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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거품경제, 버블경제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다. 버블경제는 주식, 부동산 등 자산의 가치가 실물경제의 성장 이상으로 지나치게 상승한 상황을 말한다. 버블경제의 심화는 자산 가치를 왜곡하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실물경제의 발전에 연동하지 않는 자산 가치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하락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고 경제 성장의 둔화시키고 경제의 활력을 잃게 하는 부작용이 수반된다. 

이런 버블경제의 대표적 사례로 일본을 든다. 일본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경제의 큰 호황기를 보냈고 이 기간 일본은 세계 최고의 제조업 강국으로 엄청난 무역 흑자를 지속했다. 그 시기 일본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국이 됐다. 넘치는 자금은 그들의 자산 가치를 크게 상승시키고 일본 경제는 최고의 황금기를 보냈다. 하지만 실질 가치 이상의 자산 가치 상승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거품이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자산 가치 하락이 급격히 진행됐고 한껏 부풀러 올랐던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은 긴 불황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그 기간은 10년을 넘어 20년간 지속됐다. 이에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 20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하지만 3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의 영향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에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푸념 섞인 말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자본주의 경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버블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 발전사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 일본은 1868년경 기존의 막부 체제를 타파하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빠른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개혁인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의 동력으로 삼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경제발전과 함께 군사대국, 제국주의 길을 걸었다. 

 

 

 



일본은 이를 대외 팽창과 침략전쟁으로 잘못되고 이용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해 중. 일 전쟁을 일으켰고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통해 제 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 됐다. 무모한 전쟁은 일본의 전쟁은 패전으로 연결됐고 일본은 전범국으로 전락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군정을 실시하며 전후 처리를 했다. 

애초 미국인 전범국인 일본의 경제 재건을 늦추고 일본의 전쟁국가로의 부활을 막으려 했다. 이에 미 군정이 주도하여 만든 평화 헌법에는 일본은 자체 군대를 가질 수 없고 전쟁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후 빠르게 들어선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체제가 일본 경제가 기사회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서 동북아 지역에서 소련, 공산주의 세력 확장은 큰 위협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막아낼 중요한 거점으로 여겼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보루로 그 중요성이 커졌다. 이에 미국은 일본의 경제 부흥을 위한 지원으로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전쟁 관련 전범 인사들 상당수가 단죄되지 못하고 일본의 지도층 인사로 남았고 정치세력을 형성해 전후 일본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일본에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일본은 전쟁의 병참 기지로 전쟁 특수를 누렸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을 위한 무기를 생산하던 각종 전범 기업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화했고 파괴된 공장이 복구되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런 기업들의 생산능력 회복은 일본 경제 회복에 큰 호재였다.

여기에 1951년 전후 처리와 배상 문제를 협의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오히려 미국과 일본의 안보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안보 우산을 제공받고 군비에 들어갈 예산을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를 중화학 공업 발전 등에 투자했다.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는 전쟁 상황 등이 겹치며 관련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후 배상 문제도 협의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우리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건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말았다. 

 

 

 



일본은 미국의 보호와 지원 속에 한국전쟁의 특수 등이 겹치며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미국은 그들의 반도체 기술을 일본과 공유했고 이를 토대로 일본은 경제를 고도화하고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에 일본은 중화학 공업 외에 전자산업까지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일본은 1960년부터 가전과 다양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했다. 가전 분야에서 일본은 세계 강국으로 우뚝 섰다. 

이런 발전을 바탕으로 일본은 1964년 신칸센으로 불리는 초고속 열차를 개통했고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며 전후 경제 회복과 그들의 번영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이후 일본은 1970년대 경제대국이자 기술대국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일본은 워크맨이라 불리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와 휴대용 TV 등 혁신적 전자제품을 선보이며 산업의 트렌드를 주도했다. 

