란젤로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회화와 조각이라는 각자의 분야에 대한 자부심 또한 강했다. 다빈치는 조각에 대해 폄하는 성향이 있었고 미켈란젤로와의 갈등을 불러오게 했다.
두 인물의 갈등은 1504년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완성한 또 다른 걸작 다비드상의 설치와 관련해 다시 한번 불거졌다. 당시 다빈치는 다비드상 설치와 관련한 위원회 의원으로 작품의 실내 전시를 주장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야외 설치를 강력히 주장했다. 작품은 야외에 설치됐지만, 그 과정에서 두 인물의 갈등이 커질 수 있었다. 다비드상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미켈란젤로 특유의 작품성과 관람자의 시선까지 고려한 원근법 등을 고려해 만든 조각상이었다.
두 천재 예술가의 대립은 같은 장소에서 벽화작업을 함께 의뢰받으면서 절정에 달했다. 두 예술가는 1504년 앙기아리 전투 벽화작업을 하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라이벌 앞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미켈란젤로는 수중 접전도를 다빈치는 기마 접전도를 그렸다. 두 거장의 작업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전쟁의 급박한 상황을 긴장감 있고 다빈치는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작품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그 거장의 대결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두 예술가가 모두 작업 도중 밀라노와 로마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후 두 거장은 함께 할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빈치는 밀라노를 거쳐 인생 말년에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1519년 생을 마감했고 프랑스에 묻혔다. 인생 후반기 미켈란젤로는 그를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바뀌면서 그 가문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로마에서 생의 후반기를 보냈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그의 역량을 크게 발휘했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은 천장화와 벽화를 통해 그 명성을 드높였다. 1508년부터 1512년 사이 작업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작업 과정에서 작품료 지급 등으로 둘러싼 교황과의 갈등 등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천지 창조'로 불리는 이 천장화는 미켈란젤로는 몸을 뒤로 젖히는 작업을 장기간 해야 하고 작품 재료가 눈에 들어가는 등 일이 지속되면서 신체적 고통과 시력 저하 등의 문제가 있었음에도 대작을 완성했다.
여기에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6년여의 작업을 통해 대형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노년이 된 미켈란젤로가 그의 마지막 힘을 다 짜내 완성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는 그의 예술가로의 자부심과 고집,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성화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나체화였고 매우 사실적인 묘사를 했다. 특히, 지옥과 관련한 묘사는 매우 잔혹하기도 했다. 이에 당시 교회에서는 이 그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많았다. 하지만 교황이 강력한 지지로 작품은 완성될 수 있었다. 이후 나체화는 미켈란젤로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옷이 입혀지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대한 혹평에 대응해 그 비판을 주도한 주교를 지옥의 수문장 미노스로 그려 넣는가 하면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그려 넣기도 했다. 화가의 통쾌한 복수였다. 이처럼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예술관이 분명했고 어떠한 경우에도 예술적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대작을 완성한 후 미켈란젤로는 건강 악화가 시력이 거의 상실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조각 작품을 지속적으로 완성하는 등 예술가의 삶을 살았고 1564년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시대를 초월해 존경받는 예술가들이다. 그 삶도 극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라이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이벌의 존재는 서로에게는 큰 자극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대립 속에서도 두 거장은 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와 완벽주의를 지향했고 그 과정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다수 남겼다.
그들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를 넘어 인류의 중요한 유산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작품에 대한 아름다움 이전에 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진심 가득한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작품에 대한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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