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될 정도로 국가와 민족 간 끊임없는 분쟁이 이어졌다. 전쟁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많은 상처를 남기지만, 전쟁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 현대에서 와서 제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었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가깝게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반 이스라엘 무장 단체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전면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 가자 지구 전쟁은 뉴스의 중요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6.25 한국전쟁의 아픈 기억이 있고 그 전쟁은 휴전 상태로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전쟁은 대량 살상과 파괴를 불러오지만, 그 한편에는 전쟁과 무관할 이들의 학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에게 대한 잔혹한 학살이 대표적이다.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해도 각종 전쟁과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학살은 민족이나 종교와 관련한 편견과 혐오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외에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학살,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당시 타 민족에 대한 학살, 캄보디아 독재자 폴포트에 의한 대량 학살 등 도저히 사람이 한 일이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사람들은 학살의 가해자들에 대해 크게 분노하기도 하지만, 이내 우리 기억 속에서 그 사실들은 사라져간다. 

 

 

 

 



끊이지 않는 전쟁 그리고 학살의 잔혹사 



이와 관련해 세계적인 철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는 끊이지 않는 인간의 인간해 대한 학살과 폭력에 대해 철학의 관점에서 그 원인과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인류의 역사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차별과 멸시, 혐오의 정서는 항상 존재했고 이는 타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 악마나 괴물로 치부하는 극단적 단계로 이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는 이를 비인간화로 규정했다.

즉, 특정한 대상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 심지어 학살도 정당화할 수 있다. 학살의 가해자들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비판을 받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 인간 이하의 존재들을 단죄했다는 생각이 함께 하고 있고 죄의식마저 상실하다고 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자행된 민족 간 대학살 당시 가해자였던 이가 누군가를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특별한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설명하기 어려운 안개나 암흑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라는 증언은 비인간화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르완다 내전 외에도 현대사 곳곳에 등장하는 대학살에서 가해자들 중 상당수는 그때의 행동에 대한 반성과 후회보다는 그들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급급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과 함께 잔혹한 식민 지배를 했고 수많은 전쟁범죄를 자행했던 일본 역시 그때의 일제 대한 사과나 배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고 왜곡하기는 일도 서심지 않고 있다. 이에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학살의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화의 가장 큰 피해자로 언급되는 이들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고대 로마시대 이후 나라를 잃고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 살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그 지역에 정착해 살면서 심한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대인들에게 대한 차별과 폭력이 더 극심해졌다.

유대인들은 교육과 직업 선택에 자유가 없었다. 또한, 사회 혼란기가 찾아오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징벌되는 대상이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사망하게 한 흑사병 창궐기, 유대인들은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유대인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규정하는 비인간화 


유대인 학살의 정점은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자행했던 홀로코스트였다. 나치는 집권 이후 유대인에 대한 적대 정책을 노골화했고 당시 독일 사회문제의 근원이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선동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폭력을 유도하고 국가가 이를 주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는 유대인들은 특정한 장소에 수용한데 이어 유럽 곳곳에 절멸 수용소를 만들고 그들을 강제 이주해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수용소에서 학살됐다. 나치에게 유대인은 박멸해야 한 해충이었고 그들은 대다수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유대인 외에 집시나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도 희생됐고 슬라브 민족 등 다른 민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됐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은 비인간화와 그에 근거한 비인간화 행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는 국가가 주도하는 특정 대상에 대한 폭력의 예이기도 하다. 나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전행 후유증으로 인한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받고 있는 독일 국민들의 현실에 대한 우울감을 극대화하는 선동을 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고통이 더 큰 파멸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경고하며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마지막 단계로 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 문제의 원인에 유대인들에 있음을 선동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며 국민들의 단합을 촉구했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거나 이를 유도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링크 

 

 

https://home.ebs.co.kr/greatminds/vodReplay/vodReplayView?courseId=40023168&stepId=60023845&lectId=60397196

 

데이비드 L. 스미스 <인간 이하의 존재> 1강.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홀로코스트, 르완다 대학살, 원자폭탄... 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살해하는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던 데이비드 L. 스미스가 찾은 답은 ‘비인간화’였다. 인간이 ‘비인간화’에 빠...

home.ebs.co.kr

 