기술 강국 일본의 발전은 1980년 자동차 산업으로 확장됐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는 자동차 산업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일본의 자동차는 고유가 시대 뛰어난 연비와 합리적 가격으로 미국과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다가갔고 일본 차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며 일본의 수출의 또 다른 주 품목이 됐다. 메이드 인 일본의 제품은 각 부분에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당연히 일본의 국가 위상도 커졌다. 그들의 문화, 예술 역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런 일본 경제의 급부상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불균형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미국에서 엄청난 무역 흑자를 유지했다. 일본이 미국 시장에서 돈을 긁어가는 사이 미국은 제조업의 부진과 함께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제 불황은 경기 침체와 실업자 증가로 이어졌고 미국 내 일본에 대한 여론 악화로 연결됐다. 미국인들에게 일본은 경계의 대상이 됐다. 집회에서 일본 차를 부수는 등의 과격한 형태로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의 급부상은 미국이 일본의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심각한 무역 수지 불균형 현상을 개선해야 한다. 이는 미국의 정치세력들에게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미국은 일본에게 그들의 시장 개방과 환율 조정을 통한 엔화 가치 상승을 강력히 종용했다. 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인기는 여전했고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다. 

미국인 또 한 번의 협의를 통해 일본에 통상과 환율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 1987년 선진국들의 루브르 합의 이후 일본은 큰 폭의 금리 인하와 시장 개방을 했다. 금리의 인하는 통화량의 증가를 불러왔다. 시중에는 자금이 넘쳐났다. 기업들의 호황에 금리 인사라는 선물이 더해지면 수익이 크게 늘었다.

 

 

 



호황의 경제는 기업들의 인력난으로 이어졌다. 기업은 신규 인력 충원에 혈안이 됐고 입사자에게 차량이나 각종 보너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면접자에게도 두둑한 면접비를 지급하기도 했다. 이에 면접을 보러 다니기만 해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임금의 상승은 불가피했다. 반대로 높아진 임금으로 기업에 취업을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년층들도 늘어났다.

이런 상황은 뜻하지 않은 흐름을 만들었다. 시중에 풍족한 자금은 투자처를 찾아 부동산과 주식 등으로 유입됐다. 투자 대열에 보통 사람들도 다수 가세했다. 부동산 시세가 급등했고 주가지수도 사상 최대를 넘어섰다. 부동산은 1984년을 기준으로 1980년 내 후반까지 평균 3배 이상의 상승했다. 이런 투자의 행렬에는 기업들도 동참했다. 풍부한 자금을 기술 개발이나 시설 투자에 사용하기 보다 자산 투자에 활용했다. 그것이 더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금의 유동성은 금융기관의 대출 경쟁으로 이어졌다. 금융기관들은 담보비율을 내리거나 대출 심사 기준을 완화하는 등의 방법으로 대출을 하려 했다.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대출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자금은 이제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 등 해외 중요한 빌딩 등이 일본에 매각됐다. 미국의 경재 수도라 할 수 있는 뉴욕을 상징하는 빌딩들도 다수 일본인이나 기업의 소유가 됐다. 심지어 대형 영화사도 일본에 매각됐다. 일본의 이러한 광폭 투자는 한때 일본 도쿄의 부동산을 팔면 미국 전체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일본에는 모든 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시절이었다. 수출의 비중이 컸던 일본 경제의 내수 비중도 커지고 확대됐다. 근검, 절약의 이미지가 강했던 일본인들이었지만, 적극적인 소비에 나섰다. 소비의 증가는 과소비 현상으로 연결됐다. 일본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 명품시장과 예술품 시장에서도 그들을 큰손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자금은 전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야쿠자 등 일본의 범죄 조직들까지 이를 활용해 부를 추적하고 조직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런 번영의 시간은 갈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일본 주식 시장의 폭락과 함께 한껏 부풀러 올랐던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다. 일본 중앙은행은 지나친 경제 버블을 해소하기 위해 금리 인상과 대출 규제 등 통화량 조절에 나섰고 이는 부동산 가격 하락과 함께 부실채권 증가를 불러왔다.

이미 금융권의 무절제한 대출 경쟁으로 인해 부실채권의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었다. 중요한 담보였던 부동산 가치 하락은 담보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 대출 금리 인상을 견디지 못한 이들의 부동산 매물이 쏟아지면서 부동산 가격 하락은 그 가파르게 일어났고 금융기관의 부실도 크게 증가했다. 이는 금융기관의 부실과 투자자들의 손실까지 연쇄 효과로 이어졌다. 

