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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를 정리하면서 꼭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이 찰리 채플린이다. 지금도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챙 짧은 중절모에 지팡이 짧은 바지에 코 수염을 한 우수꽝스러운 떠돌이 캐릭터는 그를 대표한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의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 그 중심에 있었고 무성영화 시대를 이끌었다. 영화사를 논할 때 그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매우 크다. 

하지만 한편으로 채플린은 미. 소 냉전시대 극심한 이념 대립의 흐름에 휩쓸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미국 영화계에서 배제되며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부정당했던 불운한 영화인이기도 했다. 또한, 영화인으로서 받았던 찬사 이면에 남다른 여성 편력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했던 말처럼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에 딱 맞는 삶을 살았던 채플린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미국 영화산업의 중심 할리우드에서 큰 활약을 했지만, 출생은 영국 런던의 빈민가였다. 1889년 태어난 채플린의 부모는 뮤지컬 배우이자 가수였다. 태어날 때부터 채플린은 배우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유년기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이로 인해 갈등을 겪은 부모는 채플린이 유아기 일 때 이혼했다. 채플린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뮤지컬 배우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목에 이상이 생기면서 무대에 설 수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채플린은 목소리 이상으로 무대에서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올라 공연하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로서는 배우로서의 데뷔 무대였다.

 

 

 



하지만 배우로서 삶을 지속하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정상적인 삶이 어려워진 어머니를 떠나 채플린은 아버지에게 양육됐다. 그의 배우로서 자질을 눈여겨 본 아버지는 채플린은 아동극단에 입단시켰다. 채플린에게는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의 배우 인생은 그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는 그로 인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병증은 더 악화됐다. 어린 채플린이 아동극단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채플린은 극단을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채플린은 배우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03년 셜록 홈스라는 작품의 아역배우로 무대에 선 채플린은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배우로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채플린은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희극 극단인 키노 극단에 입단하게 됐다. 그곳은 지금도 코미디의 중요한 소재인 슬랩스틱 코미디를 최초로 선보이는 등 희극에서는 매우 독보적 위치에 있던 극단이었다. 10대의 나이에 채플린은 남다른 재능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영국에서 희극배우로 스타덤에 올랐다.

영국에서의 성공은 미국 할리우드 진출의 발판이 됐다. 키노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하면서 메인 배우였던 채플린 역시 미국에서 그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연예산업이 성업 중인 미국에서의 인기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됐다. 채플린은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에 발탁되어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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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로서 시작은 쉽지 않았다. 기존 연극 무대와는 다른 제작 환경과 무성영화가 제작되는 영화 초창기 대사가 없는 연기에 적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채플린은 변화된 환경과 그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연기가 필요했고 대중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런 고민의 결과로 등장한 캐릭터가 채플린을 대표하는 떠돌이 캐릭터다.

떠돌이 캐릭터는 겉모습은 재미를 주고 있지만, 그 안에는 가난한 이민자와 노동자, 빈민 등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희화화된 캐릭터 속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은 영화인이 된 채플린의 작품의 방향성을 상징했다. 

이 떠돌이 캐릭터는 채플린의 뛰어난 연기력이 더해지며 대중들의 큰 인기를 얻었다. 1914년 한 해에만 수십 편의 영화가 제작됐고 흥행에 성공했다. 채플린은 흥행배우로서 자리를 잡았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서 채플린은 지독한 완벽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당시로는 제작비의 제약으로 금기시되던 재촬영을 통한 편집 기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영화의 완성도에 중점을 영화감독이었다.

이런 성공은 채플린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다. 그의 캐릭터까지 덩달아 큰 인기를 얻었고 캐릭터 관련 마케팅도 성공하면서 부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채플린은 20대의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됐다. 

채플린은 지속적인 영화 성공 속에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더 강하게 영화 속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어깨 총'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금기시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깬 작품으로 제작 당시 큰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전쟁의 비극을 적절한 풍자와 희극적인 장면들로 채우면서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반전 메시지를 함께 전하면서 큰 호응까지 얻었다.

 

 

 



소재의 다양성까지 더한 채플린은 30살이 되던 1919년 자신이 직적 영화제작사를 설립하며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더 공고히 했다. 마침 당시는 미국 경제의 대호황기로 영화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채플린의 인기가 더해지며 그의 영화제작사는 대형 제작사로 큰 발전을 했다. 1921년 작 '키드'는 산업화 시대 빈민들의 삶을 극화한 작품으로 불우했던 그의 유년기를 자전적 영화로 작품성과 흥행에 모두 성공하며 그의 역량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그의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1921년 그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수많은 인파가 그를 환영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영국에서 극단 생활을 했을 당시 첫사랑이었던 10대 소녀와의 재회를 꿈꾸었지만, 그녀가 당시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첫사랑과의 비극적 이별은 훗날 그의 여성관 결혼관에도 영향을 줬다. 