독일 국민들은 내부의 적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뭉칠 수 있었고 더 강한 독일이 될 수 있다는 나치의 선동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극한의 현실에서 나치의 선동은 한줄기 빛처럼 보일 수 있었고 그들 말대로 하면 더 나은 세상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치는 이런 선전 선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각종 홍보 영상을 제작해 상영하는 등 미디어를 이용했다. 나치의 선전, 선동 기법은 현대 정치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많은 정치인들은 오로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근거 없는 선전, 선동을 일삼기도 하고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을 조장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이 역시 비인간화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남. 북 분단과 이념 대립의 현실 속에서 독재권력이 전쟁의 위협을 강조하는 한편, 강력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그들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공산주의 세력, 좌경 용공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는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괴뢰정권이라 불렸고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은 괴뢰 정권을 이롭게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일어났고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가 발전한 지금에도 잊을만하면 색깔론을 들고나와 혐오를 조장하는 후진적 정치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악마화는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김일성 유일 체제를 확립하고 그 정권을 세습하는 김씨 왕조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남한을 괴뢰집단 등의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악마화했다. 혐오와 선동은 남. 북 모두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독재권력과 왜곡된 사고를 가진 정치 세력이 악용하는 비인간화 선동 


민주화가 진전된 지금도 우리는 특정 대상과 집단에 대한 혐오와 편견, 정치적 이해관계에 근거한 선동을 수없이 접하고 있다. 특정 지역, 성별, 장애인, 성소수자, 그 밖에 사회적 약자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이 밖에 정치 집단 간 반대 세력에 대한 혐오와 선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갈수록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를 악용한 거짓 선동과 혐오는 불만을 잠재울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특히, 극우 성향의 정치집단들이 이를 즐겨 활용하고 있고 국민적 호응을 이끌며 집권 세력이 되기도 한다. 이는 그 사회를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비인간화는 지금도 우리 삶을 파괴하고 있다.  

사람들은 잘못된 혐오와 누군가에 대한 편견과 폭력 행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가해자 군에 포함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가해자가 되곤 한다. 또한, 학살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속성에도 근거한다고 데이비드 L. 스미스는 설명한다. 그 설명 과정에서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신, 천사, 사람, 동물, 식물, 무생물 등으로 거대한 계급 구조가 존재하고 이는 사회 계층 발생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계급 구조의 밑단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그 대상에 대한 폭력과 탄압의 이유가 된다.

이와 관련해 본질주의라는 또 다른 개념이 등장한다.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고 그 사물이 무엇이게끔 하는 본질이라는 이론이다. 이는 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규정하는 게 아닌 주관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게 한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불평등이 애초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존재의 대 사슬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비인간화가 가지는 악마적 속성


이런 사회 계층화는 고대 국가가 생겨난 이후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근거가 됐고 신분제 사회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해왔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사회 계층화가 작용하고 있다. 그 속에서 인종, 민족, 사회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사회 계층화의 전통이 비인간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과도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 계층화 구조에서 상위 자리를 지향하는 본능이 있고 이는 보다 힘 있는 집단에 속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기꺼이 계층화의 밑단에 자리한 이들에 대해 가해자가 된다. 그 속에서 인종과 민족, 종교와 관련한 차별, 폭력, 린치가 정당화된다.

하지만 언젠가 그 가해자들은 피해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비인간화는 가해자가 영원히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영원히 피해자가 될 수도 없다. 단적으로 오랜 세월 비인간화의 피해자로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탄압하는 가해자가 되는 현실은 분명 시시하는 바가 크다. 이스라엘은 현재 팔레스타인과 극심한 대립 속에 계속되는 전쟁의 고통과 누군가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규정하는 건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과 관련해 데이비드 L. 스미스는 몇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 자신에 대한 교육, 철학적 사고의 가질 것을 주장했고 사실에 입각한 역사 교육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그 역사는 민족의 영광뿐만 아니라 가해의 역사도 포함돼야 한다.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 


이는 일제 강점기 각종 악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 교육을 외면하고 과거사를 부정하고 있는 일본의 행태와도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을 보호할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양심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는 사법기관이 될 수 있고 각종 사회 단체와 국제기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기구들이 잘 작동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과 조직된 힘이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정치세력이자 독재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결국, 비인간화의 가해자가 되는 건 철학의 부재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 현상과 각종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 능력이 있다면 그릇된 주장과 선동에 맞설 힘이 생길 수 있고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걸 막을 수 있다. 

결국, 우리 삶을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 돼야 하고 자신의 행복 역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다는 진리를 데이비드 L. 스미스는 일깨워주고 있다. 이를 물질 만능주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이익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를 외면하고 다수에만 속하려 하는 인간의 속성을 비판하는 말일 수도 있다. 건강한 사고를 가지기 위해 철학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 우리는 국민들은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각종 달콤한 감언이설로 속여가는 정치권력에 맞설 수 있고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데 있어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는 스스로를 더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은 그 점에서 문명국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본 게시글은 EBS 스토리 기자단 18기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