한껏 부풀러 올랐던 풍선이 터지듯 일본 경제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한번 떨어진 자산 가치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국민들의 실질 소득과 자산도 감소했다. 이는 소비 위축과 함께 경기 침체로 연결됐다. 부채로 연명하던 기업들 역시 높아진 이자 부담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를 맞이하는 상황이 속출했다. 일본의 호황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일본 정부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양적 완화를 위해 통화 공급을 늘리고 금리를 제로 금리 수준까지 인하하는 등의 경기 부양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1995년 고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관서 대지진으로 인해 효과가 반감됐다. 파괴된 산업기반 시설 등의 복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 사이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다. 이미 많은 기업들은 높은 부채비율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금리 인하에도 깊은 경기 침체를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에 1997년과 1998년 사이 한국의 IMF 사태를 불러온 아시아 지역의 금융 위기도 일본 경제에 주름살을 더했다. 일본은 그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주요 교역국의 경제 위기는 일본 경제에도 악재였다. 이는 금융기관에 더 치명적이었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다수의 금융기관이 파산했다. 기업에 금융기관까지 일본에는 연이은 기업들의 파산 소식이 줄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 사회의 분위기는 크게 침체했고 나라 전반에 활력이 떨어졌다. 경제 위기는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물가는 하락하지만, 소비가 없고 경지 침체가 이어지는 디플레이션 현상이 지속됐다. 이는 기업들의 투자 감소와 산업 전반의 위축을 불러왔다.

그 사이 미국은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IT 산업 등 첨단 산업을 선도하며 다시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잡아 나갔고 IMF 사태를 겪으며 힘겨운 구조조정의 시간을 보낸 한국도 재도약의 기회를 잡고 경제를 다시 발전시켰다. 중국의 경제 성장도 무섭게 진행됐다. 전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일본 경제의 위상은 점점 떨어졌다.

2000년대 들어 일본 정부는 보다 강력한 양적 완화와 파격적인 제로금리 정책, 적극적인 민영화와 부실기업 정리, 엔화 가치 하락 등을 통해 수출경쟁력 회복을 통해 반전을 모색했다. 일정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파생된 세계 금융위기가 살아나는 일본 경제에 부담이 됐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는 다시 일본 경제에 치명상을 남겼다. 막대한 재정 부담이 뒤따랐고 국가부채는 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디플레이션 현상이 다시 재현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일본 아베 정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 양적완화를 진행했다. 돈을 마구 찍어 시장에 공급했고 이는 디플레이션 상황을 일정 완화했고 기업 실적을 개선했다. 실업률이 크게 감소하는 등 일정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경기 부양으로 인한 후유증은 상존하고 있다. 

또한, 긴 장기 불황으로 인해 결혼과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인구의 고령화가 급속이 진행됐다. 국가 재정 지출은 늘어나지만, 일할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국가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미래가 우려되고 있다. 1990년 초반 이후 성장하지 못하는 일본의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물론, 일본은 여전히 풍부한 외한 보유고가 있고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순 채권국이다. 국가부채의 채권자들은 대부분 국내에 있다. 자금의 해외 유출 가능성이 낮다. 또한, 엔화의 기축통화로서의 위상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경제 상황은 일본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20년 그리고 30년까지 버블경제의 잔상은 여전히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1990년대 후반 급격한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 자축했지만, 취약한 경제구조와 관치금융, 허약한 기업들의 체질은 위기에 취약성을 드러냈고 IMF 경제 위기로 이어졌다.

그 기간 우리는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고 엄청난 구조조정의 시간을 보내며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고통의 시간을 경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과 금융기관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양산됐다. 국민들은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장롱 속 금을 내놓는 등 위기 극복에 동참했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이에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재도약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심한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가 만들어지고 미래 세대인 청년층의 어려움이 커졌다. 일본보다 더한 낮은 출산율과 급속한 노령화는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IT 강국에 이어 문화 강국으로 거듭난 우리나라지만, 지금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시 큰 어려움을 봉착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일본의 버블 경제 시절과 같이 부동산과 주식, 가상화폐 등에 자금이 몰리는 경제적 불균형 상황은 언제든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제조업 등 실물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돈이 돈을 버는 왜곡된 경제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부의 정책적 역량이 필요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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