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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지금의 여의도 공원 자리였던 여의도 광장에는 '국풍 81'이라는 대규모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는 전국 대학생, 민속, 국학 큰 잔치라는 부제가 붙어있었고 한국 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 KBS가 주관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실상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주도하에 열렸던 관제 축제였다. 

이 축제는 이전 각 지역 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전국 각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모여들었고 축제 기간을 통틀어 1천만 명 이상의 참가하거나 관람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축제 기간 서울 시내의 버스 노선들은 여의도 축제장으로 연장 운행됐고 여의도 일대에서는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에도 지속 시행 중이던 야간 통행금지가 일시 해제됐다. 정권 차원의 지원 속에 국풍 81은 이전에 없었던 거대한 잔치 마당이었다. 

축제 기간, 여의도 광장에서는 거대한 풍물 시장과 먹거리 장터, 전통 민속 공연을 포함해 다양한 공연들이 열렸다. 그중 대학생 가요제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었고 그 가요제 수상자 중 한 명은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고 최고 가수로 자리하기도 했다.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 시간 제약마저 사라진 여의도 광장에는 마땅히 여가시간을 보낼 장소가 없었던 국민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특산물이나 먹거리가 소개되고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예로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의 단골 간식거리인 호두과자가 있었고 통영지역의 먹거리인 충무김밥 그리고 춘천 막국수 등도 국풍 81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국풍 81은 군사독재 시절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에 각종 검열과 단속으로 생활 전반이 통제됐던 시대를 살았던 국민들에게는 낯설면서도 신선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행사의 이면에는 1979년 12월, 12. 12 군사 반란과 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한 쿠데타 과정을 거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정권의 국면 전환과 우민화 정책이 있었다. 또한, 권력 찬탈 과정에서 함께 진행됐던 방송관 언론 장악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기도 하다. 관제 축제에 있어 신문 협회와 한국방송공사가 앞장섰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리고 이 행사의 기획과 시행에는 전두환의 최측근 허문도가 있었다. 

신군부 정권은 그들의 쿠데타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방송과 언론 장악에도 철저했다. 그 작업을 지휘한 건 전두환의 최 측근 인사였던 허문도였다. 허문도는 언론사 기자 출신에 일본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기도 했고 메이지유신 관련 논문을 쓰기도 하는 등 친일 인사이기도 했다. 그는 언론인에서 국정원 등에서 요직을 거친 후 신군부에 발탁돼 언론 관련 각종 정책을 주도했다.

한편으로 정권에 대한 홍보 등 공보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태생적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던 전두환 정권에서 허문도는 나치 독일의 선전부장이자 각종 선동 공작을 주도했던 히틀러의 측근 인사 괴벨스과 같은 존재였다. 

허문도는 1980년 11월 단행된 언론 통폐합을 주도한 인사였다. 전두환 정권은 당시 언론사와 방송사를 강제로 통폐합하고 그 수를 제한했다. 그로 인해 다수의 방송국이 KBS로 통합되어 국영화되고 지역 신문사 상당수도 문을 닫았다. 이는 보다 효율적으로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고 관리하려는 정권의 필요에 의한 조치였다. 이를 위해 신군부는 당시 언론사와 방송사 사주들을 협박, 회유해 각서를 받고 통폐합 작업을 단행했다. 통폐합 과정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다수 해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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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론 통폐합의 가장 생생한 장면은 삼성 계열의 방송국 TBC를 한국방송공사에 강제 편입하는 과정이었다. 언론 통폐합을 통해 TBC는 졸지에 그 간판을 내리고 모든 임직원들이 KBS 소속 직원이 됐다. 1980년 11월 30일 TBC는 고별 방송과 함께 방송국 역사를 접어야 했다.

신군부 측은 이 고별 방송과 관련해 사전 검열된 대본의 내용만 방송할 것과 이완 관련해 울음을 터뜨리는 등 감성적인 장면을 보이지 말 것을 지침으로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KBS, MBC와 함께 3대 방송국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방송국의 구성원들에게 이런 변화는 큰 충격이었고 그 설움을 제어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는 유명 탤런트나 성우 등도 방송국 소속이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방송인들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방송국은 직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직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상황을 담담히 넘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슬픈 분위기 속에 고별 공연을 하던 가수마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해당 가수와 울음을 터뜨리는 등 언론 통폐합에 부정적 감정을 드러냈던 상당수 연기자들이 상당 기간 방송 출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신군부 측은 방송, 언론 통폐합을 통해 친 정권적인 언론 환경을 만들려 했다. 이를 통해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을 통해 탄생한 정통성 없는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완전히 제어하려 했다. 또한, 방송과 언론을 정부 발아래 두고 그들 입맛에 맡게 조정하도록 했다.

