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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이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장면이었던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시민들이 당시 권력 찬탈을 위한 내란을 획책하던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맞서 민주 정부 수립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주의 항쟁이었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운동이 아닌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의로운 일이었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집권 시나리오의 실현을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단행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김대중과 김종필 등 유력 정치인들을 체포 구금했다.

이어 신군부 세력에 대한 반대 여론의 중심에 있었던 전국 각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한편, 언론 통제를 단행했다. 그 일환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대학에는 계엄군이 진입해 학교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그들을 반대하는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부대인 공수부대에 시위 진압 훈련을 이미 실시하며 대비하고 있었다. 이는 향후 그들의 반대하는 시위에 대한 무지한 진압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이런 신군부 세력의 권력 찬탈은 매우 순조로웠다. 이미 12.12 군사 반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한 권력 장악 작업이 완성단계에 있었고 언론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신군부 세력을 막을 이들이 사실상 없었다. 신군부에 맞섰던 대학생들 역시 유혈사태에 우려해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그 세력이 와해됐다. 

하지만, 광주 지역은 달랐다. 광주 지역의 대학에 진입한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위 진압으로 대학생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에서까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내 이웃과 가족이 군에 의해 죽거나 다치는 상황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도 시위대에 참가하게 했다. 이에 광주에서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하며 반 신군부 시위대의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그때라도 무고한 희생에 대한 사과와 함께 폭력적인 시위대 대응 기조를 변화시켰다면 상항을 진정할 수 있었지만, 신군부는 강경 기조를 멈추지 않았다. 신군부 세력은 훗날 대법원 판결을 통해 명백하게 규정된 그들의 내란과 권력 찬탈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기 위해 그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진압해야 했다. 이런 기조는 광주시민들의 더 강하게 결속시키고 계엄군에 대한 반감을 더 키웠다. 

결국, 계엄군의 시위 진압은 무차별 발포로 이어졌고 수많은 희생자 발생으로 연결됐다. 전시 상황도 아니었고 무장도 하지 않은 시민들에 향해 군대가 총을 발사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는 현실이었다. 이에 시위의 양상은 무장투쟁으로 변모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무기고 등에서 무기를 입수해 무장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민군이 계엄군에 직접 맞섰다. 

시위대의 기세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이는 병력을 증원해 시위대를 더 강력히 진압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시위대의 무장 수준은 보잘것없었고 전투 경험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불의한 세력에 맞서겠다는 열정을 충만했지만,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시민군을 중심으로 광주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광주시민들은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했고 일상을 회복했다. 이곳을 취재한 외신들은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이후 광주 시내가 매우 평온했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고도로 훈련되고 뛰어난 화력으로 무장한 공수부대가 중심이 된 계엄군에게 시민군이 맞서 이기기는 애초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계엄군에 의해 교통과 통신이 두절되고 철저히 고립된 광주의 상황은 타 지역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외로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계엄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시민군이 버틸 수 없었다.

이에 지역 저명 인사들의 중재로 추가적인 유혈사태를 막기 위한 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5월 27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서 항쟁하던 시민군에 대한 계엄군의 전면 공격이 실시됐고 전남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은 모두 그 자리에서 사망하거나 생포됐다. 그렇게 5.18민주화운동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고 말았다. 

의로운 투쟁이었지만, 5.18 민주화운동은 이후 신군부 세력과 그들이 중심이 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됐다. 광주시민들의 투쟁은 불순분자들이 주동한 폭동이나 난동으로 규정되고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사태가 됐다. 함께 저항한 이들은 폭도이거나 간첩, 좌익 용공 불순분자였다. 