이후에도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던 채플린이었지만, 영화산업에 큰 변화가 일어나며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927년 최초의 유성영화가 제작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 유성영화에 대중들은 크게 열광했다. 기존 무성영화제작사들도 이에 대응해야 했다. 대표적인 무성영화 스타였던 채플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채플린은 이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무성영화를 고수하며 자신만의 영화관을 지키려 했다. 그 과정에서 눈먼 소녀와 떠돌이의 사랑을 담은 영화 '시티 라이트'는 1929년부터 찾아온 미국 대공황 시기 고통받던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는 영화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유성영화로의 대 전환기 속에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나갔다.

 

 

 



1936년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던 타임스'가 제작됐다. 이 영화는 그의 세계관이 집대성된 영화로 산업화 시대 점점 소외되어 가는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었다. 특히, 자동화된 기계 문명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 그 산업의 부속품화 되는 인간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담으며 강렬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 작품과 관련한 채플린은 인도 독립 영웅이었던 간디와의 만남을 통해 큰 영감을 얻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모던 타임스'는 세계 영화사에서 최후의 무성영화였다. 채플린에게는 그를 대표했던 떠돌이 캐릭터와의 작별을 고하는 매우 상징적인 영화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채플린은 사회성 짙은 영화를 지속 제작했다. 이 중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를 희화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제작 당시 상당한 우려가 있었지만, 채플린은 제작을 강행했다. 당시 서구 진영에서는 나치 독일의 위협보다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이 더 문제였다. 히틀러와의 원만한 관계가 중요하던 시기 그를 풍자하는 영화제작은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히틀러가 침략 야욕을 본격화하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은 더 탄력을 얻었다. 1940년 이 영화가 발표되자 엄청난 관심을 불러왔고 흥행 역시 매우 성공적이었다. 마치 미래를 예견한 듯한 선견지명까지 보인 이 작품은 채플린의 역사에서 가장 큰 흥행작으로 남아있다. 

채플린은 이에 머물지 않고 그의 영화관을 유지하며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계속 제작했다. 이런 작품 성향은 시대 흐름의 변화 속에 그의 영화 인생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질서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는 미국 내 강력한 반공주의를 형성하게 했다. 소련의 지속적인 세력 팽창과 핵 개발 성공은 미국 내 공포심을 더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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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가 주도한 반공주의 운동은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발전했다.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사회를 지배했다. 이 시기 진보적 정치인과 문화, 예술인 사회 인사들은 공산주의 자로 낙인찍히며 큰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문화, 예술계에도 소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져 숙청작업이 전개됐다. 사회비판적  성향의 영화를 제작하던 채플린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47년 발표작인 '살인광 시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속에 살인자로 전락하는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 사회비판과 반전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이 영화는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반 애국주의 영화라는 큰 비판 속에 흥행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채플린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은 미국 수사기관에서 그를 요주의 인물로 지속 사찰하는 인물이 되도록 했다. 미국 수사기관은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의 지속 감시했다. 심지어 그가 태어난 영국의 정보기관에도 그의 공산주의자로서의 이력 검증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미국 수사기관은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언론 공작을 노골화했다. 그가 미국에서 영화인으로 큰 성공을 하면서도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문제 제기를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들과의 관계를 노출해 대중들의 비난을 받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채플린은 공식적으로 4번의 결혼을 했는데 그 대상이 대부분 10대 미성년자들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극히 사적인 문제였고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부정당할 일은 아니었다. 수사기관의 공작은 이에 그치지 않고 채플린과 한때 연인 관계였던 여성을 사주해 거짓 친자확인소송을 하도록 하는데 이르렀다. 매우 치졸한 공작이었지만, 채플린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로 인식된 채플린은 미국 수사기관에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에 비례해 그에 대한 공격도 집요했다. 그럼에도 채플린은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그의 미국 생활은 의도하지 않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1952년 영화 개봉과 관련해 영국으로 출국한 채플린에 대해 미국 정부는 그의 입국을 거부했고 추방 조치를 취했다. 채플린은 그의 삶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미국 할리우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채플린은 극심한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단절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스위스에 정착했고 유럽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큰 상실감이 작품에 대한 열정을 식게 했을 수도 있고 영화산업의 주류에서 멀어진 그가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그는 영화 역사에 남을 위인이었지만, 오랜 세월 그 존재가 배척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가 다시 할리우드 무대에 서게 된 건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그 시상식에서 그는 공로상을 수상했다. 영화인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던 할리우드에 채플린은 노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에게 시상식장의 모든 이들은 기립박수로 경의를 표했고 채플린 역시 감정이 복받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채플린은 긴 세월이 지나 그의 명예를 회복했고 1977년 세상을 떠났다. 한 마디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 삶 자체가 한편의 영화였다. 그의 삶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었고 시대상도 담겨있었다. 그런 굴곡진 삶 속에서도 채플린은 영화인으로서 사명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이런 그의 의지는 그를 위대한 영화인으로 지금도 기억하게 하고 있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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