이에 각 방송국과 언론사는 서슬 퍼런 신군부 정권에 감히 맞서지 못하고 찬양 기사만을 쏟아냈다.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 운동이나 재야 세력들의 활동은 왜곡되거나 잠시 언급되는 정도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을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후 방송사들과 언론사들은 권력과 돈 등 힘 있는 이들과 유착했다.

 

 

 



누구보다 공정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해야 할 언론들 역시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귀속됐고 언론인들 역시 독과점 상태의 언론 환경에서 특권층이 되어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의 희미해져 갔다. 이런 왜곡된 언론 환경은 충분한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 지금도 그때의 타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언론 통폐합 이후 방송과 언론은 전두환에 대한 찬양 기사와 보도를 쏟아냈다. KBS와 MBC 뉴스에서 가장 첫 소식은 무조건 전두환의 동정이었다. 뉴스 시작이 매일 전두환이 되면서 국민들에서는 양사의 뉴스에 대해 시보를 울리는 땡 소리와 함께 전두환이 등장한다고 해서 땡전 뉴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정권에 대한 찬양과 우호적인 뉴스와 보도는 언론의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내용이었다. 사실상 정권의 홍보국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마침 박정희 정권 시절 금지됐던 컬러 TV 방송이 실시되는 등 미디어 환경에도 변화가 생기는 시점이었다. 이런 변화의 수혜를 전두환 정권의 사실상 독차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환경에서 국풍 81 역시 대대적인 홍보 속에 성황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으로 국풍 81은 독재 정권이 잘 사용하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신군부 정권의 우민화 정책은 3S 정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내용은 스포츠, 섹스, 스크린으로 요약된다. 

전두환 정권 당시 야구와 축구 등 다수의 프로스포츠가 시작됐다. 모두 정권의 주도로 재벌 기업들에 압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그 결과 1982년부터 프로야구 시작되고 프로 축구 리그가 뒤를 이었다. 심지어 민속 운동인 씨름도 프로스포츠화됐다. 여기에 1988년 올림픽 유치에 민관의 역량을 집중해 이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또한, 심야 통행금지를 1982년 해제하면서 유흥업소 등 심야 유흥문화가 급속히 일상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이와 관련한 규제도 완화되면서 유흥가과 환락가가 곳곳에 자리하며 밤 문화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런 유흥업소들을 중심으로 이전에는 없었던 조직폭력배들이 세력을 키우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여기에 영화에 대한 검열 규제를 완화하면서 각종 애로 영화가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상영됐다. 검열이 완화됐지만, 사회비판적이거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에게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일련의 조치들로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을 희석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국풍 81 역시 그런 노력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고대 로마제국 시대 콜로세움이라는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연을 보여주었던 것이 연상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이런 시도는 그들의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국풍 81 행사를 하면서 대학생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했다. 이를 통해 여전히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고 군사정권 반대 시위를 지속하던 대학가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유화책이기도 했다.

마침 국풍 81이 시작된 시점은 전두환 정권에는 광주사태, 광주 폭동을 진압한 1주기가 되는 시점이었다. 신군부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의 광주민주화운동의 사료들은 정권 차원에서 철저하게 숨겨지고 왜곡됐지만, 외신들이 담은 영상과 사진 등 자료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실상이 알려지고 있었고 신군부 정권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분노와 광주 시민들의 희생에 대한 강한 부채의식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국풍 81은 광주민주화 운동 추모 분위기를 희석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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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바람과 달리 국풍 81에 대한 대학생들의 참여는 기대보다 크게 저조했다. 정부가 참여를 위해 공을 들였던 사회 저명인사들과 예술인들 상당수도 이를 거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두환 정권은 각종 공연과 행사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에게 별도 사례금을 지급하기도 했지만, 대학생들의 참여율을 크게 올라오지 않았다. 당시 대학생들은 사회에서 엘리트였고 여론 주도층이기도 했다. 방송, 언론 등을 통해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용공세력의 낙인을 찍으려 했지만, 대학생들의 반정부 성향은 이후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고 더 조직화됐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 졸업생이나 군 복무 중인 학생들을 동원해 대학생들의 공연이라고 위장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국풍 81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였지만, 전두환 정권이 본래 달성하려 했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축제였다. 

국풍 81은 우리 현대사에서 남을 매우 크고 화려한 축제였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슬픔이 함께 하고 있었다. 또한, 불편한 우리 언론사를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국풍 81은 결국, 단 한 번의 행사가 됐고 전두환 정권 시기 흑역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국민의 사상과 생각을 정권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고 역사의 오점만을 남긴다는 점을 국풍 81은 보여주고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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