이는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연결되며 지역민들에게 큰 아픔이 됐다. 분명 의로운 일을 했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무의미해졌다. 신군부 세력에게 폭도로 규정된 이들과 그 가족들은 극심한 차별과 냉대 속에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침묵을 강요받아야 했다. 사회 활동 전반에도 큰 제약이 발생했다. 불의한 권력의 폭력의 희생자였지만, 그들은 긴 세월 침묵 속에 살아야 했다. 그 시대에는 광주사태라는 말을 해도 좌익 빨갱이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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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학가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외신 기자들의 담은 영상과 사진을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담긴 기록들이 알려졌다. 이는 무기력증에 빠졌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큰 자극제가 됐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고 이를 가리려 해도 외신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진 상황이었고 그 사실들이 전해지는 걸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광주는 큰 아픔이었다. 광주에 대한 강한 부채의식은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더 강하게 신군부 세력과 맞설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이후 군사정권이 문민정부로 대체되면서 광주사태로 왜곡됐던 5.18 민주화운동은 재평가됐고 본래 자리를 되찾았다.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국가 차원의 기념식이 됐다.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도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잠든 망월동 묘역도 새롭게 단장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18 민주화운동은 폭도들이 일으킨 광주사태가 아닌 민주화운동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40년 하고도 3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혔다고는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북한군 개입설 등 5.18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폄하하고 심지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 극우 인사들은 그와 관련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고 SNS나 유튜브를 통해 그 주장을 사실인 양 유포하고 있다. 그에 동조하는 이들도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그와 관련해 형사 기소가 되고 처벌을 받아도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도 그와 관련한 주장을 하면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의 주장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은 위원회 활동 등을 그 진상이 보다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나 고문 등 가혹행위,  성범죄 등 신군부 세력의 죄상이 추가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어 더해 당시 신군부의 학살이나 다름없이 5.18 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해 미국이 이를 묶인 또는 방조했다는 의혹도 드러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증거 앞에서도 신군부 인사들은 이와 관련해 누구도 진심 어린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1997년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과 2인자였던 노태우의 내란 등 범죄 관련 재판에서 대법원은 신군부의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내란의 완성을 위한 일이었음을 명백히 했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정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심지어 대표적인 보수 논객조차 기고문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반공 민주화운동이라 규정하며 극우 세력들의 북한 개입설을 전명 부정하기도 했다.

이러함에도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 역시 줄 곳 이를 부인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함께 정권찬탈에 나섰고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에 올랐던 노태우가 그의 가족을 통해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적 평가는 점점 5.18 민주화운동이 불의한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로 규정되고 있지만, 발포 명령자를 포함한 당시의 진실에 있어서는 그 실체가 다 밝혀지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당시 피해자들 외에 가들 가족들의 고통과 수난의 역사에 대해서도 아직은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5월 18일 TBS에서 방송한 마흔세 살 오일팔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태어난 5.18 둥이들의 삶을 재조명하며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세 명의 아버지들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대의 최일선에 있었고 시민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고 시민군으로 활약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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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일을 했지만, 그들은 당시 계엄군의 발포로 사망하거나 계엄군에 잡혀 극심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시민군에 가담했다고 계엄군의 마지막 공세 직전에 현장을 벗어난 이는 살았다는 안도감 이전에 큰 죄책감 속에 마음의 짐을 않고 남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태어난 지 2개월 된 갓난 아기가 있었던 신혼부부의 남편이었고,지역 공동체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활동가 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던 청년이었다. 

그들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신군부의 내란, 비상계엄 확대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이로 인한 무고한 희생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일상의 삶을 지속할 수 없었고 계엄군에 대항하는 시위대에 시민군에 합류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송에서는 당시 그들의 상황과 마음을 남은 가족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현극 형식으로 보여주며 보는 이들의 이해도를 더 높여줬다. 또한, 왜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해야했는지에 대한 이해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폭도의 가족으로 질시와 멸시속에 살아가야 했다. 집안의 가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사회와 이웃들의 시선이 그들을 더 괴롭게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슬픔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많은 5.18 민주화 운동 유족들처럼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남은 가족들은 먼저 떠난 아버지, 남편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가족들은 먼저 간 아버지나 남편이 폭도가 아니었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뇌를 거듭했을지도 이해하게 됐다.

방송에서는 유가족들이 아버지와 남편을 기억하는 과정을 거치고 수십년 세월 응어리진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한 과정에서 음악과 무용 등이 더해지며 마음을 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역량을 다한 예술인들의 연주와 노래 등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방송 링크

https://youtu.be/yqRFMIG3BeY

 



그동안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과 사고에 대해 빨리 잊고 미래로 나가자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역사는 우리 현재의 삶과 미래 삶과 의도하던 하지 않던 연결되어 있다. 그 그렇게 쌓여진 역사의 토대 위에 우리 삶이 존재한다.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은 3.1 운동을 토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이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분명히 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내란으로 권력을 찬탈하려는 세력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저항운동이었다. 이런 민주화운동을 폄하고 심지어 폭도로 규정하는 이들은 내란을 획책된 반민주세력을 옹호하는 것과 같다. 

최근에는 5.18 민주화 운동의 왜곡과 관련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를 규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이념 성향과 상관없이 대통령이 참석하고 여.야가 함께 하는 모습은 분명 이전과 달라진 풍경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파적 이익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등의 행위는 끊이지 않고 있다. SNS 상에서도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 멸시와 더불어 관련 글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심을 명시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5.18 민주화 운동은 결코 어느 특정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아닌 민주주의 역사를 이어지게 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희생이 있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지켜질 수 있었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권력을 비판할 수 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이제 남은 이들은 그 역사를 더 연구하고 알리고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1980년 5월, 이 땅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불의한 권력에 맞선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TBS의 마흔세살 오일팔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른 관점에서 살피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사진 : 픽사베이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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